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나 악기 하나 배우고 있어.”
“어떤 거요?”
“응, 거문고.”
“!!!???”
거문고라는 말에 내 앞에 앉아 있던 모든 가족, 친구들의 표정과 리액션이 생생하다. 그 어떤 이모티콘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그 무엇.
“국악을 왜 좋아해요? 그 졸리고 어려운 걸...”
“???!!!”
마찬가지로 나도 많은 질문을 받았을 때 그들이 납득할 만한 답변을 제시하긴 어려웠다.
그저, 국악이 나에게로 스며들었다.
‘사무치는 마음’으로.
다양한 장르의 음반 파는 일을 했으니, (비록 국악 분야는 잠시 잠깐 담당했지만) 잘 나가는 국악인이나 음반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퇴사를 한 후, 국악이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동안 몇몇 좋아하는 크로스오버 스타일의 곡이 있긴 했지만, 작정하고 거문고를 배우러 간 데에는 ‘잠비나이’의 영향이 강력했다. 퇴사 3개월 뒤, ‘2017 여우락 페스티벌’에서 그들의 단독 공연을 처음 만났다.
우주에 음률을 뿌려놓고 그 사이를 유영하는 우주비행사가 된 기분. 붕 뜨는 듯했다가, 뒷목부터 소름이 돋았다가, 미친 듯이 심장이 쿵쾅거렸다가, 아득한 조명 속에 눈앞이 흐려졌다가... 특히, 거문고의 강렬한 오프닝으로 시작하는 ‘소멸의 시간’은 알고 있는 곡이었음에도 미치게 좋았다. 거문고를 신들린 듯 가지고 놀던 심은용 님의 휘날리는 머릿결마저 멋있다고 느꼈다.
거문고를 제대로 배울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사설 학원이나 대학 내 아카데미 등에도 거문고 수업은 없었다. 실제로 해금, 가야금에 비해 그 인기와 수요가 많이 뒤처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지도마저 한참 딸리는 것인데 나는 그걸 직접 체험했다. 열이면 열, 내 입으로 거문고를 배운다 얘기한 후 다음에 만났을 때, 모든 사람이 똑같이 물었다.
“그래, 가야금은 잘 배우고 있고?”
어렵사리 찾은 곳은 국립국악원 내에 있는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 운영하는 문화학교 수업이었다. 그마저 신청한 인원이 기준 미달로 폐강 위기였다가, 겨우 상급반과 합반해서야 10개월 정도 매주 거문고를 만질 수 있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첫 수업에서 이선희 선생님의 첫 시범, 거문고 소리를 코 앞에서 처음 느낀 그 울림을. 말이나 글로 설명이 참 어려운데, 열심히 거문고 연주를 보러 다니고 현재 국악 씬에서 활동하는 분들을 알게 된 뒤로 깨달았다. 거문고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다는 걸.
첫 개강 파티로 가벼운 술자리를 가졌을 때, 선생님은 거문고를 배우러 온 이유에 대해 궁금해하셨다.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 꽤 되었기에 조금은 묵직한 분위기였다. 은퇴 후 악기 하나 배워보고 싶어 왔다는 등 사연 발표가 이어지다가 내 순서에 많은 분들이 한마디로 터졌다.
“제 환갑잔치에 거문고 독주회를 하는 게 꿈입니다.”
어차피 소리 내기 힘든 어려운 악기니, 한 20년 열심히 하면 어쩜 그 꿈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진지하게 그림을 그려봤었다. 만약 그때까지 내가 싱글로 나이 들게 된다면, 결혼식처럼 부조금을 받아 작은 공연장을 대관하는 거다. 십시일반 thanks to 도움 준 지인들로 꽉 찬 객석을 한 줄기 조명이 관통한다. 무대 바닥을 꽃잎처럼 덮은 풍성한 치맛자락 위 시스루 퓨전 한복 소매로 비치는 팔근육. 섹시한데 원숙한 할머니의 오른손에 쥔 대나무 술대가 허공에서 6개의 현(줄)으로 내리 꽂힌다. 상상만으로도 살 떨리게 좋다. 흐흐.
거문고와 가야금을 구분하지 못해서 문제 될 것은 없지만, 아주 간단하게 알아보는 방법이 있다. 가야금은 12개, 거문고는 6개의 줄이 기본인 현악기다. 줄 개수가 잘 안보일 때는 연주자의 오른손이 맨손이면 가야금, 볼펜 길이의 막대기(술대)를 들고 있으면 거문고다. 또 많이 헷갈리는 해금과 아쟁은 활로 현을 마찰시키는 방식은 비슷하지만 무릎 위에 올려놓는 작은 사이즈가 해금이다.
나도 전에는 잘 몰랐고,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어려서부터 암기한 ‘현악 4중주’, ‘재즈 퀄텟’ 악기 편성에 쏟았던 관심을 지금이라도 우리 음악, 우리 것으로 돌릴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 꽤 다양한 전통 악기들의 놀라운 음색을 마주할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대금 독주자의 들숨날숨에 떨리는 어깨, 옆으로 앉아 장구에 손을 댄 고수의 두루마기 둥그런 소매 끝, 그냥 가사만 들어도 울컥하는 전 국민의 아리랑, 깜깜한 종묘를 가득 채워 마음까지 씻은 듯했던 종묘제례악... 2년 동안 열심히 찾아다닌 국악의 모든 현장에서 나는, 울고 있었다.
소리를 낸다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이지만 거문고에 손을 올려본 경험은, 내가 국악을 향한 꽃길을 계속 걸을 수 있도록 진지한 동기 부여가 되었다. 사정상 지금은 배움을 잠시 쉬어가지만, 거문고에 대한 나의 사랑은 계속될 것이다. 이유는, 사랑해주지 않으면 언젠가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진심으로 우리 전통음악을 사랑해주고 있다. 그저 아름답기에, 후대로 계속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거문고 덕후에게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던, 앞으로도 이런 명장면은 절대 없을 것 같던 그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