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환상의 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서련 Mar 13. 2021

빨간 모자

2021년 3월 12일 꿈

그와 나 사이에 테이블하나 있다. 그 위에는 내가 어렸을 때, 하지만 아주 어리진 않은 20대 초반에 즐겨쓰던 빨간 모자가 놓여있었다. 군밤 장수 모자같이 귀를 가려주는 디자인, 안쪽에는 하얀 털이 덧대져 있는 빨간 코듀로이 모자였다.


건너편에 앉은 윌은 뽀글뽀글 부풀어오른 자기 머리카락 속에 손을 집어 넣더니, 빗살이 얇은 포마드빗을 꺼냈다. 그러더니 솜사탕만큼 부불어 오른 머리 사이로 빗을 한번 튕겨냈다. 이윽고 머리커다란 풍선 사이즈로 변했다. 두어번 더 빗을 튕기자, 이제 짐볼 사이즈로 커졌다. 빗은 다시 머리 속에, 귀언저리 쯤에 가지런히 꽂아놓는다.


그는 특유의 미소를 씨익 짓더니 테이블 앞에 놓인 내 빨간 모자를 자기 머리 위에 얹었다. 아프로 헤어스타일이 워낙 거대해서 손을 높이 뻗어올리는 모습이 과장스러웠지만, 꿈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그가 워낙 유머러스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나는 그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를 지그시 쳐다봤다. 홍채색이 나랑 비슷한 연갈색이었다.


그는 결혼식장에서 이 빨간 모자를 한번 본 적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머리 꼭대기에 아슬아슬하게 올라가있는 모자를 낚아채며, 그건 아마도 나였을 꺼라고 말했다. 이 모자를 가지고 있는 건 나 뿐이니까......


한국말인지, 영어인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대화를 계속 했다. 간간이 눈 마주쳤고, 가벼운 웃음을 주고 받았다. 시간의 효율성을 따질 필요 없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대략 이쯤에 마음이 있을가 싶은 심장 쪽에서부터 점점 몽글몽글한 기분이 들었다. 부풀어오르는 분홍색 연애 세포가 갈비뼈 사이 사이로 퐁퐁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무슨 마음이 들어서인지 나는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 갑자기 그의 얼굴 위에 생긴 안경 너머 눈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요즘, 여자 친구 있어요?"


그는 이미 유부남인데, 앞뒤가 맞지 않는 질문을 던지고는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햇빛이 반사되는 안경알 때문에 아까 봤던 연갈색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다.  


대답이 정말 궁금했는데, 알람이 울리더니 잠이 깨버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순리를 따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