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인간 실격』
자의식 과잉의 젊은 엘리트, 나락으로 스스로를 몰아넣다.
『인간 실격』이 하나의 사건이라면 그 표어로 이보다 적절한 문장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조금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비단 작품뿐 아니라 그 저자인 다자이 오사무의 삶을 설명하기에도 모자람 없는 진술임을 깨닫게 될는지 모른다.
다자이 오사무는 1909년 출생한 일본 쇼와 시대의 작가로, 39세의 젊은 나이에 연인과 함께 투신해 생을 마감했다. 그의 대표작인 『인간 실격』은 앞선 단 한 문장의 약력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이 자전적인 이야기이며, 다자이 오사무 특유의 퇴폐주의적 작풍이 잘 드러나는 소설이다.
작품은 우연히 주인공 ‘요조’의 사진을 발견한 제삼자의 시각에서 서술된 짧은 서문과 후기, 그리고 요조가 직접 써 내려간 3개의 수기로 구성된다. 요조의 유년기부터 시작되는 연대기적 이야기는 그가 스물일곱에 이르렀을 때 이른 끝을 맺는다. 남들은 한창 싱그럽게 피어날 청춘의 시기에 요조의 삶은 이미 사실상 종결되었기 때문이리라.
'예민함'은 그때 그 시절에도 화두였는가
다자이 오사무는 요조의 입을 빌린 화려한 언변을 통해 극도로 예민하지만, 사회적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져 ‘정상’을 연기하기 위해 늘 온 힘을 소진해야만 하는 요조라는 인물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가식과 위선, 허례허식, 일명 ‘처세술’을 읽어내지 못하는 요조는 익살꾼을 자처하며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기 위해 무던히 애쓴다. 자연히 그의 마음에는 꾸미지 않은 순수함에 대한 동경이 자리한다. 얇든 두껍든, 인간은 누구나 상황에 따라, 대하는 사람에 따라 제각기 다른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그렇기에 요조의 고군분투는 쉬이 공감을 산다.
고등학생이 되어 도쿄로 상경한 요조는 한량 ‘호리키’와 친구가 되어 술, 담배, 매춘, 좌익 사상 등을 접한다. 그러는 와중에도 인간에 대한 불안감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카페의 여급인 쓰네코에게서 자신의 것과 유사한 쓸쓸함을 발견하고 동질감을 느낀 요조는 그녀와 하룻밤을 보낸 뒤 동반 자살을 기도한다. 혼자 살아남아 자살 방조죄로 기소되었다가 풀려난 그는, 잡지 기자인 시즈코와 가까워지며 자신이 그린 만화를 기고해 돈을 벌기도 하고, 담배 가게의 점원이자 ‘신뢰의 천재’인 요시코와 결혼하며 그럴듯한 인생을 꾸려 나갈 기회를 얻지만, 현실을 외면하고 현실로부터 도망치며 번번이 바로서기에 실패한다.
안 그래도 쇠약한 몸에 술을 들이붓다가 각혈하게 된 요조는 약국의 절름발이 부인에게 처방받은 모르핀을 투여한 것을 계기로 모르핀 중독자가 되고 만다. 약을 충당하기 위해 계속해서 빚을 지고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당하고, 퇴원 후에 큰형이 마련해 준 요양지에서 늙은 식모와 기이한 관계를 맺으며 완전히 폐인이 된 채 살아간다.
일견 불쾌하기까지 한 이 자기 파괴의 서사시를 읽은 뒤 가장 처음 든 생각은, 요조가 한마디로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휘둘려 얼룩지고 불행한 삶을 살아야만 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조는, 도저히 동정할 수는 없는 사람이다. 순수함에 대한 그의 열망이 설득력을 잃기 시작하는 건 도쿄로 상경한 그가 급속도로 타락하면서부터이다. 요조는 술에, 약에, 여자에 중독되어 돌이킬 수 없이 부패한 길을 걷는다.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중독은 끝없는 자기 연민과 교묘한 우월감이다. 그것이 요조라는 인물 개인의 한계인지 구시대적인 가치관의 한계인지는 모르겠으나, 소위 계집질을 하며 고매한 자신과 열등한 여자들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선을 긋는 헤픈 남자의 징징거림에는 아무래도 동조해 주기가 영 어렵지 않겠는가.
그러나 『인간 실격』에는 분명 읽는 사람을 강렬하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그것은 아마 파멸적인 삶에 대한 요조의 수기가 단순히 우울과 자기 연민에 도취된 넋두리에서 끝나지 않고, 소름 끼치도록 정확한 자기 객관화와 처절한 자기혐오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에 집요한 물음을 던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민하고 소심하고 감수성이 풍부하며 자신을 극도로 혐오한 나머지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자의식 과잉의 사나이. 다자이 오사무는 한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통렬할 정도로 날카롭게 포착해 낸다.
시대의 천재들이 공유한 이상 혹은 허상
『인간 실격』을 읽다 보면 다자이 오사무와 묘하게 겹쳐지는 작가가 있다. 박제된 천재, 이상이다. 『인간 실격』의 요조와 『날개』의 ‘나’에게 생활 무능력자에 기둥서방 노릇을 하는 젊은 엘리트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까. 혹은 두 사람의 비관적이고 무기력한 세계 인식, 불가해한 타자라는 존재 앞에서 무조건적 을이 되는 태도 때문일까. 두 작품은 마치 형제가 쓴 것처럼 닮았다.
그러고 보면 윤동주나 백석의 시에서 나타나는 가난과 수치, 선택된 자로서의 예술가라는 사명감 혹은 선민의식, 순수에의 경도 역시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후략)
- 윤동주, 「서시」 中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중략)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中
식민지와 침략국이라는, 정반대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들은 분명 어떤 시대정신을 공유한다. 아마 전쟁이라는 거대한 재난이 그만큼 인간으로 사는 일을 부끄럽게, 그리고 막막하게 만든다는 뜻일 테다. 총칼로 서로의 몸을 쑤시고, 폭탄으로 서로의 문명을 무너뜨리며 전장의 병사들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떨었을 것이다. 그들을 기다리며 남겨진 이들은 제국주의 시대의 거대한 국가라는 것이 개인의 삶을 얼마나 쉽게 짓밟을 수 있는지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고. 인류는 순수함을 상실한 채 파멸을 향해 제 발로 돌진하고 있었다. 그 처참한 현실 속에서 예술가의 의무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치열하게 사유하며 대중의 시야를 틔워주는 것임을, 천재라 불리운 그들 모두가 인지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한 맥락에서 2차 세계대전을 겪은 뒤에 탄생한 걸작,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홀든 콜필드 역시, 요조와 비슷하게 어른들의 위선에 치를 떨며 아이들의 순수함을 영원히 지켜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인간 실격』과 『호밀밭의 파수꾼』이 돌풍을 일으키며 불티나게 팔린 까닭은, 인간성이 소실된 시대에 모두가 순수를 희구하면서도 그 이상의 실현을 진심으로 믿지 못한 채 현실을 비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요조의 말년은 누가 봐도 비참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어떠한 감흥도 느끼지 못한다. 격심한 취업난과 가난에 시달리는 현대 일본의 젊은이들. 아이러니하게도 삶에 대한 그들의 만족도는 제법 높더라는 통계를 어느 뉴스에서 본 적이 있다. 바라는 게 없으면 불행할 일도 없다고 했던가. 요조의 자포자기적 무기력은 한 세기 후의 일본, 나아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까지도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극단적 방종과 퇴폐라는 요소를 제거하고 본다면, 사회의 시스템에 짓눌려 스스로의 존엄성을 포기하게 되는 개인은 어디에나, 어느 때나 존재하는 것이다.
거침없고 유려한 문체로 한 인간의, 나아가 한 시대의 좌절을 묘사해 낸 다자이 오사무. 스스로의 내면에 매몰되어 타자를 직시하거나 존중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지지만, 『인간 실격』은 보편적 인간의 실존적 고통과 고뇌를 생생하게 포착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소설의 제목이자 핵심인 이 문장은, 인간을 인간일 수 없도록 하는 사회에 비판적 물음을 던진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해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그는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가? 책이 출간된 지 75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