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도시의 말 (3)

by 다안

투둑, 투둑. 빗방울이 떨어지듯 각설탕 두 개가 또 잔 속으로 낙하한다. 커피인지 설탕물인지를 한 모금 마신 벤이 거듭 어깻죽지를 주무른다. 어제 밤늦게까지 논문 퇴고 작업을 했다더니, 또 활자에 얼굴을 처박고 일한 모양이지. 걸음은 그렇게 반듯하면서 뭘 읽기만 하면 종이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게 참 희한하다. 거북목 사피엔스라는 신인류의 도래와는 누구보다도 무관해 보이는 사람인데. 벤은 단정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비는 아직 그치지 않았지만, 아까보다 훨씬 기세가 누그러졌다. 우산을 쓰지 않아도 문제없을 것 같았다. 자신의 건조하고 조숙한 태도를 무시당하기 쉬운 자질로 여기는 벤에게는 안된 말이겠으나, 머리카락 몇 올 흐트러진다고 갑자기 한량이나 불량배처럼 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섬세했으니까.


벤은 습관처럼 담배를 입에 물었다. 잉크가 덜 지워진 왼손이 그새를 못 참고 살짝 떨리자, 그는 품위를 잃지 않는 선에서 가능한 한 재빠르게 손을 테이블 아래로 감췄다.

“술 좀 작작 마시라니까.”

“요즘은 안 마셔.”

“웃기고 앉아 있네. 유럽에서 산다고 간도 유럽인 같을 거라고 착각하는 거야? 그러다 병나. 사람이 걱정을 하면 좀 새겨들어.”

“안 마신다니까.”

차분히 내리깐 시선.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내뱉는 사람의 면상이 얼핏 잠든 아이의 단순하고 꾸밈없는 얼굴처럼 보인다니, 모순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언짢은 듯 비틀린 입술과 꽉 맞물린 치열은 곧 여린 낯에 깔린 평온을 말끔히 지워냈다. 내가 손을 뻗어 불을 붙여주자, 그는 내 면전에 대고 길게 연기를 내쉬었다.

“오늘 어떤 개새끼가 내 옆을 지나가면서 침을 뱉더라.”

그렇게 말하는 벤의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나는 정통으로 들이마신 연기에 콜록대며 건성으로 물었다.

“Et alors?”

담뱃재가 툭툭, 맨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점원은 주문을 받느라 바빴다. 나는 눈짓으로 벤을 질책했지만, 그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천장의 얼룩을 읽어내는 데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언의 신호는 목적지에 닿지 못한 채 공중에서 갈 길을 잃었다.

“뭐라고 중얼거린 줄 알아? 더러운 호모 새끼.”

“웃기는 짬뽕이네. 지가 뭐라고.”

“더 웃긴 건 내가 분명 걔 얼굴을 안다는 거야. 언젠가 내 강의실에 앉아 있는 걸, 목격한 적이 있다고. …욕하는 사람을 똑바로 마주 볼 용기도 없는 겁쟁이들은 질색이야.”


벤에게 세상이란 그랬다. 그러니까 느슨하진 않았다. 그는 특별히 예민하거나 상처를 잘 받는 인간은 아니었고, 자주 무표정했지만, 어떤 것들에는 깜짝 놀랄 정도로 동요했다. 일반적인 수준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집착이었다. 가령 그는 나를 곧 죽어도 ‘Han/한’이라는 성으로만 불렀는데, 내 이름이 잠수 이별한 전 애인이랑 똑같아서랬다.

“그 자식, 앞으로 평생 예순, 맞나? 60 다섯 번만 더 새똥 맞았으면 좋겠어. 내가 그렇게 정할 수 있으면. 그러니까, curse, 음.”

“저주?”

“Exactly. 그런 저주를 내릴 거야.”

낮에 그에게 침을 뱉은 건방진 학생과 잠수 탄 애인 중 누구에게 남은 생애 동안 연례행사처럼 새똥을 맞아야 하는 치졸한 저주를 퍼붓고 싶다는 건지 모르는 채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벤은 얼마간 멍하니 담배를 태우는 데 집중했다. 나도 입을 다물고 커피를 마셨다. 소리가 별로 없는 곳에 앉아 있는, 서 있는, 혹은 누워 있는 벤을 방해하는 건 결코 내 취미였던 적이 없다.

곧은 손가락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에게는 생각에 잠기면 입술을 톡톡 두드리는 버릇이 있었다.

“Will you come to my flat? If you don’t mind.”

“플랫?”

“내가 사는 곳 말이야. My place.”

벤을 알고 지낸 지 거의 3년이 지났건만, 그는 단 한 번도 개인적인 공간에 나를 초대한 적이 없었다. 고작 서너 번 대화를 나눈 사람-이를테면 벤-이 비좁은 원룸에 침입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단한 자제력이었다.

“Ça va! 언제?”

유리알처럼 투명한 벤의 두 눈은 정확한 깊이가 가늠되지 않았다. 흰자위에 도는 미세한 푸른빛 때문인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의 눈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지금.”

난 놀랐지만, 군말 없이 그 의견에 동의했다.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혹하는 제안이었다. 공간은 그 주인을 닮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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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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