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는 두리번거리며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까치발을 들어 올리며 키가 한 뼘 쑤욱 키웠다. 빨간 운동화를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숨도 함께 들이쉬고 내쉬었다. 마지막 숨을 크게 내뱉은 뒤, 머릿속에 출발 신호탄을 쏘아 올린다.
준비, 땅!
만 16세 이팔청춘의 몸을 입었지만 사내아이처럼 한껏 과장되게 팔다리를 휘두르며 텅 빈 길을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몸은 자유롭게 위로 튀어 오르고 바람은 수평으로 지수의 몸을 부드럽게 둘러간다. 넘치는 기운은 발 끝을 통해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속 시원한 개운함을 느끼며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예쁘게 올라갔다. 달리기 덕분에 순식간에 집 근처에 다다랐다.
마침 옆집 대문 앞에 꿈돌이 아저씨가 쭈그리고 앉아 지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저씨는 소녀의 입가에 번진 미소가 자신을 향한 것이라 착각하며, 신이 나서 손을 흔들었다.
“지수야, 혹시 나랑 오늘 산에 가는 거 괜찮겠니? 이번 장마가 너무 길어서 계획했던 것보다 작업이 너무 늦춰지는 거 같아서…….”
아저씨는 입으로 부탁의 말을 던지긴 했지만, 눈으로는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여고생을 보고는 말끝을 흐렸다. 지수는 깔끔과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서 자신의 몰골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먼지를 뒤집어쓴 김에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부탁의 타이밍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저씨가 마지막으로 아내를 본 건 1년 전이다. 듣기에는 ‘당신이 오매불망 날 기다리다 망부석이 되면 돌아올지도 모르지…….’라고 말을 내뱉으며 집을 나갔다고 한다. 아줌마가 떠나던 날, 소란스럽던 담벼락 너머에서 들려왔던 그녀의 마지막 대사는 ‘바보 등신 놈!!’이라고 시작해서 제법 앙칼지게 끝났던 거 같은데, 사실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아저씨는 사람이 돌로 변할 수는 없으니 산 꼭대기에다가 멋진 돌조각을 만들어 놓으면 집 나간 아내가 돌아오지 않을까 희망을 품고 사는 꿈돌이였다.
세상에는 곧이곧대로 말을 듣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종종 절망스러울 정도로 눈치가 없어서 선한 의도였지만 상대방을 아주 불쾌하게 만드는 잔인한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지수가 봐 온 아저씨도 그런 류의 희한한 재주꾼이었다. 지수는 뭐라도 해보려는 사람의 의지를 꺾어 버리고 싶진 않았다. 그저 이 사람이 말하는 멋진 돌조각이 자신을 본떠서 만든 망부석이 아니기만을 바랬다.
그런 걱정을 조금 나중에 해도 되는 것이 다행인 걸까? 아저씨의 계획은 시작도 하기 전부터 이미 꼬여있었다. 일단 그가 선택한 마을 뒷산은 등산로가 워낙 엉망이라 꼭대기까지 오르기가 너무 험난했다. 미끄러운 잡풀 더미에 발목이 엇나가고 삐죽삐죽 튀어나온 가시덤불에 소매나 바짓가랑이를 붙잡히기 일 쑤였다. 산마루에 조각을 세우기는커녕 5분 등산하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아저씨는 길을 정비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상황을 보면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태복음 26: 41)’라는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40대에 접어들면서 급격하게 바닥을 친 체력은 누군가 해주던 밥 마저 못 얻어먹으니 바닥을 뚫고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그 비실비실한 체력을 앞세우고 길을 정비한답시고 숲과 몸으로 씨름을 했다.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버려진 외로움이 가득한 집에서 마음으로 씨름을 했다. 쉴 새 없이 아등바등하는 데 지쳐 조각이고 뭐고 포기할 심산으로 걸어가는데 마침 방학을 맞이한 지수와 마주쳤다.
“어어...... 안녕하세요?”
지수는 몸이 마른 것도 아닌데 허한 기운을 온몸으로 뿜어내는 어른 남자의 모습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인사를 하고는 들고 있는 봉지에서 삼각 커피 우유를 건넸다.
“이거 좀 드세요.”
끼니는 제 때 챙겨 먹고 사는지 사근사근한 걱정을 끼워 넣은 것도 아니고 이웃집 어른한테 던지는 그저 형식적인 인사. 거기에 800원짜리 우유 하나. 하지만 사람은 툭 던지는 사소한 안부 같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서 결정적인 힘을 얻기도 한다. 그는 내팽개치려던 꿈을 슬쩍 움켜줄 힘을 얻었다. 지수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그리고 처음 도움을 요청했던 그 날처럼 오늘도 근천스러운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네, 괜찮아요.” 지수가 말했다.
남자는 가위로 잡풀을 걷어낸다. 스걱~ 스걱~
여자는 발로 쳐서 등산로를 평평하게 만든다. 턱!!턱!!턱!!턱!!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 거절하지 않는 지수이지만, 사춘기 소녀 특유의 경계심이 단 하나도 없는 건 아니었다. 아저씨와 함께 작업을 한다한들, 둘이 하하호호 살갑게 대화를 나누는 일은 없었다. 땀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침묵의 노동을 한번 경험한 뒤, 두 번째 작업 때부터 아저씨는 블루투스 스피커를 준비해왔다. 자신들의 입은 꾹 다물고 있지만, 다른 이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작업을 했다. 좋아하는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지수도 아저씨의 올드한 선곡을 꽤 맘에 들어했다.
오늘의 네 번째 노동요에서 지수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흠……. 이 노래는 누가 불렀어요? 혹시 이적 맞나요?”
“어. 맞아. 이적이 원래 솔로 활동하기 전에 패닉이라는 그룹으로 활동했었거든. 그때 데뷔 앨범에 있었던 ‘달팽이’라는 곡이야.”
아저씨는 가위를 들고 가시덤불을 헤쳐나가며 자신이 자라온 시간을 계산했다. 그가 세월의 속도에 아찔함을 느끼는 동안, 아저씨 뒤를 따라 걸어가는 21세기 소녀는 노래에서 흘러나오는 가사를 조그맣게 따라 읊조렸다. 세상 끝 바다로 나아가겠다는 달팽이. 어딘가 이 아저씨랑 맞닿아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허무맹랑한 목표를 위해 길을 만드는 이 시간이 아주 살짝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지만 내가 패닉을 참 좋아했었어. 자잘한 정보까지 다 꿰고...... 이적 엄마가 여성학자이신데, 공부하라는 잔소리도 안 했는데 세 아들 모두 서울대 보냈대. 이적은 사회학과 나왔고 발레리나랑 결혼했고……”
줄줄이 더 말하려다가 남자 연예인에 대한 자신의 열정 어린 모습이 뭔가 쑥스러운지 말끝을 또 흐렸다. 지수는 아저씨가 부끄러움을 느끼는지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앞서 나가는 아저씨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고, 지수도 아저씨 못지않게 나름의 방법으로 그 아티스트에 빠져들고 있는 중이었다.
패닉*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서정적인 멜로디가 지수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멋진 동화를 노래로 불러주는 음유 시인. 그 옆에 서 있는 발레리나가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춘다. 망치 같은 발이 아니라, 요정처럼 어딘가로 날아오를 것 같은 발로. 사뿐사뿐 날아올랐다.
* Panic: (갑작스러운) 극심한 공포, 공황 (출처: 네이버 영어 사전)
작가의 말: 마루에서 노트북으로 글을 거의 마무리하고 발행을 누르려는데 밤잠을 자고 있던 둘째가 울음을 터뜨려서 방으로 호출 왔어요. 모바일로도 쉽게 글을 발행할 수 있는 요즘, 애엄마 작가 지망생에게는 참 감사한 거 같아요 ^^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