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벤이 문을 두드렸다. 나는 한참 자던 와중 소리에 놀라 깼고, 잠옷 차림으로 거울도 못 보고 허겁지겁 문을 열었다. 굳이 내다보지 않고도 한밤의 방문자가 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는데, 그가 다른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러지 않을 만한 방식으로 집요하고 침착하게 문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뭐야? 이 시간에 웬일이야?”
문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묻는데, 잠에 취해 혀가 자꾸 꼬였다. 오랜만의 숙면을 방해받아 솔직히 짜증도 좀 난 상태였다. 벤은 흥분한 것 같기도 초조한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가만 서서 손가락만 배배 꼬며 아무 말 않길래, 우선 그를 집안으로 들였다. 겉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 데다가 맨발에 슬리퍼만 신고 있는 꼴을 보자니 한숨부터 나왔다. 영하 3도의 기온이었다.
“그렇게 입고 여기까지 온 거야? 감기 걸리겠어.”
불쑥 찾아온 손님에 대한 단순한 인사치레보다는 훨씬 구체적인-그러니까 몸을 덥히고 신경을 가라앉힐-의도를 담은 따뜻한 꿀물을 타 벤의 손에 쥐여줬다. 벤은 이끄는 대로 얌전히 매트리스 끄트머리에 앉아 내가 둘러준 담요를 여몄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가 약간 넘은 시간이었다. 나는 대놓고 불평하는 대신 몇 번을 연달아 하품했다.
“코트는 차에 두고 왔어.”
“차를 타고 왔어?”
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 시간에 전철이나 버스가 다닐 리도 만무하고, 그 거리를 걸어서 오는 것은 조선 시대가 아니고서야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지만 전에도 말했듯 벤은 차에 타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이 시간에 굳이 자가용을 운전하면서까지 이곳에 왔다는 것은, 비몽사몽인 와중이건 아니건 내가 무조건으로 그에게 온 관심을 할애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 졸음을 몰아내려 애쓰며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내 잔은 차갑게 탄 꿀물로 채워져 있었다. 벤은 잘 보이는 벽에 기대어 세워 둔 예의 그림을 보고는 일상적인 어조로 툭 질문을 던졌다.
“잘 돼가?”
“그냥, 글쎄.”
“들려줘.”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짧게 요약해 말했다.
“곡예사가 사막에 가는 부분까지 썼어.”
“응.”
“거기서 어떤 여자를 마주쳐.”
“응.”
잠시 망설였으나 그냥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그 여자는 오래전에 그를 떠났던 연인이야. 평생에 딱 한 번 절실하게 사랑했던 사람, 목련꽃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사람.”
벤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게 멎었다. 나는 장난삼아 그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두어 번 튕겼으나 벤은 정지상태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로 호두까기 인형처럼 턱만 움직여 말했다.
“나도 어떤 사람을 마주쳤어.”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눈썹을 까딱했다. 일자로 곧게 다물린 벤의 입술이 뒤틀리며 벌어졌다. 벤은 고개를 들어 정확하게 나와 눈을 맞췄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지만 날카롭게 꽂힌 그 시선 속에 원망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불안하게 물었다.
“누구를?”
“하얗고 부드러운 사람. 나를 버리고 떠난, 내가 사랑했던 사람.”
나는 다소 얼떨떨한 기분이 되었다. 그건 그냥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사건이었을 뿐인데. 잠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희연 언니를 만났다는 거야?”
벤은 희게 미소를 지었다.
“부탁이 있어. 들어줄래?”
“뭔데?”
잠시 고민하던 그가 이내 결정을 내렸다.
“들어준다고 약속하면 말해줄게.”
우기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과 실랑이를 벌이는 건 체력만 낭비하는 일이지. 나는 더 캐묻는 대신 빠르게 기권했다.
“약속할게.”
“그럼 옷 입어. 나가자.”
“응?”
이렇게 성가신 부탁일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한 터라 당황해 반문했지만, 벤의 얼굴은 완강했다.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나는 단념하고 잠옷 위에 급하게 외투만 덧입은 채 벤을 따라나섰다. 어차피 그도 제대로 된 외출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야반도주하는 죄수들처럼 엉성한 차림새로 허파 가득히 찬바람을 들이마셨다.
“대체 어디를 가는 건데?”
조수석에 올라탄 지 30분이 훌쩍 넘었을 때, 나는 아슬아슬한 침묵을 참다못해 물었다. 벤은 대답 대신 뜬구름 잡는 소리를 했다.
“이번에 제법 큰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됐대. 한국의 유망한 신진 작가들을 소개하는 전시라더라.”
“희연 언니?”
벤은 텅 빈 고속도로를 예의주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로에는 다른 차는커녕 비닐봉지 하나 굴러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안전 운전은 개뿔 내 시선을 피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오늘 이른 오후에, 벤은 이의 제기를 고려해 수정한 몇몇 학생들의 기말고사 성적을 업데이트하기 위해 Y대를 방문했다. 볼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려는데 문득 근처의 헌책방에 들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얼마 전 그곳에서 살까 말까 고민하다 상태가 별로 안 좋아 새 제품으로 구입하려 두고 나온 책이 알고 보니 이미 절판된 판본이었기 때문이다.
책방으로 가는 길에 있는 작은 공영 주차장에는 검은 랜드로버가 서 있었는데, 별생각 없이 그냥 지나쳤다. 희연의 차와 비슷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사실 정확하게 같은 종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차에 별로 관심이 없으니까. 로고를 봐도 무슨 브랜드인지 잘 모르고.”
그다지 훌륭한 변명은 아니었다. 랜드로버 엠블럼에는 랜드로버라고 쓰여 있다고. 그전에 전조등 위만 봐도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잖아. 거기에 더해 결정적으로, 벤이 집으로 돌아갈 때도 다른 많은 길을 두고 굳이 그 주차장을 다시 지나쳐 가는 방향을 택했기 때문이다.
검고 커다란 차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다. 벤은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뜨며 차창을 응시한다. 선팅 때문에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시동은 꺼져 있는 게 확실하다. 그가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운전석의 문이 벌컥 열린다. 벤은 소리에 한번 놀라고, 여태껏 누가 그 안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란다. 민망함에 그는 서둘러 몸을 튼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오해했으면 어떡하지? 이상한 짓을 한 건… 맞지만.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부른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희연이다.
못 들은 척하고 도망칠까, 고민했지만 희연은 틈을 주지 않는다. 사실 벤에게도 빈틈을 노릴 영악한 꿍꿍이 따위는 없다. 두 사람은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다.
오랜만이네. 그러게.
희연은 하얀 바지를 입었다. 양말을 신지 않아 드러난 가는 발목이 추워 보인다고 벤은 생각한다. 잘 지냈어?
그럭저럭. 시동도 안 켜고 그 안에서 뭐 하고 있었어? 희연은 머쓱하게 대답한다. 이 주변은 다 금연 구역이라. 그러고 보니 그녀는 외투를 입고 있지 않다. 희연이 벤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그가 묻기 전에 설명한다. 요 앞에 식당에서 밥 먹다가, 동생이랑.
아. 벤은 그제야 희연의 동생을 떠올린다. 그럼 그렇지, 희연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 동네까지 올 리가 없다. 그녀의 집과도, 직장과도 거리가 있는 곳이니까. 벤이 어쩔 줄 모르고 입을 다물고 있자, 희연은 상냥한 말투로 노련하게 주제를 전환한다.
이번에 우리 미술관에서 재미있는 기획전을 하거든. 젊은 한국 아티스트들을 발굴해서 소개하는 전시인데, 시간 되면 보러와. 자기도 미술에 관심 많으니까.
벤은 신중하게 대답을 미룬다. 예의상 그러겠다고 하기는 싫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희연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 달갑지 않다. 희연은 잠자코 벤을 기다려 준다. 승낙과 거절을 저울질하다, 벤은 희연의 안목으로 구성된 전시라면 한 번쯤 현대 미술을 경험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결론짓는다. 좋아. 갈게.
희연은 곧바로 뒷좌석의 가방을 뒤져 전시 카탈로그를 한 부 건넨다. 샘플 어제 뽑은 건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운명일지도. 희연은 장난스럽게 말한다. 맞아, 수민 씨랑 같이 올 거지? 프론트에 말해놓을 테니까, 전시 기간 중 아무 때나 와서 내 이름 대고 초대권 두 장 받으면 될 거야. 오기 전에 미리 연락 주고. 빈틈없는 배려에 약간 감동하며 벤은 카탈로그를 받아든다. 고마워.
그럼 난 이제 들어가 볼게. 너무 춥다. 그래, 그리고… 음. 또 봐. 희연은 미소를 지으며 벤의 어깨를 가볍게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