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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밤클라쓰 Sep 18. 2024

정신과 진단에 관한 생각.

치료가 어려운 환자.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

정신과 진료실에서 의사가 진단명을 환자에게 전달할 때, 진단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미리 자세하게 알려줄 필요성이 있습니다. 진단이라는 것은 나타나는 증상을 가장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약물을 처방하기 위해 범주화한 것일 뿐이라고요.     

그렇지 않고서는 정신과 전문의가 당신은 ADHD, 조현병, 성격장애 등등..입니다. 라고 말했을 때, 환자는 쉽게 충격을 받고 자신을 질병의 틀 안에 가두어버리는 위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우울증 환자니까 우울하겠지.’ 라는 식으로 자신의 상태를 체념하는데 진단을 활용하거나 ‘나는 우울증 환자니까 이렇게 할 수 없어.’ 라는 식으로 질병의 틀 안에 자신을 가두어 치유를 돕는 행동이나 가능성을 제한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동안의 궁금증이나 의문이 해소되는 위안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요.)     

하지만 한 사람의 문제를 진단명으로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많습니다. 개인마다 다양성이나 특수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상황과 시간 등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유동성도 있습니다.     

전문의마다 진단이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도 많습니다. 암이나 골절문제처럼 정확하게 수치로 나타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한 병원에서 받은 진단이 나의 증상을 가장 잘 대표하는 진단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전문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이런 사실을 모른다는 사실을 쉽게 놓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먼저 진단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아닌 병원도 있지만 진료현장에서 진단명을 환자에게 쉽게 남발하는 병원도 존재하는 것을 보면 전문가 또한 무의식적으로라도 진단에 대한 제한된 생각을 가지기 쉽다고 느껴집니다. 아니면 환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서 고려하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진단명을 약물 처방을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진단에 따라 사회적 낙인을 찍는 현상도 좋아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우울, 불안, 망상, 성격적인 흔들림 등을 일상에서 겪습니다. 다만 그것이 병적으로 심각해졌을 때 치료받아야 될 수준이 됩니다.      

이상심리학에서도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이상증상(정신질환)이 사람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면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일정부분 누구나 우울, 불안, 망상, 편집증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연약한 감정과 성격으로 인해 타인과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정신적 고통이 보편적이라는 부분을 이해한다면 ‘정신질환에 왜 걸리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을 하기 보다는 정신적 고통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힘든 감정과 상태이지만 (유전, 사건, 상황, 역사, 관계, 배경 등의 이유로) 운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병적인 상황으로 발전한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정신질환을 숨겨야 하는 것이 아닌 드러내고 공유하며 치유를 위해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아픈 사람은 자신의 질병을 숨기지 않고 이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더 건강해질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을 얻고, 아프지 않은 사람은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플 수 있는 상황을 대비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인식이 있는 사회가 더 안전하고 건강합니다.     


최근 어느 정신과 전문의가 온라인 공간에 쓴 글을 봤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치료가 안 되는 환자도 존재한다는 식의 글이었습니다.

글에서 그가 환자의 피해의식에 상처받았다는 느낌을 느낄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상처를 무의식적인 발판으로 삼아 환자의 치료가능성마저 제한하고 있다는 느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또한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전문의인 그의 발언이 단지 실수로 치부될 수 있는 일일까요? 

그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수 없는 이유는 환자의 피해의식을 다룰 수 있는 역량이 없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인을 떠나서 정신건강을 다루는 치료자(상담전문가 포함)가 어떠한 증상의 환자는 다룰 수 없다거나 치료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가 파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먼저, 환자가 진료실을 찾아왔다는 것은 낫고자하는 소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의사의 발언은 앞으로 나아가고 회복되고자 하는 환자의 현재 모습을 부정합니다. 때문에 해당 환자는 물론 같은 질병을 앓고 있는 다른 환자들에게도 모두 큰 상처가 됩니다. 대중에게도 낙인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의사뿐만 아니라 정신건강을 다루는 치료자의 치료 가능성에 대한 판단은 위험합니다.     


이런 전문가의 판단과 사회적인 관념들이 부정하는 것은 환자의 치료 가능성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장하고자 노력하는 한 인간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겪는 많은 고난과 문제에서 포기하는 순간이 가능성의 끝이 되는 순간들을 봅니다.      

하물며 수많은 고통을 겪은 정신질환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정신건강 전문가들이 공공연하게 포기를 언급하는 것이 사회에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진단에 대한 이야기 끝. 


#정신과 #진단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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