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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낭콩 May 31. 2016

'잘 먹겠습니다'와 'Buon apetito'

우리는 때로는 오롯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 식탁에 초대받는 이들은 늘 고정되어 있었다. 재치 있는 포르투갈 청년, 수염이 멋진 프랑스 청년, 인형처럼 깜찍한 벨라루스 여인, 그의 다정한 스페인 남편, 식탁의 주인인 이탈리아 아가씨, 그리고 한국에서 온 나. 집과 거실의 규모에 비해 유독 컸던 그 식탁은 부유하는 선박과 같아서, 매일매일 풍랑과 마주해야만 하는 낯선 곳에서의 삶을 견딜 모든 이야기들이 오고 가는 곳이었다.


사실 그 식탁은 초대라고 할 것도 없이 언제든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모여드는 아지트 같은 곳이었지만, 토요일 저녁마다 함께 모여 갖던 저녁식사는 또 한 주를 치러낸 가엾은 목숨을 다독이는 의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얼굴로 만나 서로에게 타인이었던 우리는 그렇게 가까워졌고, 그렇게 나는 그들과 '식구(食口)'가 되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환희와 두고 온 것들에 대한 미련을 언제나 함께 지고 가야 하는 이방인들에게, 그 식탁은 그리워하던 것들을 꺼내놓을 좋은 핑계가 되어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그곳에서 서로에게 각자의 요리를 대접하고는 하였고, 이것은 주눅 들기 쉬운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채워주는 묘약이었다.




고향을 떠나온 이들에게는 두고 온 모든 것이 애틋해지는 법이기에, 우리가 함께 모여 앉은 식탁에서는 구태여 영어와 온갖 유럽어가 뒤섞인 기묘한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유럽 친구들이 몇 번의 대화만으로도 서로의 언어를 배우던 모습에 나는 약간의 억울함마저 느끼며 더듬더듬 그들의 언어를 배워나갔다.


식탁에서 가장 자주 듣게 되기 마련인 그들의 식사 인사는 각각 Buon apetito, Buen apetito, Bon appétit, Bom apetite로, 비슷한 철자에서 짐작할 수 있듯 직역하자면 '좋은 식욕' 정도가 되는 결국은 같은 말이다. 같은 뿌리를 가진 라틴어족 언어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어원이 다른 러시아어(벨라루스에서는 벨라루스어와 러시아어가 복수 공용어이지만 일상적으로는 러시아어를 쓴다)인 'Приятного аппетита' 또한 직역하자면 'Buon apetito'와 같은 뜻이라고 한다.


'식욕'을 이야기하는 만큼 Buon apetito는 함께 모여 앉은 이들에게 부디 맛있는 식사가 되길 바라며 건네는 인사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우리말의 '잘 먹겠습니다'라는 표현은 조금 특이하다. 이 말속에서 음식의 효용은 오직 나를 향하고, 청자는 어쩌면 그 자리에 있지 않을 '이 음식을 만들어준 이'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식사 인사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함께 밥을 먹는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적어도 '잘 먹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순간만큼은 이 식탁이 나를 위해 차려진 것임에 감사하며, 그 위에 놓인 음식들이 하나하나 오직 나를 위한 것임을 확인한다. 지중해에 부서지는 햇살만큼이나 자주 마음이 부서지던 순간들에, 나를 지탱해주던 것은 어쩌면 이런 사소한 위로가 아니었을까.


매일 주문처럼 되뇌던 말이 문득 거대한 무게로 밀려오는 순간, 나는 새삼스레 나의 모국어에 빚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잘 먹겠습니다'라는 말이 정확히 어떤 의미로, 언제부터 사용되었는가를 알 길은 없으나 그 말이 오고 가던 영겁의 시간들이 매일의 나를 위해 빌어주고 있으니, 다만 그것으로도 괜찮지 않은가.


그러니 매일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착한 당신, 오늘은 부디 조금 더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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