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도시의 말 (5)

by 다안

얼마간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사진을 뒤적거리며 수다를 떨다 보니, 뒤늦은 의문 하나가 피어올랐다.

“그러고 보니까 여긴 왜 오자고 한 거야?”

“아, 맞다.”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벌떡 일어난 벤은 책장 옆쪽으로 난 하얀 문을 열었다. 잔잔한 나뭇잎 무늬로 뒤덮인 아늑한 방이 나타났다. 갓을 쓴 작은 전등이 방 안을 따뜻하게 밝히고 있었다. 침대는 두 사람이 누워도 여유로울 만큼 널찍했고, 하얗게 바스락대는 이불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소나무의 알싸한 향과 햇살에 잘 말린 빨래의 보송한 낌새가 반쯤 섞인. 방은 전체적으로 커스터드 크림을 한입 가득 머금은 것처럼 부드럽고 상냥했다. 그다운 방이었다.


“불을 안 끄고 나갔어?”

“낭비라는 건 알지만… 내가 없을 때도 계속 포근한 대기가 유지됐으면 해서.”

“대기? 대기권 할 때 그 대기?”

“응. 그거 아닌가? Atmosphere? 맞는데.”

“분위기를 말하는 게 아니고?”

“맞아. I meant ‘cozy atmosphere’. 분위기랑 대기, 공기, 이 모두를 동시에 의미하는 거야.”

“아, atmosphère. 불어에도 있지, 똑같은 단어가. 발음은 약간 다르지만.”

“아-ㅌ모스페어-ㄹ? 페어-ㅎ? 불어는 항상 r 발음하고 h 발음의 중간 소리가 나더라. 목구멍에서 공기를 긁는 소리라고 해야 하나? 따라 하기 어려워. 의미도 같아?”

“그럴걸. 근데 ‘영향력’이라는 뜻도 있어.”

“영향력?”

“응, 그러니까, 누구는 누구의 영향력 아래 살았다. 이런 문장을 쓸 때.”

“Speaking of which.”


퍼뜩 뭔가 생각난 듯 벤은 창가로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거의 내 키만 한 직사각형의 무언가가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갈색 소포지에 둘둘 싸인 그것은 거울이라기엔 넓적했고, 조립하기 전의 가구라기엔 단출했다.

벤이 양팔을 활짝 펼쳐 커다란 사각형을 답삭 들어 올렸다. 탁상 위의 전등을 넘어뜨리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균형을 잡으며 움직이는 그의 얼굴은 꾸러미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게 대체 뭐야?”

대답하는 대신, 벤은 내 앞에서 포장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종이를 그냥 찢어내면 될 텐데, 접합부를 일일이 분리하려 드는 바람에 그 작업은 꽤 시간이 걸렸다. 나는 그가 조잡스레 움직이는 모양새를 구경하며 참을성을 갖고 기다렸다.

마침내 테이프를 전부 제거한 벤은 그 네모난 것의 뒤쪽에 서서, 토끼가 사라진 요술 상자를 열어젖히는 마술사라도 된 양 사각대는 종이를 단숨에 벗겨냈다.


커다란 그림이 눈앞에 성큼 다가섰다.


말라 굳은 핏덩이처럼 처절한 자주색이 캔버스 밖으로 범람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단색의 완제품을 쓴 게 아니라, 여러 겹의 붉은색과 푸른색, 먹색 물감이 마구잡이로 섞여 들어가며 오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뼈마디마디를 무자비하게 때리는 붓질이었다. 거센 고통이 그림을 그리는 내내 화가를 쑤셔댔을 게 분명했다.

그 무너져내리는 감각의 중앙에는 기묘한 각도로 몸을 꺾은 남자가 오로지 한 손으로만 위태로운 물구나무를 서고 있었다.

“I was under his atmosphere these days.”

벤이 나지막이 그렇게 말하는 걸 듣고서야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Atmosphere. 그는 자신의 단어와 나의 표현을 조합해 새로운 문장을 만들었다. 나는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단순히 그것만을 말하는 것일 리 없었다. 대기를 압도하는 분위기. 그림이 형체를 드러내자 방 안의 공기가 서늘하게 곤두섰다. 보드라운 벽지는 화면에서 발산되는 독한 향취의 습기를 머금고 축축해졌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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