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고 당장 구직을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끌리는 대로 온갖 수업을 다녀봤다. 하루 10시간을 모니터 앞에 딱 붙어 일만 했다 보니, 새로운 것을 배우는 학생의 마음가짐 만으로도 흥분됐다. 또 함께 공부하는 각양각색 사람들도 덤으로 얻었다. 어쩌면 어딘가에 한데 어우러지는 모임 자체를 갈구한 게 먼저일 수도 있다. 회사라는 조직을 떠나면 마냥 홀가분할 것 같지만, 막상 시간이 흐르니 외롭기도 하고 소속감을 은근히 원하는 나를 발견했다. 아, 나도 사회적인 인간이구나.
와인이야 워낙 수업도 많고 취미 모임도 넘쳐나지만, 돈 주고 치즈를 먹으러 간다는 얘기에 지인들은 또다시 실소를 터뜨렸다. 막걸리를 빚는 수업에 간다고 했을 때도 눈이 휘둥그레지긴 했다. 군침을 흘리며 그 술 언제 먹냐는 질문도 앞다퉈 나왔고. 세 가지를 다 배우고 난 뒤 공교롭게도 이들의 공통점이 ‘발효’라는 과학이자 마술인 점도 신기하다.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그 향과 맛이 엄청난 가짓수로 달라진다는 게 발효의 매력인 것 같다. 커피를 꽤나 좋아하는 이유도 원두 종류, 로스팅 강도, 커피를 내리는 방법과 손맛에 따라 그 맛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와인, 치즈, 막걸리를 먹고 마시며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말과 글로는 표현이 다 안된다.
와인 아카데미 초급 수업을 들으며 처음 알게 된 사실 하나. ‘샴페인’은 프랑스 상파뉴 지역의 상품만 그렇게 불리는 게 맞다. 그 외 탄산이 있는 나머지는 ‘스파클링’ 와인이다. 이런 와인들의 병을 마구 흔들어 폭죽처럼 개봉하는 행위는 에티켓상 맞지 않으며, 최악의 경우 코르크가 발사되어 실명의 위험이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이후 지인들과 와인을 마시는 자리마다 직접 따는 모습을 보이며 잘 써먹은 정보다.
수업은 주로 색, 향, 맛에 대한 테이스팅으로 진행되었는데 마시기 전 스월링(와인잔을 둥글게 돌려주는)을 하며 향에 집중하고 그것을 각자 표현해 보는 것이 좋았다. 와인의 종류에 따라 살구향, 후추향 등 온갖 향을 즐기다 입으로 머금고 넘기고 하면서 또 다양한 맛이 난다. 소믈리에 선생님의 정말 비싼 와인 후기를 떠올려 보면 흔히 얘기하는 부케가, 즉 향이 환상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가격의 기준보다는 어떤 와인이 내 취향에 제일 잘 맞는지, 이 와인과 잘 어울릴 음식의 마리아쥬를 다양하게 실험하며 와인을 즐기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수업을 종강한 이후로 와인을 마실 때 향을 맘껏 들이마시고, 안주에 창의력을 불어넣는 시간이 늘어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배움이었다.
내가 치즈에 대해 언제나 오픈 마인드일 수 있는 것은 우리 엄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어릴 적부터 먹어서 그 포장지까지 기억나는 미국산 슬라이스 체다 치즈. 엄마는 칼슘이 많다는 정보를 어디선가 듣고 치즈를 구해다가 열심히 먹였다. 도시락 밥 위에 얹어 주기까지 했으니 어떤 음식이든 치즈와 함께 먹을 준비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치즈는 제조 방법에 따라 생치즈(리코타/모차렐라), 흰색 외피 연성 치즈(까망베르/브리), 세척 외피 연성 치즈(에뿌아쓰), 반경성 치즈(체다/고다), 경성치즈(에멘탈/파르미자노 레지아노), 블루치즈(고르곤졸라), 가공치즈 등으로 나뉜다. 대표적인 치즈 이름들은 익숙할 텐데, 세척 외피 연성인 에뿌아쓰는 나도 수업 때 처음 먹어봤고 완전 반한 치즈다. 에뿌아쓰는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의 증류주로 치즈 겉을 정성스럽게 닦는 과정으로 완성되며, 비싸다. 맛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비싼 건 왜 맛있는 걸까. 의외로 에뿌아쓰의 향과 맛을 힘들어하는 분도 있긴 했다. 홍어도 부담 없이 즐기는 내 입맛에는 전혀 문제 될 게 없었고, 희망자가 거의 없던 남은 에뿌아쓰를 챙겨 와 며칠 동안 행복하게 먹은 기억이 난다. 또 몇 분이 어려워하던 양젖, 염소젖 치즈도 나에겐 그저 맘껏 탐험하고 싶은 아이들이었다. 다음 유럽 여행이 언제더라;;
선생님의 화려한 치즈 플레이팅에 매주 감탄하며, 함께 먹을 때 궁합이 좋은 견과류와 과일 그리고 와인까지 있었으니 수업인지 천국인지 분간이 안되었다. 수강료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수업 말미마다 치즈를 이용한 간단 요리와 레시피가 제공되기도 했다. 특히 마스카포네(크림치즈 가능) 치즈와 낙지젓갈을 섞은 디핑 소스, 페타 치즈를 넣어 버무린 수박 샐러드는 별미였다. 또 기억에 남는 것은 보통 샐러드 위에 갈아서 뿌려주는 파르미자노 레지아노를 통으로 씹어먹었을 때 느낀 파인애플향이 참 좋았다. 생표고버섯에 크리미한 블루치즈를 발라 먹은 경험은 집에 오는 내내 특유의 향이 코와 입에 남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둘 다 곰팡이어서 어울린다는 놀라운 사실! 후각과 미각에 그토록 집중한 시간이 있던가. 다양한 치즈에 대한 지식과 시식이 늘어날수록 더 많은 치즈 여행을 하고 싶어진 수업이었다.
퇴사 이후 국악을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한옥, 한복, 한식, 전통문화 등에 관심이 갔다. 그러니 전통주까지 그 대상이 되는 수순은 자연스러웠다. 전통주는 크게 탁주, 약주, 증류주, 와인(과실주)으로 구분된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탁주, 막 거른, 막걸리이기 때문에 그것부터 배워야 했고 적당한 곳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막걸리의 역사부터 직접 술을 빚는 실습까지, 그리고 매주 시판 막걸리의 시음, 수업이 끝난 후에는 나머지 공부(?)까지 이것이 수업인지 술판인지 헷갈려서 진심 행복했다.
첫 시간에 40명이 자기소개를 하는데 막걸리를 배우러 온 이유를 듣는 것만도 흥미로웠다. 연령대도 다양하고 양조장을 직접 운영하거나 막걸리 파는 식당을 하는 분까지. 덕분에 동기분의 한산 소곡주 양조장을 견학하는 여행도 하고, 여러 가게에서 다양한 안주들과 막걸리의 페어링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쩜 흥도 많은지, 잘 마시고 잘 놀고 그저 뽀얀 막걸리 하나만으로 대화가 통하는 즐거운 만남들이었다.
김치는 그 소리를 직접 들어본 적이 없다. 발효가 되면서 기포가 뽁뽁 올라오는 소리. 첫 막걸리를 빚어 집에 가져온 날, 며칠간 살아있는 그 아이의 소리가 들리는 게 귀여웠다. 곁에서 지켜보며 맛있어져라 주문도 외우고, 저어주고, 향도 맡고, 드디어 맨손으로 짜기도 하면서 막걸리를 걸러 본 그 느낌은...! 이래서 돈 주고 사 먹는 거구나 싶었다. 그만큼 많은 정성과 시간, 어쩌면 잘 발효되는 운빨(온도, 습도, 균 등 환경)까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손수 만든 걸 마셔보니 또 알겠더라. 시판 막걸리와는 절대 비교할 수 없는 맛이라는 사실을. 왜 우리 전통주가 소중한지, 더 아껴주고 더 많이 마셔줘야 하는지를.
반평생을 아파트에서 살던 엄마가 최근 전원주택 부동산 유튜브를 열심히 본다. 엄마 평생 꿈이 된장 담가보는 것이라 한다. 그 옆에 발효실 한 칸만 내어 달라고, 나는 막걸리를 만들겠다고 했다. 엄마는 네가 그런 걸 좋아할 줄 몰랐다고, 우리 딸도 나이 드는가 보네 하며 웃었다. 사실 발효 사랑에 나이가 무슨 상관일까. 그저 정성을 다해 주고 시간이 해결해주는 마법.
쌀을 씻고, 고두밥을 식히고, 누룩을 빻고 섞고, 항아리에 담고, 술을 짜는 주모의 삶을 꿈꾸어 본다. 계절마다 술 익는 향기가 달라지고 누구라도 편히 와서 한 잔 건네받을 수 있는 곳. 그 옆에서 거문고 한 가락 펼쳐줄 수 있게 된다면 금상첨화겠지. 나의 인생 2막이 달큰하게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