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후반까지 나는 해외에 나가본 적이 없었다. 대학교에 들어가면 외국 배낭여행 같은 걸 하게 될 줄 알았지만, 애석하게도 97학번은 금 모으기 운동 같은 뉴스를 보며 성인이 되었다. 청춘의 그 시절, 동아리라도 열심히 했다면 여행의 기회는 있었으리라. 하긴 있었다 해도 우리 집 분위기로 외박 따위는 허락되지 않았을 거다. 회사에서 친했던 언니가 그런 나를 조금 한심(?)까지는 아니었겠지만 많이 안타까워했다. 하다못해 인천 공항 안에 있는 벤치에라도 앉아있다 오라고 했으니까. 한 살 위였지만 그녀는 무려 호주에서 1년 어학연수를 다녀온 사람이었다.
이후로 십여 년간 휴가 때마다 연차를 이어 붙이며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를 열심히 실천했다. 여권 도장을 발도장 찍듯 여러 나라의 여행 경험이 쌓여갈수록, 공항에라도 가라던 그 충고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일상을 떠나고 새로운 문화와 만나는 매 순간이 자극이자 배움이 되었기에. 가족, 친구, 회사 언니 동생과 둘셋넷이 되어 다닌 곳이 어느 지역인지 보다는, 그 순간의 풍경과 찰나의 공기가 소중한 보물처럼 남았으니. 그리고 오롯이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인 ‘진짜’ 여행은 퇴사 이후 시작되었다.
여자 혼자 여행하기 좋은 베스트 장소 경상남도 통영, 눈 덮인 풍경이 아니라 무작정 땡볕의 라벤더 밭을 찾아 간 일본 홋카이도. 퇴사 직후 아직 마냥 신나기만 하던 때에 혼자 떠난 국내 통영과 해외 북해도를 시작으로 자연스럽게 ‘혼여’가 시작되었다. 원래는 마일리지 탕진을 위해 유럽행 비즈니스 티켓을 끊어버릴 로망도 있었다. 누구나 사직서를 던지는(!) 꿈을 꿀 때 자연스레 떠오르는 그런 그림. 하지만 소소한 국내 여행이 주는 재미가 쏠쏠했다. 질질 끄는 캐리어 대신 짧은 여행 전용 백팩도 장만했고 제주, 강릉, 대구, 경주, 전주, 군산, 춘천, 부산, 서천, 부여, 양양까지 뚜벅이 여행은 계속되었다. 친구와 함께하기도, 혼자이기도 하면서. 모임에서 떠나는 여행이라면 전후 일정에 혼자 일정을 보태면서. 따로 또 같이.
통영은 비록 1박뿐이었지만 특히 값진 경험은 ‘나전칠기’ 체험 수업을 받은 것이다. 나전 장인이 운영하는 곳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자개 조각을 촘촘히 붙인 두 시간이 무척 흥미롭고 뿌듯했다. 누군가 통영에 간다고 하면 항상 추천해 주었고, 이때부터 자개에 대한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 조만간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자개, 옻칠 관련 단기 프로그램도 들을 예정이다.
북해도 하면 눈과 겨울이지만, 서울만큼 더웠던 한여름에 내가 찾은 한 가지는 비에이의 연보랏빛 라벤더 농장. 보라색을 좋아하는 내게 그냥 그거 하나면 충분할 것 같았던 북해도는 사랑이었다. 영혼을 울리는 듯한 수프 카레, 삼키기 아까웠던 우설 구이, 어시장 노포에서 호사를 누린 우니 덮밥, 르타오 치즈 아이스크림, 수없이 많은 디저트, 유제품, 커피, 맥주... 일주일 동안 내 옆에서 앞에서 함께 혼밥을 해 준 모든 일본인에게 감사하고 싶을 만큼. 그리고 삿포로의 카페에서, 호텔 안 온천장에서, 오타루 역 빵집에서도 흐르던 재즈는 여행 내내 기분 좋은 배경음악이 되었다.
차 없는 뚜벅이 여행은 확실히 많이 걸어서 좋다. 평일 시내버스는 내가 대절한 것처럼 한산해서 좋았고, 여유 시간이 많으니 대중교통을 타는 긴 시간 자체도 여행이 되었다. 사전에 많은 계획을 짜지 않아도, 현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행운 같은 곳들이 좋았다. 그러다 보면 뭐든 꼬이고 엉켜버리는 상황에도 여유를 부리는 단계에 이른다.
어느 도시를 가든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가는 편인데, 코발트블루색 그 자체였던 통영 전혁림 미술관, 해녀에 대한 모든 것과 바다 전경이 최고였던 제주 해녀박물관이 특히 좋았다. 강릉이나 전주는 얼마간의 텀을 두고 같은 장소, 다른 동행으로 찾았는데 결국 여행이란 건 어디를 가느냐 보다 누구와 함께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었다. 각양각색 추억들이 겹겹이 쌓여왔고, 그것을 통해 나는 분명 성장해 있었다.
닭똥집 튀김이 유명하다는 대구의 어느 치킨집에서 혼자 낮술을 할 때였다. 양이 많아 남겼는데, 한 개도 버릴 수 없는 놀라운 맛이었다. KTX를 타러 가던 길이라 꼼꼼한 포장을 부탁드렸을 때, 여사장님이 해 준 한 마디 배려가 참 많이 감사했더랬다.
“혼자 여행 오셨나 봐요. 부럽다. 멋있다.
조심히 올라가세요.”
혼밥, 혼술에 이은 혼여가 이제는 내 옷처럼 자연스럽다. 가방에 넣을 짐은 따로 체크 리스트 없이도 자동으로 착착 채워진다. 새로운 스타일의 게스트하우스와 그 고장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술!)을 즐기고, 지역 색깔이 분명한 소소한 굿즈를 백팩에 챙겨 돌아온다. 길 위에서, 나는 마음껏 자유로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