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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낭콩 Feb 27. 2016

편의점 도시락의 기억

낯선 도시에서의 겨울나기



일본에서 나는 늘 편의점 도시락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했다.


'대신했다'라고 적는 것이 옳은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먹은 아침 식사는 유독 배가 빨리 꺼지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 도시락들은 매일 아침 풍족한 한 끼가 되어 주었으니까. 편의점의 나라 일본에는 눈을 돌리는 곳마다 편의점이 있었고, 각기 다른 브랜드의 편의점들이 매일 아침 서로 다른 도시락들을 내놓으니 나는 그 날의 메뉴를 걱정할 필요도 없이 그 날 아침 가고 싶은 편의점을 골라 눈에 띄는 도시락을 집어 들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도시락을 사면 내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데워드릴까요?"라고 묻는 점원들이 있었다. 하루의 첫 대화를 그렇게 시작하면서, 편의점 도시락은 나에게 하루하루를 지워나가는 빗금 같은 것이었다.


물론 나의 모든 끼니가 편의점 도시락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점심이면 동료들과 정말이지 일본스러운 식사를 했고, 가끔은 제법 비싼 정식을 먹기도 했다. 저녁이면 혼자, 혹은 친구들과 낯선 도시의 구석구석을 헤매다 생각지도 못했던 맛집을 발견하기도 했다. 주말이면 어설픈 요리 솜씨로 때때로 생각나는 음식들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러니까 내가 매일 아침 편의점을 찾았던 이유는 단지, 어쩐지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지는 타향에서 아침부터 끼니를 위한 노동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게다가 식재료를 생각한다면 편의점 도시락은 차라리 쌌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새로 뿌리를 내린 서울살이 또한 녹록할 리가 있겠느냐만은, 그래도 이곳은 엄마가 들려 보내주는 반찬이 있고 가끔 찾아오는 친구들과 집밥을 나누어 먹을 수 있는 곳이다. 어느 날 우연히 연락이 닿은 옛 일본인 동료가 농담처럼 아직도 편의점 도시락을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런 때가 있었지,를 기억해냈고 그제야 나는 한국에서는 한 번도 편의점 도시락을  사 먹어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말이다. 이제 나는 왜 더 이상 편의점 도시락을 사 먹지 않을까가 아니라 왜 나는 일본에서는 그렇게 편의점 도시락을 사 먹었던 것일까를 궁금해하게 되었다.


고백하자면 그 무렵 나는 겁에 질려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낯선 언어가 나를 삼키는 기분에. 안부를 묻는 지인들에게는 언제나 '잘 지내고 있어 괜찮아'라고 대답했지만, 나는 낯을 가리는 성격만큼 그 낯선 땅에서의 하루하루를 위태롭게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일기장에 써 두었던 '하루하루를 지워나가는 빗금'이라는 말은 구조를 기다리던 로빈슨 크루소의 심정이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곳에 뿌리박은 사람들 틈에서 나는 흘려보내도 되는 유령일까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역설적이게도 내가 가장 부각되지 않는 방식으로 내가 머물 자리를 찾고자 하였다. 편의점에서는 고급 식당에서처럼 낯선 외국어로 오고 가는 온갖 조리법과 재료들의 향연에 주눅들 필요도 없었고, 작은 가게에서처럼 지나치게 따스한 인사말에 멈칫할 필요도 없었다. 그 모든 것을 대신하는 "계산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와 같은 짤막한 인사로 나는 낯선 땅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일 테다. 비록 그들은 "안녕하세요."를 내뱉는 나의 발음만으로도 내가 그들과는 다름을 대번에 알아챘을 테지만.


다시 또 한 번의 겨울이 지났다. 여전히 편의점 도시락은 맛있을 테고 도시락과 함께  사 먹던 커스터드푸딩을 나는 요즘도 매일 아침 사 먹곤 하지만, 적어도 이제 나는 더 이상 편의점 도시락을 찾지 않게 되었다. 매일 들르는 집 앞 편의점에는 김혜자의 도시락 광고가 큼직하게 붙어있고, 길 건너 위치한 다른 편의점에서는 백종원의 도시락이 인기 메뉴라고 한다. 그 도시락들이 엉성한 나의 집밥보다 먹음직스러워 보일 때도 많지만 나는 더 이상 그 도시락들을  사 먹지 않는다. 그러니까, 일본에서의 나에게 편의점 도시락은 겁을 삼키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나 자신이 낯선 도시에서 부유하는 작은 섬처럼 느껴질 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 흔한 플라스틱 도시락통 뒤에 숨어 같은 도시락을 사 먹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 속에 녹아들고 싶었던 것이다. 밥 한 끼를 먹으면서도 식재료와 가성비를 생각해야 했던 그 순간들에, 편의점 도시락은 지금 이 순간조차도 두려운 이가 나 혼자는 아니라는 위로를 전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1인 가구가 많은 나의 동네에서 편의점 도시락은 가장 흔한 식사 메뉴 중의 하나이다. 그 도시락을 사 드는 이유야 모두가 제각기 다르겠지만 마치 일본에서의 나처럼, 그들 모두는 낯선 도시에서 하루하루를 치러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운 것은 결코 혼자가 아니기에, 우리는 다만 힘을 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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