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꼭 자다가 새벽 여섯 시쯤에 깬다.
그리고 어김없이 “엄마, 엄마.어디있어?” 하고 나를 부른다.
그때 나는 대개 책을 읽고 있다. 집 안이 아직 잠에서 덜 깬 시간, 조용히 페이지를 넘기며 하루를 조금 먼저 시작하고 있을 때다.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면 나는 책을 덮고 후다닥 방으로 들어간다.
여섯 살인데도 아직 엄마를 꼭 찾는다. 그 사실이 이상하지도, 귀찮지도 않고 오히려 조금 신기하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내가 없다는 걸 어떻게 알아내는지, 아빠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왜 나를 찾는지. 눈을 뜨자마자 공기가 달라졌다는 걸 느끼는 걸까.
방에 들어가 아이를 토닥토닥 해주면 아이는 금세 다시 잠이 든다. 마치 내가 잠의 버튼인 것처럼. 손을 얹고 괜찮아 하고 숨을 맞춰주면 아이의 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고요해진다. 그런데 내가 들어가지 않으면 아이는 결국 일어난다. 눈을 비비며 나를 찾으러 나오고, 책을 읽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친다. 아, 여기 있었네, 라는 얼굴로.
그 순간 나는 안다. 아이는 엄마를 부른 게 아니라, 엄마가 아직 여기 있는지 확인한 거라는 걸. 그리고 문득 마음 한쪽이 살짝 저린다. 내가 워킹맘이어서, 예전에 회사에 다닐 때 아이 곁에 늘 있지 못해서 그래서 더 이렇게 나를 찾는 건 아닐까 하고.
아침마다 급히 나서던 뒷모습, 퇴근하면 이미 잠들어 있던 얼굴, 같이 있고 싶었지만 같이 있지 못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이 아이 마음 어딘가에 작은 빈칸처럼 남아 있는 건 아닐까 싶어 괜히 미안해진다. 그래서 새벽 여섯 시의 “엄마”라는 부름은 부탁이라기보다 확인처럼 들릴 때가 있다. 아직 여기 있는지, 이번에도 사라지지 않았는지, 어둠 속에서도 엄마는 계속 있는지.
나는 그 생각 앞에서 나를 탓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조용히 다짐한다. 지금이라도, 지금부터라도 아이의 새벽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되자고. 과거의 부재를 후회로 갚기보다 오늘의 존재로 차곡차곡 덮어주자고.
아이는 아마 그 이유를 몰라도 된다. 그저 부르면 오는 사람, 없을까 봐 불러도 늘 거기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면 충분하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책갈피를 꽂아두고 아이의 잠 곁에 앉는다. 워킹맘이었던 시간도, 지금의 나도 모두 다 아이를 사랑한 방식이었다고 조심스럽게 나 자신에게 말해보면서.
아마 언젠가는 이 새벽도 사라지겠지만, 나는 기꺼이 불려간다. 아이의 잠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