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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환상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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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서련 Oct 11. 2020

엄지공주 (1)

장마를 견뎌낸 학교 운동장은 억척스러운 모양새로 비틀어져 있었다. 그곳에는 무너진 화단을 복구하기 위해 모인 원예부도 있었다. 그녀들은 흙을 만지작거리며 모종을 심는 소꿉놀이는 해 봤지만, 울타리를 세우는 고된 노동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원예부답게 여기저기 무참하게 드러나있는 식물 뿌리를 호기심 많은 눈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그 사이, 오늘의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원예부장 해수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의 사람을 명예 원예 부원으로 위촉하면서 학교로 빨리 와달라고 도움을 청하고 있다. SOS 요청을 받은 해수의 친구는 금방 운동장으로 나타났다. 볼이 넓고 앞 코가 약간 헤진 빨간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다들 인사해. 내 친구인데, 얘도 우리 학교 다녀. 오늘 내가 명예 원예 부원으로 임명했어!  

해수는 갑작스레 불러낸 친구에게 조금 미안했는지 ‘명예'라는 단어의 힘을 친구에게 불어넣듯이, 지수의 어깨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얘가 보기랑 달리 힘이 엄청나! 오늘 울타리 세우는 일을 도와줄 거야. 자, 잘해보자!”

몇몇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몇몇은 처음 만나는 여학생 소개인데 굳이 힘이 세다는 걸 강조하는 이유가 뭘까?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엄지수야. 잘 부탁해.”

지수는 간단하게 답인사를 하고 해수에게 바로 삽을 건네받으며 작업을 시작했다. 여고생이라고 믿기 힘든 힘과 안정된 자세였다. 특히, 지수가 발로 삽 머리를 땅에 박는 일은 너무나 간단해 보였다. 흘러넘친 흙을 어느 정도 걷어낸 뒤에는 지수와 원예 부원들이 함께 말뚝을 세우기 시작했다. 표시해 둔 좌표에 누군가 나무를 올려주면 지수가 있는 힘껏 발로 말뚝을 내리치는 일을 했다. 무언가를 함께 완성해가는 협동 작업은 보람찼고, 몸이 힘들어도 피곤함을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척척 호흡이 맞아 묘한 중독성까지 느껴졌다.

그러던 중, 원예 부원 중 한 명이 지수 덕분에 망치 머리가 날아갈 걱정 없이 말뚝을 박을 수 있어 좋다며 큰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안전제일!” 4글자를 소리치며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요란해서 지수의 쾌락 중추에 전해지는 중독 자극이 끊어졌다. 노동의 현실 감각이 돌아오면서 지수의 몸은 급격하게 피곤해졌다. 여고생이 받고 기뻐할 칭찬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지수는 예의상 멋쩍은 미소만 잠깐 지었다. 

울타리 세우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지수는 원예부에 인사를 하고 자리를 일어났다. 그때 원예부장 해수가 같이 일어나며,

“엄지, 오늘 고마웠어.

“그래. 다음에도 필요할 때 불러줘.

힘쓰는 일에 부름을 받는 여고생이라니, 자기가 말해놓고도 괜스레 서글펐다. 어쨌거나 친구에게는 웃으며 대답을 했다. 

교문 쪽으로 걸어 나가는데 지수의 발 쪽으로 농구공이 굴러온다. 마른땅을 기다린 건 원예부뿐만이 아니라 농구에 반쯤 미친, 땀 냄새가 진동하는 남학생들도 있었다. 오늘 나온 애들 중에는 지수와 같은 반 애들도 보였다.

“야, 천하장사! 이쪽으로 패스!”

평소 같으면 살짝 공을 던져줬을 텐데, 곧 한 달에 한번 있을 몹쓸 마법에 걸리기 전이었나 보다. ‘천하장사'라는 별명이 좀 전의 서글펐던 감정의 봇물을 터뜨리며 몸 전체로 콸콸 흘러내린다. 지수는 기분 나쁜 감정을 엄지발가락에 한껏 모아서 힘차게 공을 걷어차버렸다. 순간, 지수의 팬티 위로 무언가 물컹 흘러내림을 느꼈다.  

‘젠장! 마법에 걸렸나?!’

하지만 생리는 터지지 않았고, 같은 반 남자아이에게 돌아온 농구공 한쪽이 터져서 찌그러져 있었다.


작가의 말: 그동안 썼던 창작글이 초초초단편이라면, 이번에는 단편소설 한 편을 차근차근 완성해보려고 합니다. 앞으로 쓸 엄지(수)의 이야기 기대해주세요 :)


이미지 출처:https://kor.pngtree.com/freepng/thumbelina-and-mr.-cat-manuscript_422114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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