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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안 Jan 17. 2023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가는 양자경의 멀티버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스포일러 주의! 영화 관람 후에 읽으시기를 추천드립니다*


    단언컨대, 이렇게 정신없는 영화는 처음이다. 처음 한 10분 동안은 그냥 화면 속에 들어가서 '에블린(by 양자경)'의 뒷목을 후려쳐 기절시키고 싶었다. 제발 그 입 좀 닫아!!! 감독인 두 다니엘스(다니엘 콴과 다니엘 샤이너트) 중 하나가 성인 ADHD를 겪었다고 어디선가 주워 들었는데, 그 산만함을 개성으로 풀어낸 결과인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그렇게 정신없는 와중에 웃음을 터뜨리게 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심지어 예기치 못하게 눈물샘까지 활짝 개방시켜 버리는 이 영화. B급 정서로 충만한 병맛 액션 코미디가 왜 뜬금없이 이렇게나 슬픈가요,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되었던 분들이라면 지금부터 할 얘기에 주목해 보시길.


다정함 혹은 강인함 혹은, 웨이먼드 왕


    다정함이 세상을 구한다. 인간친화적이고 관계지향적인 박애주의자들이라면 한 번쯤 마음에 품어봤을 법한 신조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며 생각지도 못한 눈물을 줄줄 흘리게 되는 건, 뻔하지만 그래서 더 감동적인 이 메시지 때문일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적재적소에 활용된 명대사는 언제나 감동을 불러일으키지만, 특히 심금을 울리는 부분은 이 대사를 외치며 어설프고도 용감하게 나선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웨이먼드(by 키 호이 콴)'라는 것.

힘숨찐이란 이런 것? (출처 : 네이버 영화)

    웨이먼드의 배우자이자 영화의 메인 히어로 롤을 맡고 있는 에블린은 결코 저절로 호감이 가는 인물은 아니다. 지 할 말만 하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무의식적으로 주인공인 에블린의 시점에 몰입하게 된다. 즉, 관객들에게 웨이먼드는 착해빠진 능력 없는 남자, 혹은 '대가리가 꽃밭에 가 있는' 남자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웨이먼드야말로 숨겨진 영웅(?)이었다는 반전은 더욱 극적으로 다가온다.

    우리(관객들)는 우리도 모르게 알파 웨이먼드와 초점 우주의 웨이먼드를 다른 사람, 거의 정반대의 사람으로 구분 짓는다. 하지만 용맹하고 강인한, 가장 뛰어난(알파) 웨이먼드는 언제나 그의 안에 존재했다. 모든 우주에서. 그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보려 하지 않았다. 어떤 길을 걸어왔든 에블린은 여전히 에블린이듯이, 어떤 길을 걷고 있든 웨이먼드는 똑같은 웨이먼드임을.

좌 : 알파 웨이먼드 / 우 : 부자 웨이먼드 (출처 : 네이버 영화)

    에블린과 결혼하지 않고 미국으로 떠난 우주의 웨이먼드는 성공한 사업가가 된다.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나는) 더 행복했을 텐데', 단언하는 에블린과 달리, 사업가 웨이먼드는 말한다. 가난했더라도, 보잘것없었더라도, 고생만 잔뜩 했더라도, 당신(에블린)과 함께라면 그 또한 즐겁지 않았을까, 라고.


무한한 박탈감이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웨이먼드가 바보 같지만 왠지 호감 가는 인물로 설정된 데 반해, 에블린은 한 영화의 주인공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쉬이 호감이 가지 않는다. 한마디로 진상이다 자기 할 말만 하고, 주변인들에게 불평불만을 쉼 없이 늘어놓는데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에블린에게 몰입하게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가 꼭 우리 자신 같기 때문이다. 매 순간 코앞에 닥쳐오는 크고 작은 위기들을 정신없이 해결하며 억척스레 살아가도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고 제자리걸음이다. 평행우주의 에블린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그 많은 재주들을 갖고도 이 지긋지긋한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건,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해왔기 때문일까? 에블린은 온갖 후회에 잠식당한 채 살아간다. 만약에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평행우주에서 성공한 에블린 (출처 : 네이버 영화)

    여기까지는 일상을 살아가는 현실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해봤음직한 생각이다. 그러나 에블린은 실제로 자신이 삶의 중요한 기로에서 매번 잘못된 선택을 내렸고, 그 결과 '최악의 버전' 에블린으로 거듭났음을 알게 된다. 언제나 품고 있던 (그리고 우리 모두가 품고 있는) 의심에 쐐기를 박는 잔인함. 말 그대로, 무한한 우주를 통해 본 무한한 박탈감. 에블린은 결말에 이르러 그 모든 선택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고, 구질구질해도 그런 자신의 삶 역시 사랑할 구석 투성이라는 것을 깨닫지만, 보는 내가 씁쓸한 건 어쩔 수가 없다고.


조부 투바키의 우울


    웨이먼드와 에블린에 이어 영화의 주축이 되는 인물이자 임팩트 만점의 메인 빌런은 바로 웨이먼드와 에블린 사이의 딸(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우주에서 건너온 딸랑구), '조부 투바키(by 스테파니 수)'다. 자기혐오, 고독, 그리고 허무주의. 이 세 가지는 조조 츄바카, 아니 조부 투바키의 근원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 그러니 아무 의미도 없어. / 그러니 뭐든 해 봐도 돼! 언제나 후자처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지루한 일상을 반복하는 현대인이라면 쉽게 허무주의에 사로잡히고, 도저히 공허함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때가 분명히 있을 터.

이렇게 깜찍하고 화려한 세계관 최고 빌런이라니 (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는 조부 투바키의 이런 허무주의, 혹은 죽음에 대한 갈망(타나토스)이 자기혐오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풀어낸다. 스테파니 수는 공허한 눈으로, 모든 걸 포기한 시선으로 짙은 패배감과 무력감에 휩싸여 자신도 자신의 삶도 사랑할 수 없게 된 젊은 여성을 훌륭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그 자기혐오는 분명, 어떻게 해도 만족시킬 수 없는 어머니라는 존재와의 관계에서 촉발되었다.

    세상 모든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에블린과 조이/조부만큼 극단적인 경우는 드물겠지만서도, 상당히 복합적이고 양면적이다. 세대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있고,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있고, 여성이라는 공통된 입장에 대한 해석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있다. 에블린은 미친 멀티버스와 조부 투바키의 범우주적 테러(?)에 깊이 연루되고 나서야 모든 지긋지긋한 갈등의 근원을 직시할 수 있었다. 조이/조부는 에블린과 다른, 한 사람의 완전한 인간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마침내 딸을 진심으로 이해하려 노력하고,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존중하며 외로움에 지쳐버린 조부 투바키의 마음에 다가가려 노력하는 에블린의 모습은 영화의 또 다른 감동 포인트다. 특히 돌멩이 두 마리(?)가 절벽 위에서 대화하는 장면은.. 영화의 백미이자 다니엘들의 천재성에 대한 확고한 증명 아닐까.

제일 웃긴 장면도, 제일 감동적인 장면도, 모두 너였어.. 돌멩아 (출처 : 네이버 영화)


    전반적으로, 철저하게 의도된 것인지 우연히 얻어걸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인간 본연의 깊은 감정들을 예리하게 건드리는 영화였다. 다니엘스 감독들은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였다. ADHD적 다면 통찰 기법, 이라고 해두자. 웃긴데 슬프고, 짜증 나는데 신도 나고, 하찮은데 멋있는 미국 거주 아시아계 세탁소 아줌마의 혼란스러운 모험담. 감독들의 차기작이 기대될 수밖에 없는 영화다.


단 한 마디 베이글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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