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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볼매거진 제5호] 축구의 낭만과 마주하다




# 한휘준 Chieh Editer '서문'


우리는 이상과 현실의 간극 속에서 살아간다. 어떤 이는 낭만적인 이상을 추구하고 또 다른 이는 현실과 마주하는 삶을 중시한다. 이 두 가지 관념은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로 첨예하게 나눠져 지금까지도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이는 '축구'라는 스포츠에도 적용된다. 낭만적인 축구의 가치를 꿈꾸는 자와 현실적인 축구 산업의 이윤을 표방하는 자로 대립하는 양상은 축구가 존재하는 한 절대 해결되지 않을 난제다.


한편 최근 축구계에서는 낭만이 현실의 무게감을 이겨내지 못하는 사건이 수시로 발생했다. '슈퍼리그', '메시의 이적' 등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 이슈로 인해 낭만의 빛이 희미해져가고 있음을 모두가 실감했다.


그러나 아직도 수많은 이들이 낭만을 원하고 있다. 낭만이 현실의 냉혹함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선 낭만을 꿈꾸는 자들의 힘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풋볼매거진은 제5호를 통해 낭만주의자들의 편에 서려고 한다. 아직 꺼지지 않은 낭만의 불씨를 살려내기 위해서 말이다.


풋볼매거진과 함께 축구의 낭만과 교감해보자. 풋볼매거진이 독자들의 로맨티시스트를 자처할 테니.

# 서보원 Editer '낭만과 위선 사이, 로만 아브라모비치'


첼시가 두 번째 빅 이어를 들어 올렸지만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는 선수단과 함께 런던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2021년 7월, 첼시는 이런 성명문을 발표한다. "구단주의 명예훼손에 대해 법적으로 강력 대응한다." 그는 왜 런던으로 가지 못했을까? 또, 왜 명예훼손을 당했을까?


2003년 6월, 런던의 한 클럽은 역사적인 전환점을 맞이한다. 올리가르히 (Oligarchy, 러시아의 석유 재벌을 일컫는 표현)라 불리는 로만의 인수와 천문학적인 투자가 시작된 날이다. 로만 이전에도 구단주 개인이 한 구단의 명성을 바꾼 적이 있었다. 블랙번의 잭 워커는 2부 리그 팀을 프리미어리그 우승 팀으로 탈바꿈 시켰지만 그는 블랙번 태생의 로컬 보이였다. 외국인 구단주가 뚜렷한 명분 하나 없이 엄청난 투자를 감행한 건 로만이 처음이었다. 당시만 해도 현지에서는 "돈이 물을 흐린다", "축구계의 낭만이 사라졌다", 더 나아가 "첼스키 (Chelski, 첼시를 비꼬는 말)" 등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로만은 첼시에 있어 그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인수 후 구단 시설뿐만 아니라 지역 공동체의 발전에도 신경 썼고 코로나가 터졌을 때는 첼시의 밀레니엄 호텔을 영국 의료진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최근의 가장 문제였던 슈퍼리그 이슈에 있어서는 팬들의 마음과 반대되는 입장이 되자 크게 분노했고 그 누구보다 빨리 철회를 발표했다.


이런 헌신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현지에선 그를 향한 비방과 논란이 계속해서 불거졌다. 축구 내적으로는 "축구 인플레이션"을 일으킨 원흉이라 비판하고 축구 외적으로는 "정경유착의 더러운 돈"이라고 비난했다. 2018년, 세르게이 스크리팔 암살 사건으로 인해 영러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는데, 이로 인해 영국 내 올리가르히는 친러와 친영,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했다. 푸틴의 상업적 파트너인 로만은 자연스럽게 친러를 택했고 영국에서 추방되어야만 했다. 최근 발행된 <푸틴의 사람들 (2021, 캐서린 벨튼)>에서는 "푸틴의 돈 세탁소가 첼시였고 이 때문에 로만이 인수했다"라고 주장하면서 더 큰 논란에 휩싸였다. 로만은 즉각 성명서를 발표하며 법적으로 대응했지만 다소 불편한 영러 관계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헐 시티의 회장, 폴 더펜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이는 과시하기 위해, 또는 심심한 취미로, 어쩌면 사업을 위해서 구단을 인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역 자선 활동을 겸하진 않는다." 축구계를 망쳤다고 평가받는 로만은 영러 관계 사이, 위선자로 낙인 찍혀 있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블루스의 로맨티스트다. 우린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숨죽이며 지켜볼 뿐이다.

# 정채건 Editer '누군가 한국축구의 낭만을 묻는다면, 영화 <비상>'


한국은 축구의 변방이다. 축구의 중심은 누가 뭐라해도 유럽이고 유서 깊은 프로 축구 리그들도 대부분 유럽에 포진해 있다. 때문에 K리그는 변방의 축구 리그가 맞다. K리그를 열렬히 좋아하는 팬이라도 이 명제를 쉽게 반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K리그의 수준은 유럽 유수 리그들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K리그를 보지 않는 이유라 말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정면에서 반박할 것이다.


로컬리그, 로컬 팀의 팬이 된다는 건 단순히 수준 높은 경기를 보기 위함이 아니다. 그들에게 지역의 사랑을 투영하고 감정을 쏟으며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유럽에도 하부리그 팀을 서포트 하는 서포터들이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로컬 리그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야기’다. 지역 연고나 여타의 이유로 한 팀의 관심을 가지게 되면 그 팀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를 느끼게 되고 자연스럽게 팬으로 거듭난다. 한국 축구에도 좋은 이야기를 가진 팀이 있고 K리그는 생각보다 방대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을 기록해둔 자료는 많지 않다. 그래서 지금부터 소개할 영화가 귀한 것이다.


누군가 한국축구의 낭만을 묻는다면 나는 지체없이 영화 <비상>을 추천한다. 이 영화는 만년 꼴지를 면하지 못하는 시민 구단 인천이 장외룡 감독과 함께 힘차게 비상하여 전반기 1위를 달성한 시즌의 이야기를 담아낸 다큐멘터리이다. 왜 이 시기에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좋은 다큐가 그러하듯 알맞은 타이밍에 제작되어 감동적이고 낭만이 가득한 스토리를 그려냈다.


여러 팀을 전전하다 인천에 자리잡은 소위 ‘실패한 선수’들, 괴짜로 불리던 용병, 선수 말년에 팀을 구하지 못해 합류한 노장까지. 매년 에이스를 타 구단에 매각하면서도 시민구단의 재정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패배감에 찌들어 있는 구단 인천은 장외룡이라는 지도자의 등장과 그의 훈련, 전술, 기적적인 스쿼드 운영에 힘입어 이전 시즌 최하위라는 누명을 벗고 K리그에 돌풍의 주역이 된다.


영화는 이러한 인천이 의외의 성적을 거두게 된 이야기를 철저히 내부에서 풀어낸다. 패배감에 찌든 선수들과 훈련할 곳이 마땅치 않아 지방까지 내려가서 훈련을 진행시켜야 하는 스태프들, 화려한 시민 구단의 창단과 더불어 인천의 팬이 되었지만 변변찮은 팀의 성적에 고배를 마시기만 했던 팬들까지. 인천은 이들에게 지역의 사랑을 투영하고 감정을 쏟아 응원했던 팀 이상의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노력하고 일궈낸 과정들이 결과로 이어지며 마침내 영화와 같은 이야기가 생겨난다.


인천은 K리그에서도 손에 꼽힐만큼 열성적인 서포터즈를 보유한 구단으로 유명하다. 아마 그 이유를 들자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분명히 <비상>과 같은 이야기가 있어 팀과 팬들의 결속력이 높아졌고 이러한 이야기가 영화로 개봉하며 새로운 팬들을 몰고 왔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K리그는 변방의 리그다. 그리고 유럽에 비해 높은 수준의 리그도 아니다. 하지만 결코 재미없는 리그라 할 수도 없다. 그 안에는 어떤 리그 만큼이나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있고 우리와 가까이 숨쉬는 이들이 존재한다. 중반부를 너머 후반부로 접어들고 있는 K리그의 낭만을 느끼고 싶다면 <비상>을 보시길 적극 권장한다.

# 정하랑 Editer '메노티의 낭만과 빌라르도의 실용'


축구가 가져다주는 짜릿한 승리의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꾸기 힘든 달콤한 감정이다. 승리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어떤 팀은 추악하다고 손가락질 받는 방식으로, 또 어떤 팀은 승리만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는 방식으로, 그리고 또 어떤 팀은 자신들의 축구 철학을 경기장에서 보여주는 것과 그를 통해 완벽한 승리를 추구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실제로 축구사에서 오랜 기간 첨예하게 대립했던 논제가 바로 ‘낭만’과 ‘실용’인만큼 우리는 축구에 대해 언제든지 새롭게 파헤칠 수 있는 방향성을 갖고 있다.


음악처럼 축구에도 낭만주의가 있다면 현재 그것의 대표 주자는 펩 과르디올라이지만, 과거 세자르 루이스 메노티가 이룬 업적을 절대 간과할 수 없다. 공격적이고 아름답고 기술적이며 화려한 축구, 메노티즘이라 불리는 축구 철학을 통해 조국에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선사한 메노티 감독은 한마디로 낭만적인 축구를 선호하는 사람들이라면 호평할만한 인물임에 분명하다. 설사 1978년 월드컵의 논란거리들이 그의 성공을 폄하하려 하지만 그의 철학만큼은 그 누구도 깎아내리지 못할 ‘낭만’이다. 메노티의 낭만은 수비는 치졸한 방식의 경기 운영이라 평한 반면 공격을 우월한 자들의 방식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원천적인 경쟁 본능과 열정적인 감정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으나, 이론적인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에게 메노티의 극단적인 낭만은 그리 환영받지는 못했다.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승리를 추구하는 건 조건이 갖춰져야 되는 것 아닌가?” 등과 같은 비판도 따라왔을 정도다. 그렇기에 이에 반대되는 한 감독의 철학 또한 주목을 받는다.


어떤 식으로든 실용의 이름으로 승리를 추구해야 한다면 그것의 현대 주자는 라니에리와 시메오네일 것이다. 허나 과거 실용의 토대를 만든 이는 카를로스 빌라르도라는 인물이다. 수비에 집중하며 실리적인 방식을 택한 빌라르도는 우승 후보로 평가받지 않던 조국에 우승 트로피를 선사했다. 메노티 감독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으로 평가받는 빌라르도의 업적.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낭만은 그를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깎아내렸다. “저 축구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보고 싶어하는 축구가 아니다.” “빌라르도는 아르헨티나가 전통적으로 추구해왔던 아름답고 공격적인 플레이를 저버리며 이상을 깨부쉈다.” 등. 메노티의 철학과 빌라르도의 철학의 대립은 이때부터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축구에 정답을 논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주장이 어디 있겠냐만은, 인간이 감정적인 요소를 들이대는 부분을 어디에서도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 만큼 두 철학의 대립은 계속해서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하지만 이 대립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축구에서 추구하는 이론과 철학들의 경쟁은 서로를 발전시킬 것이며 실제로 이 현상은 현재진행형이다. 일명 ‘메노티즘’의 후계자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철학으로 축구를 완성시키려 하고 있고 ‘빌라르도즘’의 후계자들은 어떻게든 승리에 한 발짝 더 다가가려 노력 중이다. 이러나 저러나 축구는 경쟁으로 완성되고 지금까지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풋볼루션 Editer 'AS 로마의 황제 프란체스코 토티'


휘슬이 울리고 나면 흡사 전쟁터로 변하듯 치열한 양상을 보여주는 축구에서 가장 낭만적인 순간은 언제일까? 중요한 대회에서 승리하더라도 마냥 기뻐하지 않고 상대 선수들을 위로하거나, 이적 후 친정팀을 상대로 골을 터트리더라도 셀레브레이션을 펼치지 않고 자중하는 모습 등이 축구 선수가 보여줄 수 있는 낭만의 일부다.


또한 실력이 최고의 가치로 평가받는 축구계에서 ‘월클럽맨’들이 보여주는 낭만도 우리를 벅차오르게 만드는 순간이다. 자신이 받는 대우보다 훨씬 좋은 조건의 유혹이 있었음에도 명예, 돈을 좇아 움직이는 것이 아닌 클럽과 보이지 않는 붉은 실로 연결된 것처럼 사랑에 빠지거나 어떠한 제안에도 흔들리지 않는 충성심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로마의 황제라 불리며 약 22년간 클럽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프란체스코 토티가 그 대표적인 원클럽맨 중 하나다.


1988년 로마 유스팀에 입단한 토티는 정식 계약을 맺자마자 17세에 프로 무대에 데뷔해 서서히 출전 시간을 늘려갔다. 뛰어난 실력을 보여준 그는 98-99시즌 AS 로마 역대 최연소 주장에 선정되며 토티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전세계에 각인시켰다.


특히, 토티가 활약했던 시기는 유벤투스, AC 밀란, 인테르의 3강 체제 속 이들을 위협하는 AS 로마, 파르마, 피오렌티나, 라치오의 약진으로 7공주 체제가 완성되는 춘추전국시대였다.


강력한 상대들이 즐비했지만 토티가 이끄는 로마는 00-01시즌 유벤투스의 끈질긴 추격을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는데, 그의 활약을 지켜본 레알 마드리드는 2000년대 초 슈퍼스타를 대거 영입해 은하수(갈락티코)를 이루겠다는 선수 영입 정책을 위해 토티의 영입을 노렸다. 레알 마드리드는 산타클로스처럼 크리스마스에 토티의 이름과 10번이 새겨진 유니폼과 페레스 회장의 친필 편지를 보내며 직접적인 관심을 피력했다. 이에 토티도 당대 최고의 선수들이 가득한 레알 행을 고심했지만 "나는 로마를 위해 평생을 바쳤고 내가 없는 로마를 상상해본 적이 없다."라는 말과 함께 클럽을 떠나지 않을 의사를 내비쳤다.


그 이후 로마의 전력이 약해지는 상황 속에서도 토티는 중심 역할을 해냈고 41세가 되던 16-17시즌 은퇴 전까지 785경기 307골 185도움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비록 우승을 차지한 이후 준우승만 9회를 차지하며 우승컵과는 멀어졌음에도 불만 없이 매시즌 팀을 위한 헌신을 보여준 토티는 자신의 말대로 로마를 위해 평생을 바친 선수로 기억될 것이다.

# 이현우 Editer 'K리그에 낭만은 없다? 원클럽맨을 대하는 자세'


‘원클럽맨’. 선수 경력을 한 클럽에서만 이어간 선수에게 붙는 명칭이다. 군 복무라는 특수한 환경이 존재하는 국내 축구 상황에서는 입대 형식의 임대 외에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지 않았다면 원클럽맨으로 인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은 K리그만의 독특한 원클럽맨 기준에 딱 맞아떨어지는 선수가 있었는데, 빨검에서 파검의 사나이가 된 김광석이다.


김광석은 포항 스틸러스의 레전드다. 상무에서 국방의 의무를 다한 것을 제외하고 2002년부터 2020년까지 포항과 열일곱 시즌을 함께했다. 포항의 상징이 되어가는 동안 2009년 ACL 우승을 포함해 7번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한국 나이로 38세였던 2020시즌에는 중앙 수비 자원이 부족했던 포항 수비 라인의 중심을 잡으며 27경기 전 경기에 출장해 팀을 5년 만에 ACL 진출로 이끌다.


팀과 희로애락을 같이 경험하며 ‘강철전사’로 마무리될 줄 알았던 축구선수 김광석의 이야기 전개는 2021시즌을 앞두고 예상 밖의 반전을 맞이했다. 다른 팀에서 뛰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던 김광석이 돌연 포항을 떠나 인천으로 이적한 것이다. 계약 기간에 대한 선수와 팀의 입장이 좁혀지지 않아 김광석은 결국 2002년부터 둥지를 터오던 포항을 떠나게 되었다.


김광석의 이적은 포항 팬들에게 큰 충격이 된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K리그 전체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는 이슈다. 김광석은 포항 소속으로 오랜 기간 이름을 올린 것과 더불어 팀 경력 말미까지 주전 선수로 활약했었다. 경기장 안팎에서 끼치는 영향력도 매우 컸고 그것은 선수단과 팀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선수 경력 황혼기에 접어들었음에도 그라운드 위에서 충분히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주던 구단의 상징이 되는 선수, 팬들이 사랑하는 선수를 너무 쉽게 보낸 포항의 선택은 진한 아쉬움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분명 스포츠 세계는 낭만보단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 필수불가결하다. 다만 이성과 더불어 이상을 함께 꿈꿀 수 있었던 상황을 너무 쉽게 포기한 것이 밖에서 축구를 바라보는 팬들과 안에서 축구를 경험하는 선수들에게 부정적인 나비 효과로 다가오지는 않을지 걱정될 뿐이다.


스포츠 세계에는 스포츠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무형의 가치가 있다. 수치로 환산할 수 없고 단순한 돈의 원리로는 설명되지 않지만 스포츠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형의 가치는 원클럽맨이라는 이름에도 많이 내포되어 있다. 스포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이 가치를 쌓는 것에는 오랜 시간과 공이 들어가지만 무너지는 것은 찰나의 순간이다. 단순히 낭만을 넘어 K리그를 지탱해 나갈 가치를 경제 논리에 입각하여 등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

# 정재욱 Editer 'We're About to Paint The Town, MF91'


축구의 낭만! 원 클럽 맨, 완벽한 전술, 판타지스타의 플레이 모두 낭만적이다. 하지만 불타는 열정의 서포터즈들이 펼치는 응원도 축구의 낭만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요소 중 하나다. 함성을 내지르는 관중들을 보면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는가.


한편 최근 2년 간 축구는 낭만을 잃어가고 있었다. 코로나19로 인해 관중 없이 경기를 치르거나 관중의 입장이 제한됐다. 서포터즈의 함성과 박수 소리를 들을 수 없었고 고요한 경기장엔 선수, 감독, 심판의 소리만 울려 퍼질 뿐이었다. 리그1의 명가라고 불리는 생테티엔의 상황도 그러했다. 열정적인 서포팅으로 유명한 생테티엔 서포터즈는 자취를 감추었고 응원이 없어서인지 팀 또한 최악의 성적을 냈다. 이에 팬들은 더더욱 경기장에 나가 선수들을 응원했고 보드진에 대한 비판도 서슴없이 내세웠다.


생테티엔의 서포터즈 단체 중 가장 규모가 큰 Magic Fans 1991(이하 MF91)은 비록 경기장에 나가 응원을 펼치진 못했으나 다양한 방식으로 생테티엔 구단에 대한 사랑을 피력했다. 경기장 배너 문구를 통해 선수들을 응원했고 보드진을 만나 구단 운영에 대해 논의를 펼치기도 했다. MF91은 1991년 조직된 생테티엔의 서포터 단체다. 광업 도시 생테티엔의 상징인 광부 헬멧을 쓴 해골이 그려진 깃발을 가지고 스타드 조프루아-기샤르에 모인 MF91 서포터즈는 조직 초기 과격한 배너와 거친 서포팅으로 금세 유명세를 탔다.


승부조작 논란 당시 마르세유 원정을 떠날 때 '파팽을 죽이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무시무시한 문구의 배너를 건 것은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MF91을 포함한 서포터들은 리옹과의 더비전만 되면 불타오르는데, ‘리옹 죽어라'라는 배너를 걸고 리옹 서포터들과 패싸움을 벌인 건 유명한 일화다.


그러나 MF91 멤버들이 거친 모습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조직 초기부터 구단 운영 방향을 결정하는 회의에 팬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구단이 팬들의 의견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땐 성명문 발표와 단체 행동 등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조직된 지 20년이 된 오늘날도 그들의 활발한 활동은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19 이전, 매 홈경기마다 그들은 북쪽 스탠드에서 깃발을 휘날리고 초록색 홍염을 피우며 리그앙에서 가장 열정적인 서포팅을 펼치는 생테티엔의 자존심을 세웠다. 지난 시즌 생테티엔이 최하위권에서 허덕일 땐 보드진과 감독에게 미팅을 요청하는 성명서를 내고 미팅을 가졌다.


이번 시즌 생테티엔은 20000명의 관중을 홈 경기에 수용한다고 발표했다. 서포터즈와 함께하는 축구의 낭만이 돌아왔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냉정하게 서포팅을 펼치는 진정한 낭만을 아는 서포터 MF91. 그들은 다시 생테티엔 도시 전역을 초록빛으로 물들일 준비를 마쳤다.

# 오성윤 Editer '낭만과 미련 그 사이, 50+1 규정'


맨시티, PSG 등은 이른바 ‘오일머니’를 등에 업고 이적시장의 큰 손으로 떠오르며 단기간에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처럼 현대축구는 오일머니를 비롯한 외부 자본의 비중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이들의 통 큰 영입의 영향일까. 근래 축구계는 선수들의 전반적인 몸값이 폭등했고 자본의 크기 또한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자본의 크기가 리그의 크기를 결정한다는 사실이 축구계에 정립되는 듯했다. 하지만 자본의 비중이 비대해진 현대축구에서 분데스리가는 ‘50+1 규정’이라는 독특한 룰을 전통적으로 시행해오며 막대한 자본의 유입을 방지하고 자본주의로 흡수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50+1 규정’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다. 50+1 규정은 클럽 자체나 팬들의 클럽 지분이 51% 이상을 차지하는 것을 말한다. 이 정책을 시행하는 이유는 외국 자본들이 막대한 돈으로 구단을 인수하는 것을 방지하는 동시에 팬들을 위한 축구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50+1 규정은 축구의 상업성을 강조하기보단 팬들을 위한 리그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취지의 정책이다. 이 규정을 통해 팬들은 구단 운영에 개입할 권리를 행사하고 이로 인해 팬들의 여러 의견이 반영되며 건전하고 투명한 재정 상황이 형성된다.


클럽의 건전한 재정 상황은 성공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유망주들의 성지’ 도르트문트를 꼽을 수 있다. 도르트문트는 거대 자본의 손길을 뿌리치고 다양한 스폰서를 유치하여 구단 재정을 충당했다. 스폰서를 통해 벌어들인 깨끗한 자금으로 유망한 선수들을 저렴한 몸값에 영입해와 비싸게 매각하며 2016년부터 약 3년간 한화로 약 6000억 원의 수입을 챙겼다.


이와 같은 50+1 규정의 활약으로 올바른 구단 운영을 보여주는 분데스리가의 모범적인 행실이 축구계에 꾸준히 비춰지고 있다. 하지만 최근 팀의 성장에 자본의 영향력이 증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지출을 제한시키는 50+1 규정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팬들의 수도 늘어는 상황이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맨시티, PSG는 거대 자본과의 동행을 택하고 슈퍼스타를 대거 영입하며 전력을 강화했다. 이와 달리 분데스리가의 2강으로 자리 잡고 있는 뮌헨과 도르트문트는 이른바 ‘꿀영입’에 계속해서 성공하며 맨시티, PSG 못지않은 전력을 구축했다. 그러나 최근 영입 자본의 중요성이 점점 대두됨에 따라 PL과 분데스리가는 상반된 이적시장을 보냈다. PL의 여러 클럽은 높은 영입 자금을 바탕으로 스쿼드를 불리며 안정적인 보강을 이뤄냈다. 그에 비해 분데스리가 대다수의 팀은 부족한 이적료 문제에 부닥치며 선수단의 질적, 양적 보강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분데스리가는 50+1 규정의 덕택에 유망주 배출량도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팬들을 위한 리그를 만들겠다는 정책의 좋은 취지가 큰 작용을 해 현지 팬들의 전폭적인 지지 또한 받고 있다. 그러나 시장의 크기는 더욱더 커지고 있으며 자금이 부족해진다면 낭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영입의 공백 또한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팬들과 리그의 조화 그리고 몰려들어오는 자본의 제한은 스포츠 정신을 일깨워주지만 한편으로는 리그의 퇴보를 불러온다. 이적시장에서의 지출이 한 시즌 농사와 직결되는 최근의 양상을 독일 축구 협회와 분데스리가는 계속적인 협의와 개선을 통해 타개할 필요가 있다.

# 김건호 Editer '팬들이 바라는 낭만'


며칠 전 바르셀로나의 리빙 레전드, 리오넬 메시(이하 메시)의 재계약이 불발되었다는 소식이 여러 매체를 통해 전해졌다. 오랜 기간 몸을 담아온 팀과의 재계약 불발 소식에 전 세계 축구 팬들은 회의적이었다. 팬들과 전문가들로부터 여러 추측이 나오던 중 메시는 기자회견을 열어 이러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약 17년을 바르셀로나의 1군에서 보낸 현시대 최고의 로멘티스트 메시는 더는 “원클럽맨” 이라는 칭호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프랑스 리그의 파리 생제르맹 FC와 가장 강력하게 연결되고 있는 현재이지만 지금까지도 확실하게 정해진 것은 없다.


이와 같이 팬들의 희망과는 다르게 친정팀을 떠나 다른 팀으로 가게 된 경우가 올 시즌 K리그에서도 있었다. 2021시즌 초 백승호 선수의 K리그 복귀 관련 논란과 김광석 선수의 인천 이적을 그것이다.


백승호는 바르셀로나 유소년 팀으로 합류하기 전 수원의 유스 팀 소속이었다. 이에 수원은 백승호의 해외 진출에 있어 금전적으로 많은 지원을 약속했다. 이를 전제로 수원과 백승호는 선수의 K리그 복귀 시 해당 구단과 최우선으로 협상해야 한다는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백승호의 소속사는 이를 무시하고 올해 초 K리그 복귀 과정에서 전북과 우선적으로 협상을 추진했다.


결과적으로 백승호는 2021시즌 수원이 아닌 전북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수원은 이러한 소식에 깊은 유감을 표했고 국내 팬들의 시선도 달갑지 못했다. 물론 계약 사항이기에 명시된 위약 사항을 이행하면 되는 문제이지만 고향 팀 팬들이 바라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와 도리였다.


앞선 경우와는 다르게 김광석의 이적 과정에서 법적인 마찰은 전혀 없었다. 김광석은 군 복무를 제외한 18년을 포항 스틸러스에서 뛰었다. 올해로 38살인 그는 선수 특유의 리더십과 안정적인 수비력으로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매력적인 영입 대상이었다. 몇 년 전부터 잔류왕이라 불렸지만 올해는 이러한 별명을 벗어 던지고자 했던 인천은 수비력 보강을 위해 김광석에게 이적 제의를 보냈고 별다른 문제없이 이적이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팬들은 이러한 포항의 행보에 큰 아쉬움을 표했다. 팀의 레전드를 너무 쉽게 보내 주었다는 것이 골자였다. 스틸러스의 수뇌부에게는 낭만보단 현실적인 경영 문제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재정적인 상황과 다른 부차적인 요소를 고려한 구단의 판단이겠지만 팀의 전설적인 선수의 이탈은 팬들의 실망감을 크게 만들었다.


백승호와 김광석의 사례에서 점차 축구의 낭만이 사라져 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때론 낭만이라는 무형의 것이 돈보다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더더욱 아쉬움이 남는 일련의 사건들이었다. 이러한 현실적인 사건의 반복으로 인해 지금의 우리가 낭만에 목말라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 이경민 Editer '레드&화이트의 낭만, 아르센 벵거'


“Arsene Who?” 아르센 벵거가 아스날에 부임했을 때 가장 많이 듣던 말이다. 모두가 무명의 프랑스인을 의심했지만 그는 아스날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으로 기록됐다.


벵거는 본인의 자서전에서도 밝혔던 것처럼 평생 ‘레드&화이트’의 색을 가지고 있는 팀만을 지도했다. 어쩌면 그와 아스날의 만남은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스날 부임 후 벵거는 팀의 전반전인 시스템을 개편했다. 당시엔 일반적이지 않았던 식단 관리와 요가 등 다양한 관리 요법을 선수단에게 전파했고 폐쇄적인 잉글랜드에 다양한 외국 선수를 데려왔다. 또한 소위 ‘벵거볼’ 로 대표되는 전술을 통해 아스날에 새로운 색을 입혔다. 그의 혁신과 함께 아스날은 거듭된 성공을 거두었고 03-04시즌 전무후무한 무패 우승이라는 업적으로 방점을 찍었다.


영광과 승리가 가득했던 시간을 지나 아스날과 벵거에게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새로운 홈구장, 에미레이트의 건립이 결정된 것이다. 이로 인해 아스날은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다. 영광을 함께 했던 앙리, 피레스, 비에이라 같은 선수들을 떠나보내야 했을 정도다. 급여 예산은 50%가 삭감됐고 부채는 쌓이고 쌓여 5년 동안 적어도 3번의 챔피언스리그 진출과 연평균 54000명의 관중이 입장해야 빚을 갚을 수 있는 상황에 직면했다.


다른 경쟁팀들은 그 사이 부유한 구단주들의 등장으로 마음껏 스타 선수들을 영입했다.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졌지만 오직 아스날만이 제자리걸음을 반복했다. 사실상 모든 상황이 아스날에게 안 좋게 흘러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벵거는 아스날의 마지막 보루였다. 그는 재정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스날을 19년 연속으로 챔피언스리그 진출로 이끌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선수 판매는 계속됐고 파브레가스, 반페르시, 나스리 등 여러 스타 선수들이 아스날을 떠나갔다.


벵거에게도 많은 유혹이 있었다. 레알 마드리드, 유벤투스, PSG, 바이에른 뮌헨 등이 벵거를 원했다. 하지만 벵거는 끝내 아스날에 남았다. 자신을 믿어준 아스날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벵거의 말마따나 그의 삶은 ‘레드&화이트’, 아스날 그 자체였다.


벵거의 낭만은 이상과 현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클럽의 발전과 함께 본인이 추구했던 아름다운 축구에 대한 이상, 클럽에 대한 충성을 놓지 않았다. ‘벵거볼’ 이라는 자신만의 색깔로 무패 우승과 같은 업적도 남겼다. 그리고 아스날은 에미레이트 구장 건설 이후 힘든 시간을 거쳐 안정적이고 건강한 재정적 상황을 이뤄냈다. 결국 벵거의 낭만은 아스날의 역사가 됐다.

# 신중혁 Editer '위대한 주장 카를레스 푸욜'


바르셀로나를 넘어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던 위대한 주장 카를레스 푸욜. 그가 처음부터 센터백으로 뛰었던 것은 아니었다. 골키퍼, 공격수 등 여러 포지션을 경험하다가 바르사 유스에 들어가서야 수비 쪽으로 포지션을 굳혔다. 바르사 B팀에서 라이트백으로 두각을 보이면서 99년 1군에 라이트백으로 데뷔한 뒤, 바르사의 챔스 4강 진출에도 기여하며 유럽 최고의 라이트백 중 한명으로 군림했다. 하지만 02-03시즌 센터백들의 줄부상을 당했고 이는 푸욜의 축구 인생을 바꾼 계기로 작용했다. 초반에는 적응하는데 애를 먹었지만 점점 성장해 센터백으로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푸욜은 은퇴하기 전까지 바르셀로나의 주장으로서 라리가 6회, 챔스 3회, 월드컵 1회 등 엄청난 업적들을 이뤄냈다. 화려한 수상 경력만 놓고 봐도 그가 대단한 선수라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이는 없다. 그리고 은퇴 이후 지금까지도 푸욜은 ‘위대한 주장’으로 불리며 회자되고 있다. 심지어 최고의 라이벌인 레알 마드리드 팬들에게도 말이다.


푸욜은 훌륭한 멘탈과 단단한 리더십을 가장 큰 장점으로 하는 선수다. 카리스마와 팀을 향한 헌신적인 모습으로 경기장 안팎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다. 이 때문에 바르셀로나 팬들에게 역대 최고의 주장으로 칭송받고 있고 타 팀팬들도 푸욜의 위대함을 인정한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잡음을 만들지 않는 것은 물론 후배들을 챙겨주고 꾸짖기도 하면서 바른길로 인도하는 참선배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특히 피케의 직속 선배로서 지금의 피케를 만든 장본인이라고 볼 수 있다.


엘클라시코 도중 피케가 라이터를 이용해 시간을 끌려고 하자 푸욜이 나타나 그를 제지하고 경기에 집중하게 한 일화는 유명하다. 5대0으로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티아고와 아우베스가 과한 세레머니를 하자 바로 달려와 제제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자신보다 무려 8살이나 어린 대표팀 후배(라모스)에게 뺨을 맞았으나 경기 후 “괜찮다. 경기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다 잊었다.” 라고 말하며 대인배 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10-11시즌 챔스 결승 당시 간암 수술을 받고 돌아온 에릭 아비달에게 주장 완장을 건네며 가장 먼저 빅이어를 드는 영광을 선물하는 따뜻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 후 아비달은“지금 내 기분을 뭐라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나에게 가장 먼저 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게 해준 동료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나에게 주장 완장을 준 푸욜은 최고의 신사이다.”라고 말하며 푸욜을 치켜세웠다.


“난 타고난 재능을 가진 축구선수가 아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한다. 나는 영리하지는 않지만, 시험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여 결국에는 괜찮은 결과를 받아내고야 마는 학생과 같다.” 178cm의 수비수로서는 작은 키를 극복하고 탁월한 리더쉽과 정신력으로 세계 최고의 클럽에서 10년간 주장을 맡았던 카를레스 푸욜. 이런 주장이 다시 나올 수 있을까? 그의 축구 인생은 그야말로 바르사의 낭만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조재희 Editer '낭만의 가시밭길 조던 헨더슨'


주장으로서 올해 7년 차에 접어든 조던 헨더슨은 리버풀의 챔피언스리그와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이끈 일등공신이다. 입단 초기 좋지 못한 플레이로 질타를 받던 시기도 있었으나 본인이 가진 성실함과 끈기를 앞세워 매 시즌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무엇보다 핸더슨이 가진 최고의 무기는 패스 능력도, 활동량도 아닌 리더십이다.


리버풀은 자국 대표팀에서 주장 역할을 맡고 있는 스타 선수들이 즐비한 팀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두를 따뜻하게 포옹하고 아우르는 선수는 단 한 명, 조던 헨더슨이다. 지금껏 그가 보여준 꾸준함과 성실함 그리고 피치 안팎에서의 존재감은 리버풀의 그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31살을 맞은 헨더슨은 리버풀과의 재계약을 앞두고 난항을 겪고 있다. FSG 그룹과 헨더슨의 마찰은 단순 주급 인상이나 보너스 등의 경제적 문제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헨더슨은 남은 커리어를 리버풀에서 마무리하고 싶어 하며 앞으로도 구단이 본인을 팀의 핵심자원으로 생각해 주길 원하고 있지만 FSG 그룹은 기량과 별개로 이미 30대에 들어선 그와의 장기계약을 꺼려 하는 모양새다.


현재 리버풀의 선수단은 대부분 전성기 혹은 그 이상의 연령 분포를 그리고 있으며 이는 머지않아 세대교체가 이뤄져야 함을 암시한다. FSG 그룹은 30대의 헨더슨을 세대교체의 대상 중 한 명 그 이상으로는 보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이에 대해 수많은 팬들이 완강한 반대를 표하고 있다.


헨더슨은 지난 10년간 리버풀 그 자체였고 팬들의 강력한 큰 지지와 아낌없는 사랑을 받아왔다. 더 나아가 라커룸에선 선수들을 독려하고 필드 위에선 날카로운 카리스마로 팀을 한데 모으며 2000년대 들어 우승권과 거리가 멀었던 리버풀의 숙원인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달성해냈다. 비록 시간이 지나 현재의 경기력을 이어 나가지 못하는 시기가 오더라도 라커룸에서 핸더슨의 존재는 리버풀의 가치를 드높일 수 있는 요소임에 틀림없다.


과거 리버풀은 팀의 레전드인 제라드와 아쉬운 작별을 경험한 전례가 있다. 만일 이번에도 헨더슨을 떠나보낸다면 팬들의 원성은 극에 달할 것이다. 때론 돈보다 낭만이 훨씬 더 큰 가치를 지닐 때가 있다. 헨더슨이라는 존재가 가진 무게감을 다시금 되새길 필요가 있는 시점이다.

# 황도윤 Editer '나초 페르난데스, 낭만 안에 숨겨졌던 고난과 역경'


우리는 언제나 스타를 갈망한다. 전성기를 만들어내고 팬들에게 낭만을 불러올 수 있는 스타말이다. 레알, 바르샤, 뮌헨과 같은 메가클럽에는 늘 스타가 존재했다. 이 중 레알은 2010년대 축구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유럽 최정상 자리를 지켜 왔었는데, 역시나 그 안엔 호날두가 있었다.


공이 가장 컸던 선수는 호날두지만 레알엔 다른 스타들 또한 즐비했다. 호날두와 함께 트리오를 구축했던 벤제마와 베일, 강력한 중원을 형성한 크로스, 카세미루, 모드리치 등이 존재했다. 이처럼 스타 구단이라는 명성에 알맞은 이름값 때문인지 활약상에 비해 다소 언급이 덜 선수가 있다. 바로 나초 페르난데스다.


나초는 수비진에서 부상으로 이탈된 선수의 빈공간을 훌륭히 메우며 4백의 2번째 옵션으로 자리매김했다. 앞서 언급한 스타 선수진들처럼 주축으로 보탬이 되었다기 보다는 후방에서 버팀목이 되어주는, 스타들이 만들어낸 낭만을 든든하게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나초는 센터백과 스토퍼는 물론 좌우 풀백까지 소화 가능한 멀티 자원이다. 전시즌인 20-21시즌 에는 라모스가 부상으로 빠지자 고정적으로 좌측 센터백을 수행했다. 뿐만 아니라 양발에서 나오는 킥과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수비 진영 정렬 그리고 협력 수비까지 탑재하고 있어 만능형 선수로 평가 받고 있다. 얼마 전 2023년까지 다시 한 번 재계약을 맺은 나초는 공식 인터뷰를 통해 미래에 은퇴한다면 원클럽맨으로 남아 찬양 받으며 은퇴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레알의 낭만을 지켜주는 이 수비수는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을까?


마드리드에서 태어난 나초는 2001년부터 레알 마드리드 유스팀인 알레빈 A에 입단해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이후 단계별로 인판틸, 카데테, 후베닐, 카스티야를 모두 거쳐 1군에 정착하게 된다. 그 이후 레알에서의 입지를 다져나간 나초는 팀의 주장단에서 주장과 부주장을 맡으며 리더십까지 갖춘 선수로 성장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돋보이는 침착함 덕분에 후베닐 시절 코치진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은 꽤 유명한 일화다.


항상 밝게 웃으며 지금 까지도 원클럽맨의 낭만을 꿈꾸고 있는 나초지만 어렸을 적엔 1형 당뇨로 고난을 겪기도 했다. 11세 때 찾아온 1형 당뇨는 나초가 유스 커리어를 이어가는데 큰 장애물로 작용했다. 왼발, 오른발 가릴 것 없이 훈련, 경기 중에 수시로 마비가 찾아 왔기 때문에 알레빈 동료들은 나초를 그리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더군다나 주장이었으니 말이다.


이처럼 마비로 고생을 겪고 있었던 나초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A시절 주장단에서 내려오고 오로지 1형 당뇨 마비만이라도 치료해 피치로 복귀하자라는 마음 하나로 재활에 전념했다. 그 덕분에 다시 복귀한 후에는 1형당뇨에 의한 마비는 찾아오지 않았다. 체력적인 문제로도 고생했던 나초였지만 카스티야 시절 체력 훈련을 병행하며 지구력을 키워가 당당하게 1군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이렇듯 원클럽맨이는 또다른 낭만을 좇는 중인 나초 페르난데스. 이 화려한 이야기는 과거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밑거름이 있었기에 서사가 될 수 있었다. 나초가 그려가는 낭만적인 미래는 과연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라모스가 떠난 지금 나초의 낭만은 더더욱 레알 팬들의 가슴을 떨리게 만들고 있다.

# 박수용 Editer '피오렌티나의 낭만파 레전드, 안젤로 디 리비오'


축구계의 수많은 낭만이 존재하지만 우승을 노릴 수 있는 클럽의 구애를 뿌리치고 중견 구단의 전설로 남은 로컬 보이의 이야기는 그 중에서도 으뜸이 아닐 수 없다. 팀의 유스 출신이 아님에도, 팀이 파산해 하부리그로 추락했음에도 끝까지 남아 재건을 위해 노력하는 충성스러운 선수의 서사 말이다. 이와 같은 낭만적인 서사의 대표적인 인물이 세리에 역사에 존재한다. 그의 이름은 바로 안젤로 디 리비오다.


디 리비오는 AS 로마의 유소년 선수로 데뷔했지만 치열한 주전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4부 리그 격인 세리에 C2까지 밀려났을 정도였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으로 세리에B 파르마에 안착하는데 성공했다.


낭중지추라고 했던가. 디 리비오가 세리에B에서 우수한 활약을 펼치자 세리에A 팀들도 그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결국 93-94시즌 이탈리아 최강 유벤투스에 입단하며 인생 역전의 서막을 열어냈다. 그 이후 유벤투스에서 전성기를 보낸 디 라비오는 세 차례의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3년 연속 챔피언스리그 결승 무대를 밟았다.


시간이 흘러 디 리비오는 노장이 됐고 그의 은사였던 리피도 팀을 떠났다. 그 와중에 새 감독 안첼로티는 세대교체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디 리비오는 99-00시즌을 앞두고 유벤투스를 떠나 피오렌티나에 새 둥지를 틀었다. 노장이 된 디 리비오였지만 피오렌티나에서도 주축 선수로 활약하며 00-01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일궈냈다.


00-01시즌의 영광과는 다르게 2001년 피오렌티나의 내부 사정은 불안정적이었다. 구단주 비토리오 체지는 다혈질적이며 욕심이 많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그의 방만한 운영과 횡령은 피오렌티나를 파산으로 몰았고 결국 세리에 C2로의 강등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다. 이에 1군 선수단들 모두가 팀을 떠났지만 오직 디 리비오만이 피오렌티나에 남아 충성심을 보였다. 그리고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분골쇄신하며 팀을 4부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와 더불어 세리에 소속 팀의 수를 늘리는 작업이 진행되면서 많은 팀들이 승격됐다. 피오렌티나도 세리에C1이 아닌 세리에B로 직행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리고 03-04시즌 디 리비오가 이끄는 피오렌티나는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페루자를 꺾고 세리에A로 돌아온다. 세리에A로 돌아온 디 리비오는 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다가 04-05시즌이 끝난 뒤 박수를 받으며 은퇴한다.


이처럼 디 리비오는 피오렌티나의 낭만을 상징하는 선수다. 피오렌티나가 파산했을 때 성골 유스인 알레산드로 아고스티니, 크리스티안 아모로소와 같은 선수마저도 팀을 등졌다. 그러나 디 리비오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1군 선수단이 떠났음에도 피오렌티나를 위해 헌신했다. 디 리비오에게 유혹의 순간이 오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한일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 대표팀이었던 그에게 중동, 일본에서 거액의 연봉을 제시했고 세리에 A팀들도 오퍼를 보냈지만 모든 것을 뿌리친 채 재창단한 피오렌티나의 세리에A 진출만을 바라봤다.


이러한 디 리비오의 헌신 덕분에 지금의 피오렌티나가 있을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디 리비오가 보여준 낭만적인 헌신은 이탈리아를 넘어 전세계에 귀감이 되고 있다.

# 김성준 Editer '숙녀가 원할 때 떠나지 않았던 진정한 신사,델 피에로'


"신사는 숙녀가 원할 때 떠나지 않는 법이다." 축구 선수의 명언을 꼽을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말이다. 이는 이탈리아의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가 남긴 말로, 그는 이탈리아 국가대표와 유벤투스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레전드다. 델피에로는 유벤투스의 애칭인 올드 레이디(Old Lady)를 이용해 센스있는 말을 했는데 이 배경에는 세리에A와 유벤투스의 어두웠던 과거와 델 피에로의 낭만이 있다.


2006년 유벤투스 단장이었던 루치아노 모지가 축구계 및 언론계 주요 인사들과의 커넥션을 통해 심판 배정 압력, 불리한 판정을 한 심판을 공격하기 위한 언론 플레이, 세무조사 회피를 위한 수사기관 로비, 이적협상 불법 개입 등 여러 범죄를 행하거나 모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유벤투스 뿐만 아니라 AC밀란, 피오렌티나, 라치오 등 여러 구단의 수뇌부들도 연루되어 입건되었다. 공소시효 만료로 실형은 부여되지 않았으나 사실상 유죄로 판정났다. 지금까지도 축구 역사상 가장 큰 비극으로 꼽히는 이 사건이 바로 ‘칼초폴리’다.


칼초폴리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클럽은 유벤투스다. 유벤투스의 단장이었던 모지는 이탈리아 축구계에서 영구제명 됐고 팀은 세리에B 강등, 승점 9점 삭감, 2시즌 우승 박탈당했다. 설상가상 세리에 B로 강등당하자 많은 선수들이 다른 팀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즐라탄, 비에이라, 칸나바로, 튀랑, 잠브로타 등 주축 선수들이 팀을 떠났다. 그러나 델 피에로는 의리 하나로 네드베드, 부폰, 트레제게, 카모라네시와 함께 끝까지 유벤투스에 남았다. 그리고 결국 리그 20골을 터뜨리며 세리에B 득점왕을 차지함과 동시에 유벤투스를 세리에A로 복귀시키는데 성공했다.


세리에A 복귀 시즌에도 유벤투스에서 활약한 델 피에로는 득점왕을 차지하며 팀의 리그 2위와 챔피언스리그행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비록 그 이후 팀은 두 시즌 연속 리그 7위를 기록하면서 어려운 시기를 보냈지만 델비에로는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해주며 팀에 헌신했다. 노쇠화로 인해 선발보다는 교체로 나오며 슈퍼서브로 활약했음에도 공격포인트는 늘 상위권에 자리했다. 델피에로의 폼은 일시적이었지만 클래스는 영원했던 것이다.


11-12시즌은 델피에로가 유벤투스 유니폼을 입고 뛴 마지막 시즌이다. 물론 유벤투스에서의 은퇴라는 타이틀은 가져가지 못했지만 그는 유벤투스에게 무패 우승을 선물하고 팀을 떠났다. 팀이 어려웠던 상황에도 늘 한결같이 숙녀 곁을 지켜주었던 신사. 델 피에로야 말로 유벤투스의 최고의 로멘시스트이 아닐까.

# 홍연진 Editer '리누스 미헬스가 축구계에 제시한 낭만, 토탈풋볼'


과르디올라와 클롭, 이 두 명의 감독은 현대 축구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두 인물의 공통점이 있다면 다이내믹한 축구를 구사하여 보는 팬들에게 기쁨을 선사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이들의 철학이자 신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970년대 축구계에 이러한 철학과 신념을 먼저 제시한 이가 있었다. 바로 축구 역사상 최고의 전술 혁명가로 칭송받는 리누스 미헬스가 그 주인공이다.


미헬스에게 축구란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선사해줘야 하는 스포츠였다. 그렇기에 그가 바라는 축구는 공격적이고 화끈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 당시 축구계는 수비 지향적인 카테나치오가 주류였다. 수비적인 전술은 미헬스가 생각하는 낭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많은 불만을 품었다.


이에 미헬스는 여러 시행 착오를 겪은 끝에 자신의 정신이 고스란히 깃든 전술, ‘토탈풋볼(Totaalvoetbal)’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미헬스의 낭만, 토탈풋볼은 지금까지도 축구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토탈풋볼을 쉽게 정의하면 전원이 공격하고 수비하는 축구다. 이를 통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키워드가 무엇인가? 바로 현대 축구의 핵심 요소, 압박이다. 미헬스는 선수들에게 강한 압박을 요구하면서 ‘수비하기 위해 아군 골문 앞까지 후퇴하라’ 라는 당대의 고정 관념을 깨부쉈다.


이 때문에 공격수들도 전방에서 적극적으로 상대를 압박하여 막아내야 했다. 이렇게 수비 시에 공격수들이 수비에 적극 가담하였다면 공격 시에는 수비수들이 활발하게 공격에 가담했다. 미헬스는 이러한 유기적인 포지션 체인지를 통해 가능한 많은 인원들이 공격에 참여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즉, 조직적인 압박, 포지션을 벗어난 공수 가담과 같이 현대 축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념들은 미헬스가 시초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요한 크루이프와 아리고 사키에 의해 더욱 다듬어졌다. 크루이프는 기존 토탈풋볼에 점유율 중심의 공간 활용이라는 디테일을 더했고 사키는 1-4-4-2 중심의 조직적인 압박과 각 포지션마다 세분화된 효율적인 압박을 구사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이 두 명의 전술은 많은 감독들의 참고서가 되어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다. 이처럼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조금씩 발전하고 변형되고 있지만 미헬스가 제시한 토탈풋볼이라는 낭만은 아직도 축구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 석지훈 Editer '붉은 개의 귀환'


2011년 카타르 스포츠 투자그룹이 PSG 인수했다. 그 이후 PSG는 10년 동안 1조 이상의 돈을 쓰면서 자국 리그의 최강자로 군림했지만 챔피언스리그와는 인연이 닿지 않으며 우물 안 개구리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결국 고여버린 우물 속에 그 개구리를 능가하는 팀이 등장했다. 바로 붉은 개, LOSC 릴이다.


그들은 어떻게 PSG의 독주 체제를 멈출 수 있었을까? 릴은 20-21시즌 시작 전 이적 시장 행보부터 심상치 않았다. 보강이 필요한 포지션에 적절한 투자를 단행했는데, 먼저 수준급 스트라이커 조나단 데이비드와 노련한 스트라이커 부락 일마즈를 영입하며 팀의 약점이었던 오픈 플레이에 대한 구멍을 메웠다. 또한 아스날로 이적한 마갈량이스를 대신해 에레디비시의 유망한 수비수 보트만을 영입했다.


크리스토프 갈티에 감독은 1-4-4-2 포메이션을 바탕으로 선수들에게 조직적인 수비를 강조했다. 갈티 감독의 수훈 덕분에 릴의 경기당 평균 실점이 0.6골에 불과했고 클린시트 또한 21회에 달했다. 게다가 팀의 베테랑인 일마즈는 35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28경기 16골 5도움을 보여주며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더 나아가 공격의 사각 편대가 총합 39골 18도움을 기록하며 강력한 공격력을 과시했다. 주전 공격수가 부상으로 나간 상황에서도 후보 자원들의 적절한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성과였다. 이처럼 릴은 탄탄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리그앙의 우승자가 될 자격이 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릴은 불과 한 시즌 전까지만 해도 파산 위기였다. 재정난으로 인해 팀의 에이스였던 니콜라 페페와 촉망받던 유망주인 티모시 웨아를 팔아 버려야 했을 정도였다. 결국 회장 제라르 로페즈는 200M에 달하는 부채를 책임지지 못하고 경질 당했다. 그렇지만 릴은 이러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데 성공했다. 메를린 파트너스라는 투자펀드가 2012년 당시 PSG의 스포츠 디렉터였던 올리비에 레탕을 새로운 회장으로 선임했다. 그리고 결국 20-21시즌 릴은 환상적인 시즌을 보내며 유럽 5대 리그 최소 실점이란 기록과 함께 38경기 24승 11무 3패로 리그앙 챔피언에 등극했다. 10-11시즌 이후 약 10년만에 이룩한 업적이었다.


2010년대 이후 리그앙은 PSG의 독무대였다. 사실상 PSG의 리그라고 불려도 무방했다. 그런데 릴은 그런 PSG를 꺾고 극적인 우승을 달성했다. 이런 낭만적인 서사가 아직까지 현대축구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축구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 그란데사커 Editer '축구의 모차르트가 남긴 아름다운 낭만들'


마티아스 진델라(Matthias Sindelar).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인 진델라는 당대의 다른 선수들과 무언가 달랐다. 그는 유별나게 특출났고 경력 또한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1903년 2월 1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모라바 지방, 코즐로프 마을. 대장장이였던 얀 진델라와 그의 아내 마리 사이에서 한 아이가 태어난다. 반짝이는 눈과 또렷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아이에게 진델라 부부는 '마티아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마티아스 진델라는 어린 시절부터 축구에 남다른 두각을 드러냈다. 1918년, 진델라가 사는 지역의 작은 팀인 ASV 헤르타 빈의 스카우터는 그의 재능을 알아채고 곧바로 스카우팅을 단행했다. 그리고 3년 후 그는 1군에서 활약하게 됐고 또다시 3년이 지난 1924년, 당시 오스트리아 리그의 강호였던 FK 아우스트리아 빈(당시 클럽명은 '비너 아마추어 SV'였다)에 입단하게 됐다.


진델라의 아우스트리아 빈은 리그 최고의 팀을 넘어 유럽 최고의 팀으로 발돋움한다. 리그 1회 우승(준우승 2회), 자국 컵 대회 5회 우승, 당시 가장 큰 유럽 대항전이자 현 챔피언스리그와 동격이었던 미트로파컵(중앙 유럽컵) 2회 우승 등 클럽의 황금기를 이끈 팀의 명실상부한 에이스였다. 하지만 진델라는 만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며 아우스트리아 빈은 그와 어쩔 수 없는 작별을 맞게 된다.


진델라는 국가대표팀에서도 대단했다. 아니, 사실 그의 경력은 국가대표팀에서 더 돋보인다. 타 선수들보다 특출났던 그는 오스트리아 대표팀에서도 에이스였다. 1926년부터 1937년까지 줄곧 팀의 구심점이었으며 이 기간 동안 현재 유로와 비슷한 대회였던 중앙 유럽 인터내셔널 컵 우승과 FIFA 월드컵 4위 등 수많은 영광을 누린다. 강력하고 치명적이었던 1930년대 진델라의 오스트리아는 '분더 팀(Wonder Team)', 즉 '경이로운 팀'으로 칭송받았다.


진델라는 이탈리아의 레전드인 '주세페 메아차'와 함께 1930년대 축구를 대표했다. 그들의 플레이를 배우려 경기장을 찾는 선수들도 즐비했으며 축구선수 최초로 금전을 받고 광고를 찍었다. 그라운드에서 실로 대단한 플레이를 선보였던 선수로 기억되는데, 우아한 움직임, 드리블, 테크닉, 창의성 등 완벽에 가까운 공격수였다. 이처럼 '우아함' 그 자체였던 진델라의 플레이에 기인해 '축구의 모차르트(The Football Of Mozart)'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는 그의 이명이 된다. 또한 종잇장처럼 마른 체형에 빗대어 '종이 인간(The Paper Man)'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한다.


이 특별한 선수의 포지션은 센터 포워드였다. 현대 축구에서 센터 포워드의 역할은 다양하지만 당시 센터 포워드들은 상대 수비수들과 부딪히며 득점을 노리는 피지컬이 중요했다. 그러나 당시 오스트리아의 감독인 '휴고 마이슬'은 진델라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를 센터 포워드에 기용한다. 그 결과 상대를 유인하고 드리블과 패스로 골을 돕던 인사이드 포워드들이 마치 센터 포워드처럼 득점을 노리며 상대를 농락했다. '축구 최초의 제로톱 전술'이었다. 이러한 전술에 오스트리아는 당대 최고의 팀으로 올라섰고 그 중심에는 제로톱이었던 진델라가 있었다.


진델라는 애국심 또한 남달랐다. 1938년, 진델라의 조국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합병된다. 그리고 독일의 주요 세력이었던 히틀러의 나치는 오스트리아 대표팀에게 독일 대표팀과의 합병을 요구한다.


그리고 1938년 4월 3일.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을 기념하여 진델라가 오스트리아 유니폼을 입고 뛰는 마지막 경기가 펼쳐졌다. 하지만 진델라는 조국을 택했다. 오스트리아의 선수들에게 오스트리아 국기의 색인 빨강-하양-빨간색의 유니폼을 입으라고 지시했다. 또한 평화적인 마무리를 위해 무승부로 끝날 예정이었던 경기였는데, 진델라는 차원이 다른 플레이를 펼치며 독일을 농락했다. 그리고 후반전 진델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독일의 골문에 골을 넣었고 이후 칼 세스타의 추가골이 나오면서 오스트리아의 승리로 경기가 끝난다.


득점자였던 진델라와 칼 세스타는 나치의 간부들에게 유쾌한 셀레브레이션을 선물했다. 이러한 사건에도 합병은 정상 진행됐고 더 이상 진델라의 국가대표팀 경기는 없었다. 독일의 계속된 부탁에도 몸 상태나 나이와 같은 이유를 대며 그대로 자신의 국가대표 경력을 끝마친다.


시간이 흘러 1939년 1월 23일 진델라는 그의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그의 애인이었던 카밀라 카스타뇰라 또한 의식이 희미해진 채로 발견되었고 결국 사망하게 된다. 공식적인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마무리됐으나 자세한 내막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의 심장부인 빈에서 태어나 빈에서 숨을 거둔 19세기의 위대한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 그는 빈을 사랑했으며 빈도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의 사후 빈의 슈퍼스타 진델라가 그를 대신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듯한 진델라의 플레이를 본 팬들은 열광했다. 현재 진델라는 여러 위인들이 영면하는 안식처인 빈 중앙묘지에 잠들어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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