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안 Feb 13. 2023

지옥에서 올라온 시네마 천국

바빌론


*스포일러 주의! 영화 관람 후에 읽으시기를 추천드립니다*


    경고부터 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이 영화... 너무 힘들어요.

특히 내향인 여러분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입장하시길.. ^ㅠ^


데이미언 셔젤, a.k.a. 할친놈


    <위플래쉬>로 화려하게 데뷔해 <라라랜드>로 옹골찬 저력을 보여준 감독, 데이미언 셔젤. 그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할리우드에 미친놈 정도가 아닐까. <라라랜드>에서도 스멀스멀 풍겨왔던 영화에 대한 그의 열렬한 사랑은, 신작 <바빌론>에서 부담스러울 정도로 짙게, 화려하게 뿜어져 나온다. 시네마의, 시네마에 의한, 시네마를 위한 궁극의 시네마! <바빌론>은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한 영화였다.

시선 강탈하는 스파이더맨 (출처 : 네이버 영화)

    친구 Y와 함께 입장하면서 왜 상영관 앞에 '광과민성 발작을 일으킬 수 있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는 거창한 경고문이 세워져 있지? 고개를 갸웃했는데, 그 의문을 지나칠 정도로 충실히 해소해 준 마지막 5분은 그야말로 시네마의 역사를 향한 찬가. 아이코닉한 영화는 전부 때려 박은 듯한 광란의 메들리, 영화라는 가공의 세상에 완전히 빠져버린 관객 한 명 한 명을 비추던 카메라, 남녀노소의 열중한 사람들로 빼곡히 찬 극장. 자신의 모든 걸 불살랐던, 자신의 모든 걸 빼앗아 갔던 영화라는 마술에 또 한 번 마음을 빼앗기고 마는 주인공의 얼굴. 그 최후의 시퀀스에 '영화'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가장 단순한 빛깔의 입자 몇 가지를 조합해 수천수만 개의 색과 장면을 만들어내며, 암실의 붉은 등 아래에서 용액에 처리되는 반 뼘 폭의 필름 따위가 수백 수천만을 울고 웃게 하는 마법이.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번쩍번쩍하는 광채의 향연 외에, 이 영화를 피로하게 만드는 요소 중 또 하나는 바로 쏟아져 나오는 오물의 이미지가 아닐까. 시작한 지 5분도 안 돼서 우선 커다란 코끼리 하나가 어마어마한 양의 대변을 갈긴다... 그 고비를 넘어도 관객 앞에는 오줌, 토사물, 그냥 침, 가래침, 땀, 뱀독이 섞인 피 등 다채로운 배설물의 향연이 도사리고 있다.

윽; 나 비위 상했어 (ㅇㅠㅇ;) (출처 : IMDb)

    그런데 우리가 종종 간과하지만, 분명히 우리 몸에서 밖으로 배출되는 물질, 즉 배설물에 해당하는 물질이 하나 더 있다. 무색무취하고, 그래서인지 그다지 더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짠맛 나는 액체. 바로 눈물!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곧 감정을 배설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화면을 뒤덮는 오물의 이미지는, 화려한 할리우드 이면의 악취 나는 추악함과 가증스러운 위선을 암시하는 동시에, 카타르시스, 즉 배설이 주는 쾌락 혹은 창조적 효용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또한 어지러운 양면성이 뒤섞인 시대의 혼란과 유독함을 대유하는 것일 테고.

울어도 예쁘다 (출처 : IMDb)

    비단 오물뿐만이 아니라, 유심히 살펴보면 다양한 시각적 상징이 치밀하게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를 함께 관람한 친구 Y는 독사에게 목을 물리는 장면을 통해 '넬리(by 마고 로비)'가 유성 영화라는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곤경을 겪을 것이라 짐작했다고.

    카메라가 '마누엘(by 디에고 칼바)'의 의상을 돋보이게 잡은 두 번의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첫 번째는 파티장의 종업원으로서 유니폼을 갖춰 입은 마누엘이 품에서 피다 만 담배꽁초를 꺼내 불을 붙이는 장면이었고, 두 번째는 이제 막 성공가도에 오른 매니(넬리가 지어준 마누엘의 애칭)가 좋은 소재의 정장을 갖춰 입고 품에서 장초를 꺼내 불을 붙이는 장면이었다. 아주 사소한 장치로 커다란 대비를 보여주는 똑똑한 연출.

구두약(?) 아니면 석탄(?) (출처 : IMDb)

    이러한 시각적 대구는 매니가 트럼펫 연주자 '시드니 팔머(by 조반 아데포)'에게 분장용품을 건네는 장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조명을 받은 시드니의 얼굴은 백인처럼 하얗게 보이고, 조명 영역 바깥으로 물러난 매니의 얼굴은 흑인인 시드니보다도 훨씬 검게 보이는 것이다. 한 번 밖에 안 봤는데도 이 정도니, 대체 얼마나 공들여 채워 넣은 영화인지 알 만하다.


너무 반짝반짝 눈이 부셔


    할리우드의 역사를 논할 때, 스타라는 단어는 붕어빵 속의 팥처럼 빼놓을 수 없는 핵심일 것이다. <바빌론>에서도 어김없이 별처럼 빛나는 스타들을 만나볼 수 있다. MGM의 간판스타 '잭 콘래드' 역의 브래드 피트, 떠오르는 신성 '넬리 라로이' 역의 마고 로비 등 쟁쟁한 출연진 가운데, 낯선 얼굴이 하나 끼어있다. 다름 아닌 주인공 '마누엘 토레스'를 연기한 디에고 칼바다. 신예가 정상급 배우들의 카리스마에 눌리지 않을 수 있을까, 우려가 무색하게도 디에고 칼바의 연기는 훌륭했고, 외모 역시 묘하게 눈길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덧붙여 '레이디 페이 주' 역의 리 준 리도 사람 홀리는 매력을 뽐냈고.)

어무니 내 성공했슈 (출처 : 네이버 영화)

    마누엘이라는 인물에게서 무엇보다도 인상 깊은 건, 그가 화려한 세계로의 편입을 꿈꾸는 야망에 찬 젊은이의 전형에서 미묘하게 빗겨 나가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도 여느 야심가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예전의 순수한 열정을 잃고 세상과 타협하는 염세적인 면모를 보이지만, 그 타협타락과 동일시하기엔 어딘가 독특한 구석이 있다. 마누엘에게는 여전히 순진무구한 청년으로서의 일부, 아니 본성이 남아있는 것이다.

    가령, 위험한 사람에게 도박 빚을 크게 진 넬리에게 화를 내면서도 마누엘은 그녀를 살리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 그런데 그 과정은 또 치밀하지가 못해서, 정신없이 파티장을 돌아다니며 심부름하던 순박하고 어리숙한 종업원 시절의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뿐이랴, 마누엘은 자신이 이뤄놓은 모든 게 무너지고 깡패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넬리와의 행복한 미래가 가능하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다.

??? : 전 해피엔딩은 취급 안 하는데요 (출처 : IMDb)

    찬란한 할리우드의 영광을 잃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가족을 꾸리며 새 행복을 찾은 마누엘. 그는 영화라는 번지르르한 환상에 절망했으나, <바빌론>은 순진한 청춘이 시련을 겪고 좌절하며 어른이 되어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누엘이 영화라는 매체 안에서 새로운 환상을 발견하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야심만만한 청춘의 질주, 몰락과 쓸쓸한 최후'라는 서사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나이트메어 앨리>가 떠오르는 한편, 두 영화를 비교해 보게 되는 지점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독심술 느와르, <나이트메어 앨리>가 궁금하다면 클릭 :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그러나 디에고 칼바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별을 꼽으라면 그건 단연코! 넬리 라로이를 연기한 마고 로비다. 스타는 되는 게 아니라 나는 것이고, 자신은 스타로 타고났다는 넬리의 대사는 본체인 마고 로비에게도 적용되는 듯하다.

포스 좔좔 본 투 비 스타 (출처 : 네이버 영화)

    프랑스어로 왕을 뜻하는 '로이'에 태양신 '라'를 붙여 누구보다도 고귀한 이름을 만들어냈다는 넬리. (사실 불어로 왕은 Roi고 넬리의 성은 Roy, 태양신은 Ra고 넬리가 붙인 건 La다. 넬리의 캐릭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재미있는 설정.) 테이블 위에서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지만, 원치 않는 접근은 결코 허용하지 않고, 시대의 섹스 심볼인 동시에 말괄량이 시골 소년 같은 넬리. 스타로 태어났다는 넬리는 그 호언장담에 걸맞게 필름-예전의 아날로그 방식 그대로 찍은 장면들이 삽입되었다-에 찍힐 때마다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약과 도박에 절어 폐인이 되었을 때도 매니의 기억 속에서 만큼은 불꽃처럼 눈부시게 타올랐다. 그날의 파티장, 첫 만남의 순간들이 재생될 때마다 관객들은 마누엘과 같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추락하는 넬리에게 다시 날개를 달아주고 싶은 매니와 누구도 자신을 멋대로 휘두를 수는 없다는 넬리. 매니는 파괴적이고 충동적인 넬리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다른 무엇도 아닌 그녀의  그 혼란스러운 본질을 사랑했다. 그러나 미래는 그녀와 그녀가 별로서 빛났던 시대를 우스갯거리로 삼을 뿐, 그가 목도했던 찬연한 아름다움은 끝끝내 기억되지 못할 것이다.

마누엘이 들어간 영화관에선, 잭과 넬리처럼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배우들을 코믹하게 묘사한 <싱잉 인 더 레인>의 한 장면이 상영되고 있었다 (출처 : IMDb)

    그런 의미에서 시네마에 미쳐 있는 게 분명한 데이미언 셔젤은, 대책 없는 몽상가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낭만을 경애하지만, 완벽한 해피엔딩이라는 허상에 속지 않는 공정한 심판관이며, 지독한 현실주의자다. 영화라는 환상을 아름답게 펼쳐 보였다가, 자비없이 거두어 들였다가, 다시 드리우기를 반복하는 정신 나간 3시간의 대장정.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걸어보아야 할 황홀하고 찬란한 여정, <바빌론>이다.


단 한 마디 미친 자본과 미친 인원과 미친 동선과 미친 혼란의 장면들... 도대체 어떻게 촬영했을까.


* 야심만만한 브래들리 쿠퍼의 질주와 몰락, 쓸쓸한 최후가 궁금하다면 :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 다안의 영화 이야기가 더 듣고 싶다면 : 다안의 브런치





    '리벤지 드레스'로 보수적인 왕실에 화끈한 한 방을 날린 90년대 스타일 아이콘, 다이애나 스펜서.


    아이비 리그에 진학하겠다는 일념으로 치열한 입시 생활에 치여 사는 50년대 명문 기숙학교 남학생들과 

    새로 부임한 괴짜 교사 존 키팅.


    이들이 만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스펜서><죽은 시인의 사회>를 다룬 다음 포스팅이 궁금하다면 구독! 눌러주세요 :D

매거진의 이전글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가는 양자경의 멀티버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