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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환상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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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서련 Dec 16. 2020

순리를 따르다

무아는 바다에서 막 건져올린 새까만 물김처럼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8키로짜리 진공청소기를 돌리고, 점심을 끝내기 무섭게 저녁 찬거리를 준비하고 보리차도 부지런히 끓여두었건만, 그 다음 할 일들이 그녀 눈 앞에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아니, 그것들은 쉴 틈을 허락하지 않고 몰려들고 있었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보여주던 6.25전쟁 비디오의 중공군 인해전술처럼. 세탁기에서는 온갖 젖은 빨래들이 건조기로 들어갈 차례를 기다리며 뒤엉켜있고 건조기에는 지난 밤 꺼내지 않은 빨래들이 개어달라고 아우성이다. 싱크대에는 설거지 탑이 아슬아슬 올라가 있고, 마루에는 14개의 자음과 10개의 모음이 그려진 한글매트 위에 알록달록한 그림책과 장난감이 발디딜 틈 없이 널려있었다. 그녀가 태어난 이래로 그 어느 시절보다 가장 빠른 속도로, 가장 열심히 몸을 움직이고 있건만 주변은 언제나 아수라장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압도감에 짓눌려 일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숨통이 조여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자신 뿐 아니라 가족들을 계속 살려야 했다. 무아는 궁금했다. 대체 다들 어떻게 살고 있는거지…….누구도 그러라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다들 각자의 비법을 꽁꽁 감추고 살았다. 삶의 많은 비밀들처럼, 살림의 비밀은 집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았으니까.




평소에는 별로 자세히 볼 일이 없던 서혜부 사이를 자세히 쳐다보던 날이 있었다. 변기에 앉은 다리 사이에는 팬티에 가려지지 않은 채 도톰하게 살이 올라온 소녀의 음부가 보였다. 마치 살짝 입을 벌린 조개같은 그 곳에 까뭇까뭇한 점이 어린 새싹처럼 올라와 있었다. 무아는 고개를 동그랗게 수그린 채, 좋은 마음도 싫은 마음도 아닌 알쏭달쏭한 마음으로 처음 마주한 자연의 신비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겨드랑이에도 똑같은 검은 싹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2차 성징으로 특정 부위에 털이 생긴다는 건 교과서에서 배워서 이미 알고 있었다. 무아가 모르는 것은 그 후였다. 책에는 자라난 털을 어찌하라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교과서를 철썩같이 믿는 고지식한 소녀이기에 내버려둬도 별일 없으리라 생각하며 넘겨버린 것도 그 이유였다. 그렇게 무심하게 내버려 둔 몸이 하루가 다르게 소녀에서 여인으로 변하며 하복을 입는 계절이 다가와버렸다.


쉬는 시간, 서너명의 친구들이 1분단과 2분단 책상 사이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끅끅대며 웃고 있는다. 눈물까지 흘리며 난리가 났길래, 궁금해진 무아는 쭈그리고 앉은 한 친구의 등을 덮치며 끼어들었다.

“무슨 일이야? 니네끼리만 웃지 말고 나도 좀 같이 웃자!”

“저기…...유민이…….큭큭큭……겨드…...랑……..큭큭큭!”

대답하는 친구는 소리를 죽이며 웃느라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유민은 국어 수업부터 이미 잠들기 시작해서 지금은 저 멀리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소녀의 동그란 소매 안으로 털이 엉겨있는 겨드랑이가 보인다. 짖궂은 애들은 자기가 제일 잘 보이는 명당 자리를 차지하겠다며 엎치락 뒤치락 몸을 부대끼며 웃어제꼈다. 무아는 제 몸과 다를 바없는 모습이 도마 위에 올려진 꼴을 보고있자니 순간적으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와 자기 책상으로 돌아와 앉는다. 아무도 보지 않지만 단단하게 팔짱을 꼈다. 무더운 날씨 때문이었는지, 웃음 거리가 된 친구와 자신이 놓치고 있는 무언가 때문이었는지, 살갗과 교복의 합성섬유 사이에 땀이 가득 차오르는 것 같았다.


집으로 오자마자 교복을 벗어던지고 민소매 내의만 입은 채 거울 앞에 섰다. 경건한 마음으로 왼팔을 위로 올렸다. 하마터면 자신을 구경거리로 만들뻔한 녀석들이 모여있었다. 얼른 제거해야만 해! 그녀의 오른손에는 칼날이 1cm정도 되는, 화장품 가게에서 방금 데려온 소형 눈썹칼이 있었다. 이것도 칼이라고 플라스틱 손잡이를 잡고 생애 첫 작업을 시작하려는 무아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눈으로 거울을 응시한 채 겨드랑이를 향해 칼을 겨누다 정신을 차렸다. 손과 눈 모두 겨드랑이를 향하도록 바로 고쳤다. 얼굴을 왼쪽으로 완벽하게 90도 돌린 채, 면도의 과정 하나 하나를 눈으로 지켜봤다. 사각.사각.사각. 소녀의 겨드랑이에서 올라온 첫번째 검은 털들이 아래로 떨어진다. 상처없이 무사히 작업이 끝났다. 자기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으며 손가락으로 결과물을 살짝 훑어보았다. 보드라운 살결은 사라지고 아빠의 턱수염에서 느껴지던 까칠함이 남았다. 당황한 소녀는 오른쪽에 칼을 대지 못한 채 몇 날을 보냈다.




아이들을 재우고서 겨우 몇 일만에 목욕을 한다. 수증기가 올라오는 뜨거운 물이 무아의 정수리로 쏟아져서 머리카락을 따라 부드럽게 목덜미를 타고 내려왔다. 몸의 굴곡을 따라 온몸을 마사지하듯이 흝어내려오면 근육 사이 사이에 박혀있던 차가운 긴장감이 빠져나와 녹아내리는 것 같다. 어린 시절 공중목욕탕에서 본 할머니와 아줌마들처럼, 고개를 젖혀 벌어진 무아의 입술 사이로 기이한 신음이 올라왔다. 오랜만에 겨드랑이 제모도 했다. 보습젤이 달려있는 4중 면도날을 조심스레, 하지만 적당히 대범하게, 피부에 문지르고 물로 씻어주었다. 여전히 매끄러운 겨드랑이를 한번 슥 만져보았다.


무아의 삶에는 그런 것들이 많았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고, 그녀도 아무에게 묻지 않고, 하지만 언젠가는 모두들 은밀하게 알고마는 그런, 삶의 비밀들. 그것들을 알아내기 전까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고 그 기간이 생각보다 길어질 때 무아는 삶이 버겁게 느껴졌다. 요즘이 참 그런 시기였다. 손이 느린 무아는 장난감 어지르는 속도를, 밥을 헤치우는 속도를, 수건을 내던지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항상 피곤했다. 자신이 유독 엄살이 심한건지, 다른 엄마들의 인내심이 대단한건지, 아니면 자신이 놓치고 있는 어떤 비밀이 또 숨어있는건지 무아는 알 수가 없었다. 가정을 살리는 법은 가족이 아닌 외부인에게 쉽게 노출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온라인 공간만을 엿보자니 비현실적인 사진들 덕분에 오히려 무아의 아리송한 의문은 더 커지곤 했다. ‘저 여자는 나처럼 아이를 키우는데, 심지어 일도 하면서 어떻게 저렇게 살림까지 멋지게 해내는거지?’ 호기심이 질투로 넘어가 기분이 나빠질 때즈음, 만만한 자본주의를 탓하며 핸드폰에서 눈을 떼는 일이 잦았다.


모니터 사이즈의 사생활을 엿보던 그 눈으로 뿌옇게 김이 서린 화장실 거울을 본다. 목욕을 마친 무아의 희미한 윤곽이 서 있었다. 손을 뻗어 거울의 수증기를 슥 닦아내니 난장판 집안 꼴에 어울리지 않는 가지런한 눈,코,입이 나타났다. 눈썹은 여전히 수증기에 가려진 듯 희미했다. ‘눈썹 그릴 시간 좀 아끼면 살림을 할 여유가 좀 더 생기려나?’ 존재감없는 얼굴의 털을 문지르며 터무니 없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거울 속 자신이 웃는다. 모나리자처럼. 여러모로 눈썹 문신을 해도 나쁘지 않을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술자는 일주일 내외로 각질이 일어날텐데 손으로 떼지 말라고 말했다. 각질이 알아서 떨어지면 자연스러운 눈썹이 될 꺼라 말하며 손거울을 들어 무아의 얼굴을 비추어 준다. 참을만했지만 거슬리는 1시간여 고통을 견뎌내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무아는 날개를 펼친 검은 갈매기를 마주 보았다. 비대칭으로 기울어져 거울 밖으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역동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시간도 눈썹도 되돌릴 수 없는 그 순간,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혀 끝에서 맴돌았다. 벙어리가 된 채로, 기르고 싶지 않은 새 한 마리 값이라고 하기에는 거액의 돈을 공손하게 시술자에게 건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야 했어야 하는 말들이 서로 나오겠다며 뒤늦게 요동을 쳤다. 속이 울렁거리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식도를 타고 거슬러 올라오는 무언가를 억누르며 내려야 할 정류장까지 가까스로 버텼다. 뒷문이 열리자마자 길바닥에 구토를 쏟아냈다.  


신랑은 원하는대로 눈썹을 했으니 잘 되었다며 아내를 차분하게 격려를 했다. 자신의 속내를 잘 다스릴 수 있는 어른스러운 그 이 덕분에 무아의 마음이 한결 평온해지려는 찰라, 아이들이 엄마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잠시 후, 반영구 화장을 보자마자 코메디 영화라도 본 듯이 깔깔깔 웃어버린다. 어린 아이들에게만 허락되는 솔직한, 그 잔인한 웃음을 마주하고 여자의 마음은 움츠러 들어버렸다. 2주 뒤, 시술자와 영상 통화를 했다. 시술자는 모니터 속 고객의 짙은 눈썹을 뚫어져라 보더니 시술 후의 당혹스러움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듯, 큰 걱정할 필요없이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했다. 그리고 그 조금이 어느새 반년이 되어버렸다. 무아의 살림은 여전히 엉망이었고 갈매기는 변함없이 위풍당당했다.


바깥을 나가는 횟수가 급격히 줄어버렸다. 오늘은 냉장고가 텅텅 비어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어쩔 수 없이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장을 보러 나왔다. 재택 근무하는 신랑이 집에 있긴 하지만, 아이들에게 애니메이션 영상을 하나만 틀어주고 나왔기 때문에 무아에게 허락된 시간은 그만큼 제한되어 있었다. 동네 슈퍼마켓에 들어서자마자 온 몸을 최대 효율로 가동시킨다. 눈으로 물건을 찾자마자, 손으로 물건을 옮기고, 발은 다음 목적지를 찾아 부랴부랴 분주하게.

‘두부, 계란, 감자, 양파, 당근, 애호박 샀고……음, 또 뭐 사야했지…….’

1분 1초도 낭비할 수 없는데, 장 볼 품목을 적어놓은 쪽지가 눈치없이 호주머니 안에서 숨바꼭질을 즐겼다. 꾸깃한 종이를 꺼내려다가 끝내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안 그래도 시간 없는데……!’

급한 마음에 재빨리 허리를 숙여 종이를 주으려는데, 야구 모자의 챙이 진열대에 걸려 벗겨져 버렸다.

“으어어헉!”

호들갑스러운 비명을 지르다 손으로 잽싸게 갈매기부터 가렸다. 상체를 수그린 채로 모자가 있는 쪽을 확인하고 발걸음을 옮겨가는데, 한 여자가 모자를 가뿐하게 집어서 무아에게 다가온다. 무아는 덥석 낚아채 듯 모자를 잡아서 일단 머리 위에 아무렇게나 눌러씌웠다. 모자 챙에 가려져서 상대방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바닥에 보이는 상대방의 신발이 무아 앞에서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멈춰있었다.

‘다급해서 너무 무례하게 한 손으로 받았나? 기분 나쁘셨으면 사과해야지…...’

“저기, 죄……”

“제가 기가 막히게 바꿀 수 있어요.”

“......?”

얼 빠진 표정으로 서 있는데, 모자를 건넨 여자는 이미 다 안다는듯이 확신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얇고 빳빳한 작은 종이를 꺼내더니 무아 쪽으로 건넨다. 무아는 이 사람이 말하는 기가 막힌 결과가 뭘까 궁금하기도 하고, 낯선 이가 건네는 오지랖이 조금 거슬리기도 했다. 볕뉘같이 들어온 구원의 빛이 기쁘기도 했고, 자신의 사정이 슬프기도 했다. 희노애락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이 와중에 갈매기가 알이라도 하나 낳았는지 목구멍에 뭐가 걸린 듯 뭉근한 아픔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맥락없이 튀어나오려는 눈물을 보아하니 조만간 생리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눈물 보이기 싫어서 5초간 눈시울을 어르고 달랜 뒤, 반짝이는 명함의 모서리를 잡았다.


집으로 돌아와 평소처럼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모든 일과를 끝마친 밤, 얼굴도 모르는 여자들이 잔뜩 모여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신뢰도 높은 정보를 주고받는 동네맘카페에 들어가서 이용후기 게시판을 눌렀다. 명함에 쓰여진 그녀의 이름은 이순. 외자였다. 그녀의 이름을 검색창에 누르자 생각보다 많은 후기들이 쏟아져나왔다. 키워드를 추가해서 게시글들을 추려보았다. 여전히 글이 많아 무아는 지난 1년동안 작성된 후기들 중에서 무작위로, 한달에 한개 꼴인 12개의 글을 뽑아서 보기로 했다.

추천. 추천. 추천. 추천. 추천. 추천.

‘오, 이 사람 정말 믿을만한가 보다. 다들 좋다고 하네.’

비추.

‘그럼 그렇지, 모든 사람들이 다 좋다고 할리는 없잖아.’

추천. 추천. 추천. 추천. 추천.    

11개의 긍정적인 후기글과 1개의 부정적인 후기글. 부정적인 평가를 준 작성자는 따로 검색해보니 이것 뿐 아니라, 모든 글에 불만과 불평이 묻어있어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11명의 맘들의 응원에 힘입어 무아의 맘에 순에 대한 확신을 채우며 잠자리를 청했다. ‘그래. 여기서 더 나빠질 것도 없잖아.’ 내일 아침 날이 밝자마자 예약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눈을 감았다.


작업실은 그들이 처음 만났던 슈퍼마켓에서 멀지 않았다. 슈퍼에서 무아네 집으로 가는 오르막길에 있는 3층짜리 하얀 벽돌집이었다. ‘오며가며 항상 지나가던 곳이었는데…...’ 생각하며 세월이 흔적이 묻어있는 낡은 나무문을 두드렸다.

“어서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순이 문을 열어주며 환하게 맞아주었지만 뒤에서 들어오는 조명빛 때문에 그녀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인사를 드리며 들어간 무아는 야구 모자를 벗어서 가방과 함께 옆에 두었다. 순이 준비한 따뜻한 차를 마시며 두 여자는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방이 혹시 사기꾼은 아닌지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되는 요즘 세상에 안 어울리게, 그녀들의 첫 대화는 진실하고 유쾌했다.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를 위하는 이야기의 주고받음. 무아는 오래동안 구겨놓은 마음이 쫙 펼쳐지는 기분이었다. 종이같은 마음에 주름이 남아있을지언정, 홀가분하고 시원했다. 순이 노트에 무언가를 기록하려는 듯 양해를 구하자, 무아는 잠시 작업실을 구경했다. 한 구석에 피부관리실에서 쓰는 듯한 침대가 놓여져있었고 주변에는 여러가지 자격증들이 줄줄이 놓여있었다. 이렇게 자격증이 많으니 이용후기 게시판에 그녀에 대한 글이 쏟아지도록 많은 것이 이해가 되었다. 영어 증서도 간간이 눈에 띄었는데, 중세시대 고딕 건축물같이 직선과 곡선이 어우러진 블랙레터 알파벳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그 안에서 무아는 간신히 그녀의 이름만 읽을 수 있었다. Soon Lee.

“준비 되었으면 여기 침대 위에 앉아보실래요?”

“앗, 네…….”

그녀를 따라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따뜻하게 데워진 침대 위에 엉덩이를 누르자 무아의 몸에서 피가 쏟아져 내렸다. 다행히 순을 처음 만나 눈물이 흐를 것 같던 그 날, 낌새를 알아채고 미리 조치를 취해두었다. 무아는 자신의 선견지명을 칭찬하며 자기 몸을 두고 거두어 낸 승리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본 순도 화답하듯 미소를 띄웠다. 순과 무아가 아주 가까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순이 통증을 완화시켜준다는 하얀 크림을 짓이겨 무아의 눈썹 위에 발라주었다.

“그동안 까만 것 때문에 많이 힘드셨. 이제 좀 자유롭게 해드릴께요.”

“네, 부탁드려요.”

무아는 대답을 하고는, 자신을 온전히 믿고 맡긴다는 뜻으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LED 조명 확대경이 눈 위로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전과 다르게 따스한 빛이 편안하게 다가와 잠이 솔솔 쏟아졌다. 한숨 자고나면 이번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져 있을까?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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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갈매기는 무아에게서 떠나가버렸다. 그리고 순을 만나고 돌아온 후부터, 무아는 눈썹 뿐 아니라 자신이 점점 투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최근에 시력이 급격히 약해진걸까? 아니면 지난 몇 달간 거울을 볼 때마다 강렬하게 시선을 가로채던 까만 날개가 일순간에 사라져서일까?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어도 무아는 그 상태가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가랑비가 내리는 아침, 일찍부터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설거지를 정리한 뒤 아침밥을 부지런히 준비한다. 밥을 먹고 집을 나서는 남편과 아이들을 배웅하며 돌아와, 식탁을 정리해서 싱크대로 그릇을 옮긴다. 일상은 똑같은데, 자기가 사라졌다고 느끼자 현실을 마주하는 감각들이 덜 예민해졌다. 형체가 없는 바람은 끝도 없이 몰려오는 파도에 압도되지 않는다. 파도를 만들고, 파도를 부수고, 파도의 사이를 자유롭게 지나다닌다. 살리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바로 자기 자신이 살지 않는 것이 방법이었을지도. 그게 각 가정이 감추고 있는 살림의 순리일 수도.


아침내내 벗어나지 못하던 부엌, 그 자리에 서서 싱크대 위 작은 창문을 바라보았다. 비구름이 걷히고 해가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창문을 손으로 가리니 그 광경이 투명해진 무아의 손에 그림처럼 들어왔다. 무지개가 보이는 아침은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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