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도시의 말 (32)

by 다안

여기까지 얌전히 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의아해졌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벤은 내게 반문했다.

“뭔가 더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평범하고, 어, 나쁘지 않은 만남이었다면 우리가 이 새벽에 텅텅 빈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이유가 전혀 설명이 안 되는 것 같은데.”

벤은 피식 웃었다. 그러나 나와의 대화에 성의를 표한 것일 뿐 웃음기는 전혀 없었다. 바람이 빠져 안쓰럽게 여위어 가는 풍선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벤은 뒷좌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겉옷 안주머니에 넣어놨는데, 꺼내줄래?”

나는 팔을 뒤로 뻗어 벤의 코트를 들어 올렸다. 왼쪽 가슴께의 주머니에 손을 넣고 휘저어 보니 조금 구겨진 다홍색 카탈로그가 나왔다. 벤에게 그걸 내밀었지만,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손을 펼쳐 받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결국 내가 맨 앞장에 은박으로 새겨진 제목을 소리 내어 읽었다.

“수정 : 새 시각, 새 미술. 거창하네.”

커다란 제목 아래 10개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희연 씨가 직접 발굴해낸 10명의 젊은 아티스트들이라. 나는 눈을 종이에 가까이 대고 가나다 순으로 적혀있는 이름들을 읽어내려갔다. 김지원, 박상훈, 백서경, 오형미, 엔키 림, 이수민, 장완두…

“어, 이 사람 나랑 이름 똑같다. 이수민.”


끼이이익-.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극적인 감속. 벤이 예고 없이 강하게 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나는 뒤통수를 격하게 시트에 찧었다. 엔진 소리, 바퀴가 땅에 마찰하는 소리, 전면 창에 부딪혀오는 맞바람 소리가 한순간에 잦아들자 새벽의 고속도로는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했다.


우리는 텅 빈 도로 한가운데에 섬처럼 떨궈진 차 안에 갇혀 있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벤은 총상을 입은 환자처럼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설마, 하는 싸한 기분이 엄습했다.

나는 빠르게 카탈로그를 넘겼다. 페이지별로 작가에 대한 소개와 주요 작품의 사진이 나와 있었다. 넘기고, 넘기고, 나와 이름이 똑같은 작가의 지면으로 넘어가자, 상단에 인쇄된 젊은 남자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피부가 하얗고 마른 남자였다. 광대뼈가 뾰족하게 도드라지는데도 웃는 얼굴이 무척 순해 보였다. 한국인치고도 유별날 정도로 까만 머리랑 눈동자는 창백한 피부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홀로 외딴 성에 고립되어, 제 얼굴에 낸 상처도 돌볼 수 없는 <가위손>의 기이한 주인공이 생각났다. 둘 다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지니고 있었다.


벤이 사랑했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다시 떠올려 보았다. 희연 씨와 은호는 수월하게. 그야 두 사람 다 몇 번이나 실제로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눴으니까. 테니스를 잘 치던 첫사랑. 그 건방진 꼬맹이는 벤의 묘사를 토대로 명확하지는 않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어떤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었다. 붉은빛이 도는 풍성한 갈색 머리에 눈동자가 아주 파랗고, 날씬한 10대 남자아이.

그런데 서울에 벤을 홀로 버려두고 사라진, 나와 이름이 똑같은 남자의 얼굴은 어떻게 해도 상상되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벤은 나에게 그의 생김새에 대해 어떤 언질도 준 적이 없었다. 그의 집에서도, 휴대폰 앨범에서도 깜빡 잊고 그대로 둔 사진 한 장 발견해내지 못했다. 나는 카탈로그에 나열된 이수민의 약력을 재빠르게 읽어 나갔다.


이수민

G University of London (Fine Art)

H 대학교 예술학 석사

20xx K 현대 미술관 단체전 <미래의 색 : 전위적인 구상화 展> 참가

20xx I 미술관 기획전 <도시의 초상> 참가

20xx 런던 S 갤러리 xx주년 기념 특별전 초청

20xx S 시립미술관 기획전 <이상-현실> 참가

20xx 밀라노 아트페어 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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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미술계에서 드물게도 꾸준히 구상화를 작업해 온 작가. 만으로 채 서른이 되지 않은 나이 때문인지, 수많은 인종과 문화가 모여드는 도시에서 수학했기 때문인지, 그의 필치는 과감하고 자유롭다. 당시 사랑했던 연인을 그린 신비로운 동양풍의 초상화 연작으로 졸업 전시에서 단숨에 영국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으나, 이후 돌연 귀국하여 고향인 서울에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유수의 국내 비평가들에게도 특유의 허무주의적 스타일과 관습을 파괴하는 도발성으로 인정받은 이수민이 향후 세계적 작가로 힘차게 도약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일상적인 서울의 풍경을 그만의 새로운 시선으로 풀어낸 <Inter_view> 연작과 더불어 주로 초상화로 구성된 초기 작품 일부를 만나볼 수 있다.


도저히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였다. 3년 전에, 존재했던 모든 흔적을 지우고 벤의 시야에서 사라진 남자. 나와 똑같은 이름을 하고 나라면 절대 행하지 못할 방식으로 철저하게 벤을 난도질한 남자. 수많은 질문이 뒤엉켜 머리가 혼잡했다.

“정말 몰랐다고? 이 인간이 이렇게 버젓이 서울을 휘젓고 다니는걸?”

가장 먼저 튀어나온 말은 벤을 질책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한 번 꺼낸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으니.

“몰랐어.”

벤은 잔뜩 구겨진 표정에 비교하면 놀랍도록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난 동시대 미술에는 관심 없어. H대 부근은 번잡해서 싫고. 자기 이름을 걸고 개인전을 열지도 않았잖아. 아니면,”

벤은 미간을 펴고 크게 호흡을 들이마셨다.

“아니면 알고 싶지 않았나 보지.”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는데, 목에 탁 걸려서 억지로 되삼키고 말았다. 벤은 유연하게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한동안 우리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머릿속으로 던지고 싶은 질문들을 가지런히 나열하는 데 집중했다. 그렇지만 도저히 정리할 수 없었다. 순서는 고사하고, 이 얘기를 꺼내도 되는 건지, 내가 어디까지 간섭할 수 있는 건지, 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하나도 감이 안 잡혔다.

“이 사람 졸업 전시, 보러 갔었어?”

나는 말이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뭐라도 흘려보내지 않으면 비통함에 숨이 잠길 것 같았다.

“그럼.”

“모델도 했었다고 왜 말 안 했어? 짜증 나지만 어떤 그림일지 궁금하긴 하다.”

“한 적이 없으니까.”

잘못 읽었나 싶어 카탈로그를 다시 뒤적였다.

“여기 이렇게 적혀있는데? ‘당시 사랑했던 연인을 그린 초상화 연작’. 둘이 만나고 있을 때 아니야?”

“맞아. 근데 나를 그린 적은 없어.”

두개골에 뚜껑이 달려 있다면 분명 방금 들썩했을 거다.

“이 작품들, 보기는 했어? 그 전시에 걸려 있었을 거 아냐.”

벤은 기억을 더듬는지 운전대를 톡톡 두드리다가 말했다.

“그게 이거인지는 모르겠는데, 같은 여자가 등장하는 그림이 여러 개 있기는 했어. 젊은 동양인 여자.”

이수민이라는 인간, 대체 뭐 하는 놈이지? 어이가 없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뭐?”

“아, 기억났다. 내가 물어봤었거든. 이 사람은 누구냐고.”

“그랬더니 뭐라 그러디?”

“자기 엄마가 젊었을 때를 상상하면서 그린 거라고 했어.”

“뻔뻔하기 짝이 없네.”

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거짓말은 아니었던 것 같아. 그림 속 여자가 걔랑 정말 닮았었거든.”

벤이 그렇다면 정말로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무심하고, 타인에게 큰 관심도 없어 보이지만 종종 허무할 정도로 쉽게 상대를 꿰뚫어 봤으니까.


“뭐지, 그럼? 어쨌든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일 텐데. 왜 굳이 이런 거짓말을 해?”

벤은 어깨를 으쓱했다.

“걔는 원래 좀 이상했어. 좋게 말하면 비범한 구석이 있었고. 나쁘게 말하면 일반적인… 도덕성하고는 거리가 좀 있었지. 사회가 부과하는 갖가지 의무나 규제를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거나, 심할 땐 아예 무시해버렸거든. 그렇다고 범죄를 저질렀다는 건 아니고, 어겨봤자 남들한테 손가락질이나 받는 정도의 규칙들이기는 했지만.”

“흐음. 예술가 중엔 기인이 많다더니.”

사진 속의 유한 얼굴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설명이다. 나는 이수민이 어떤 사람인지 윤곽을 그려낼 수 없었기 때문에 판단을 당분간은 유보하기로 했다. 그리고 사실 앞으로도 판단할 필요가 없었으면 했다. 그가 나와 벤의 사이에 끼어들지 말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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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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