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벤은 자리에서 일어나 곁에 걸어둔 암녹색 트렌치코트를 툭툭 털었다. 절박하게 매달려있던 마지막 몇 방울의 물기가 맥없이 추락했다. 나는 남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켜고 벤을 따라나섰다.
번화가에서 약간 벗어난 한적한 동네에 위치한 벤의 아파트는 말할 것도 없이 깔끔했다. 대단히 넓지는 않았지만, 당연하게도 내 방보다는 훨씬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뭐,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 비하자면 상당히 검소한 집이기는 했다.
현관으로 들어서면 바로 왼편에 있는 부엌과 정면의 거실은 다소 높은 흰색의 아일랜드 테이블로 분리되어 효율적이고 깔끔해 보였다. 거실 한쪽 벽에는 2~3인용의 청회색 패브릭 소파가, 맞은편 벽에는 으레 그 자리를 차지하는 TV 대신 어두운 원목 책장이 우뚝 서 있었다. 천장까지 뻗은 선반들에 갖가지 책이 빼곡히 들어찼음에도, 산만하거나 무거워 보이지 않고 오히려 묘한 만족감이 차올랐다. 자세히 보니 그 많은 책을 크기별, 색조별, 작가별, 주제별로 철저하게 분류해두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첫눈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세련된 톤의 감색 벽지였다.
“이렇게 어두운 벽은 처음 봤어.”
“그래? 런던에는 벽이 어둡거나 무늬가 화려한 집이 흔한데.”
“한국 사람들은 죄다 하얀 벽지만 바르니까. 나도 예쁜 색으로 도배하고 싶었는데, 밝은색으로 해야 안 질리고 집이 넓어 보인다고 안 된대.”
“왜 넓어 보여야 하는데?”
“내 말이.”
나는 한 걸음 앞에 가지런히 놓인 고급 실내화에 신중하게 발을 밀어 넣었다. 새것처럼 보였다. 부드러운 가죽 소재의 암청색 슬리퍼-분명 벽이랑 색을 맞춘-를 신고 헤링본 패턴의 하얀 타일이 깔린 거실로 들어서자니 제법 격 있는 호텔의 투숙자가 된 기분이었다. 한국식 마루 문화와 집안에서도 신발을 신는다고 알려진 유럽 문화의 합의점인가. 일반적인 이 나라의 가정집과는 달리 장판 바닥이 아니니, 맨발로는 접촉면이 시릴 테지.
“설마 청소해 주시는 분이 계시나.”
“응? 그럴 리가.”
“매일 락스 칠을 해야 유지될 것 같은 바닥인데, 매일 락스 칠을 하면 도저히 날 수 없는 향기가 나네.”
“진짜 꽃집 냄새가 난다길래 사본 방향제인데. 마음에 들어?”
“안들 리가 없잖아. 어떻게 관리해야 이런 쾌적한 집이 되는 거야? 비결 좀 알려줘.”
벤은 눈썹을 살풋 찡그리며 내 겉옷을 받아 현관 옆의 코트랙에 걸었다. 우리는 벌써 약 3년째 내가 직면한 어떤 기이한 상황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내가 벤을 알게 되자마자 시작되었다. 혹은 문제가 생기자마자 나는 벤을 알게 되었다. 어느 쪽이 먼저이고 나중인지 이제는 그 순서를 정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벤과 ‘그 문제’는 2년 하고도 8개월 전 그림자에 잠겨 잘 보이지도 않는 모퉁이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와 1톤 트럭에도 결코 지지 않을 기백으로 내 삶을 무자비하게 들이받았다는 것이다. 내 생활의 모든 문법은 그 문제로 인해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휘까닥 뒤집혀버리고 말았다.
“왜 하필이면 오늘이야?”
“뭐가?”
“3년 동안 집에 놀러 오라는 말, 빈말로라도 한 번을 안 하던 사람이.”
벤은 허허실실 웃었다. 그렇게 어깨를 흔들며 조용하게 웃을 때는 어느새 장성해 버린 손주를 둔 노인처럼 보인다는 걸 그도 알고 있을까?
“서운했어?”
“음, 조금?”
“네가 못 미덥다거나, 널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니니까 기분 풀어. 너도 알지?”
“Chais.”
“사실 이 집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들인 건 처음이야.”
난 조금 놀랐다.
“뭐? 아무도?”
“그래.”
“부모님도?”
“그렇다니까.”
누구를 대상으로 삼는지 모를 약간의 승리감에 도취된 채, 나는 벤 말고는 아무도 그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공간을 낱낱이 조사하며 활보했다. 빈틈없이 채워진 책꽂이의 맨 아래 칸에는 짙은 밤색 가죽과 청동 스터드로 마감된 두툼한 앨범이 몇 권 꽂혀 있었다.
“어이, 영국인 양반, 내가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한 수 가르쳐 주지. 남의 집에 오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게 뭔지 알아?”
“뭔데?”
“옛날 사진 구경하기.”
그건 무슨 이상한 관습이야, 웃으면서 그가 순순히 두세 권의 사진첩을 꺼내주었다. 주로 아주 어릴 때의 사진들이었다.
“좀 자란 다음에 찍은 사진들은 대부분 부모님 댁에 있을 거야. 이건 할머니 할아버지가 찍어두신 거거든.”
“아, 그 사진들이 이 집에 와 있다는 건…”
“그렇지.”
“나도 그래. 보고 싶겠네.”
“너도?”
“Oui. 엄마보다 할머니랑 사이가 좋았거든.”
벤이 꼭 할머니처럼 내 뒤통수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나는 그가 어릴 적부터 점잖았을 거라 짐작했는데, 몇몇 사진들에서 그 추측이 사실로 입증되었고, 다른 몇몇 사진들에서는 의외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 봐, 왜 이렇게 서럽게 울고 있는 거야?”
유치원복임이 분명한 샛노란 반바지와 동그란 모자 차림의 사진을 발견하자마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덧 살 정도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 벤이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아 고개를 치켜들고 통곡하는 장면이었다. 신기하게도 지금의 이목구비가 그대로 갖다 붙인 것처럼 조막만 한 얼굴에 올망졸망 들어차 있었다. 내 곁에 쭈그려 앉은 벤은 고개를 기울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몰라,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더 궁금해졌잖아. 여기 붙어있는 이 파란 개구리 같은 건 뭐야?”
벤은 내가 짚은 부분을 자세히 살피느라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Perhaps a name tag? 왜, 유치원 다닐 때는 달아주잖아, 그런 거. 잃어버리지 말라고.”
“명찰? 우린 고등학생 때까지 단다.”
“아, 나도 종종 본 것 같아. 명찰. 학생들이 입는 옷이, 그… 교복? 교복.”
그러고 보니 그를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본래 쥐고 태어났을 이름을 궁금해한 적이 있다. 그는 큰맘 먹고 짝사랑 상대를 밝히는, 혹은 그에 준하는 대단한 비밀이라도 고백하려는 여자애처럼 주위를 휘휘 둘러보고는(반경 20m 이내엔 우리밖에 없었는데도 말이다), 둥그렇게 만 손을 입 옆에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정, 윤, 현이요.
나도 모르게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지. 왜 그렇게 작게 말해요? 음… 부끄럽잖아요. 뭐가? 나보다도 훨씬 세련된 이름인데요.
벤이 고개를 까딱하자 잔에 우유를 따르듯 뽀얀 머리카락이 시선 위로 드리우며 흘러내린다. 거의 30년 전에나 쓰던 이름이니까요. 어색해요.
하긴, 나라도 어느 날 갑자기 모피 코트를 입은 늘씬한 아줌마가 나타나 ‘너는 사실 내 딸이고, 이름은 까미유란다. 한수민은 한국의 네 계모, 아니 양모가 지어준 뭐랄까, 존재론적으로 무의미한 별칭에 불과하지. 자 까미유-, 이리 와서 엄마를 도와 바게-뜨 좀 썰어보지 않으련?’ 따위의 말로 출생의 비밀이라도 밝힌다 치면 어디 소름이 안 돋고 배기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