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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무 May 02. 2020

98 - #GoingGrey

당신의 노화는 현재 진행형이다


 고를 때 무채색을 즐겨 입는 편이다. 사춘기 이후 끈질기게 붙어 다녔던 ‘나는 뚱뚱하다’는 착각으로, 특히 하체는 더욱 어두운 톤을 택해야 했다. 블랙으로 통일해 잘 맞춰 입으면 누구나 적당히 세련돼 보인다. 검은 옷이 늘어나니 점점 회색 컬러도 추가된다. 흰색이 얼마나 섞이느냐에 따라 그레이 컬러는 참 다양해서 매력적이다.


내 몸과 얼굴의 노화에 대해 사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3년간의 필라테스 덕분인지 하체 라인은 오히려 과거보다 만족스럽다. 운동을 꾸준히 하면서 씬과 뚱뚱 그런 고민에 집착하지 않게 됐다. 더 이상 나는 내 몸을 저주받은 하체라 생각하지 않는다. 퇴사 이후 메이크업도 거의 안 한다. 점점 선명해질 팔자 주름도 아직까진 괜찮다. 도드라지는 주근깨는 그냥 내 매력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흰머리는, 조금 다른 문제였다. 우선 타인의 흰머리부터. 나이를 아는 지인들의 흰머리가 눈에 띄면 여러 마음이 뒤섞였다. 왠지 측은하고, 저 정도로 많았나 싶고, 관리를 안 한다는 부정적인 시선까지. 내 정수리나 뒤통수를 내가 볼 순 없으니, 남들이 본 내 상태는 어땠을지 모르겠다. 미용실에선 매번 흰머리 아니고 새치라며 립서비스를 해줬다. 요즘은 앞머리 부분에도 새하얀 실처럼 흰머리가 늘고 있다. 염색하러 언제 가지...? 면접, 출근 같은 중요한 일 생기면 하려고 미뤄뒀는데, 생각해보니 미용실을 가지 않은지 5개월이 지났다.




며칠 전 모임에서 지인을 통해 ‘고잉 그레이(going grey)’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인스타그램 해시태그로 검색해 보면 외국의 자료가 을 거라 했다. 본인도 몇 달간 고민 끝에 고잉 그레이 하기로 했다며. 즉, 검은 머리가 흰머리로 되어가는 과정을 그대로 둔 채 염색을 거부하겠다는 말이었다. 일본 베스트셀러가 최근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고잉 그레이: 나는 흰머리 염색을 하지 않기로 했다> 책을 꺼내 보여주기도 했다.


나는 약간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탈코르셋 운운하며, 더 이상 타인의 시선을 위해 꾸미는 일은 그만두자 했던 나. 그럼에도 ‘노화’의 상징 같던 흰머리만은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억지로 흰 머리카락을 가리기 위해 돈 들여 시간 들여 두피 상하는 염색(뿌염 포함)을 노년이 되기까지 계속한다는 건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


칠순을 앞둔 우리 엄마도 여전히 두세 달에 한 번씩 염색을 한다. 심지어 머리숱이 점점 줄어 탈모에 최악일 텐데 그 독한 염색약과 파마약을 꼬박꼬박 바른다. 40대에서 그 이상으로 갈수록 흰머리는 더욱 많아질 게 분명한데, 우리는 ‘관리’라는 이름으로 계속 우리의 노화를 덮어버리고 싶다. 관리하지 ‘않는’ 사람으로 분리되기도 싫다.




이제 나는 갈림길에 서 있다. 올블랙 옷을 벗어던지고 톤온톤으로 믹스 매치된 그레이를 입을 것인가. 그래서 결국에는 하얀, 아니 은빛으로 빛나는 실버 헤어를 멋스럽게 빗어넘길 수 있겠는가. 

아직은, 자신이 없다. 당장 미용실을 끊어버리겠어요, 라고 못하겠다.


하지만 당신도 나도, 매일 매 순간 늙어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노화는, 죽음 직전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그 길에서 어차피 늘어날 흰머리라면, 그대로 두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 내 나이, 오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거기 어울릴 나만의 ‘그레이 스타일링’을 고민하고 시도해보는 편이 훨씬 멋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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