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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환상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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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서련 Mar 23. 2021

엄지공주 (3)

방학은 끝났지만, 9월의 날씨는 여전히 여름에 머물러 있었다.


뜨거운 공기가 가득 찬 교실에서 학생들은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거나,  축 늘어져있거나, 기이한 신음 소리를 내며 수업을 버텨냈다. 1분단 끝자리에 앉은 지수도 최대한 그늘 쪽으로 몸을 밀어 넣으며 더위를 피하는 중이었다. 책상과 의자의 거리가 상당히 멀어졌지만, 딱히 수업에 방해되는 건 아니어서인지 선생님 그 모습을 보고도 말없이 지나가셨다.

지수는 멍하니 자신의 두 발을 바라보았다. 발목을 까닥까닥 움직이다가, 신발 끝으로 바닥을 톡톡 쳐본다.

꿈돌이 아저씨를 도와줬던 그 날, 날아갈 듯이 가볍게 움직이는 발레리나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그 날. 집으로 돌아와 오래도록 영상들을 찾아보았다. 지수가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은 분홍색 토슈즈, 발레리나가 발 끝으로 설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특별한 신발이었다.

지수는 눈을 가늘게 떠서 자신의 발 위에 토슈즈를 그려보았다. 빛나는 새틴 끈을 엑스자로 교차시키고 발목에 매듭을 지어주었다. 창가에서 교실까지 통로를 만들며 들어오는 햇살이 마치 무대 위의 조명처럼 눈부셨다.


발 끝으로 서 보고 싶다.


발레리나처럼 춤출 수 있다면, 나도 공주님이 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오늘 점심시간에 특별 활동 연습실에 가 봐야지…... 설렘이 발 끝에서 머리 끝으로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엄지~ 뭐해? 급식실 안 가?”

해수를 포함하여 지수와 함께 급식실로 이동하는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오늘 점심 안 먹으려고…....”

“체한 거야? 아니면 그 날? 양호실 같이 가줄까?”

해수가 친구의 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별 거 아니야…….”

거짓말은 안 했지만, 뭔가를 숨기려다보니 어색한 표정이 지어졌다. 지수는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아랫배를 문질렀다. 주변을 살뜰하게 챙기는 해수는 워낙 눈치가 좋아서 거짓말이 들통날까 조마조마했다.

“알겠어. 좀 쉬고 있어.”

급식실 공동체는 점심을 포기한 친구를 놔두고 떠나버리기 미안한지 한동안 곁에서 지지거리다가 이내 우르르 사라졌다. 지수는 친구들이 떠난 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교실문을 나섰다.


연습실은 별관에 있어서 수업이 있을 때 빼고는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커다란 문을 열어젖히자 널찍한 공간에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전신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바닥에 앉아 비닐봉지에서 준비해 온 물건들을 하나씩 꺼냈다.

영화 <하나와 앨리스>에는 앨리스가 오디션 관계자들 앞에서 발레를 선 보이는 장면이 있다. 교복을 입은 채로, 종이컵과 테이프를 빌려 즉석에서 만든 토슈즈를 신고 춤을 춘다.

지수는 자신의 튼튼한 발이라면 저렇게 해봐도 충분히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종이컵에다가 휴지를 채워 넣고 발을 집어넣은 뒤 발목까지 테이프를 칭칭 감아올렸다. 그리고 일어나 발 끝으로 서 보았다. 예상대로 커다란 엄지발가락 덕분에 상당히 안정감이 들었다.

아무런 기교 없이, 발바닥 대신 발 끝이 세상에 닿아있는 것만으로 사람이 아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지수는 한쪽 다리를 들어보기도 하고, 용기를 내서 빙그르르 돌아보기도 했다. 중심을 잡는데 정신이 팔려서 연습실 뒤에서 누가 구경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야, 그렇게 하다가는 발목 나간다."

"으앗!!"

지수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연습실에서 갑자기 남학생 목소리가 들려 소스라치게 놀랐다. 남학생의 예언처럼 정말로 발목을 삐끗할 뻔했다.

뒤를 돌아보니 같은 반은 아니지만 종종 복도에서 마주쳐 같은 학교 학생이라는 정도만 아는 남학생이었다. 지수는 들켜도 별 상관없다는 듯, 애써 담담한 척을 하며 교복을 툭툭 털어내는 손연기를 펼쳤다. 하지만 속내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고장 난 로봇처럼 오래도록 한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남학생은 먼지털이에 심취한 지수 옆을 무심하게 지나치더니 전신 거울 앞에 서서 회전하려는 준비 동작을 취했다.

"발레 제대로 하려면 얼마나 많이 연습해야 하는지 알아?"

지수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남학생은 팽이처럼 돌기 시작했다.

휙-휙-휙-

지수는 눈 앞에서 보고도 못 믿겠다는 듯이 3회전을 깔끔하게 마친 남학생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진짜 많이 도는 사람은 한 번에 10바퀴도 넘게 돌아."

남학생이 검지 손가락을 하늘로 찌르며 말했다.

"어......그, 그래? 근데 너 발레해?"

눈 앞에 서 있는 발레하는 남자. 지수는 상상 속의 동물을 발견한 것 마냥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어렸을 때 잠깐. 엄마가 무용 학원 하시거든."  

"아......."

이야기를 듣고 보니 발레하는 사람처럼 교복 안에 비치는 몸매도 호리호리하고, 보이지 않는 실이 정수리에서 나와 천장에다 매달아 놓은 듯, 올곧게 서 있는 인형 같았다.    

"지나가다 누가 춤추는 거 같아서 와봤는데 말이야. 이거 진짜 토슈즈도 아니잖아. 조심해. 준비 없이 막무가내로 하다가는 금방 부상당해서 병원비가 더 나와."

"알았어…..."

건네준 충고 몇 마디가 그다지 달달하지도 않았는데, 그저 남자 목소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남학생은 민망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듯 신경 쓰지 않고 뒤돌아 나갔다.


잠시 뒤, 지수가 종이컵 슈즈를 신은 채 다급하게 연습실을 가로질러 나갔다. 남학생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직전 그를 향해 소리쳤다.

"저기.......야......”

지수가 부르는 걸 듣지 못했는지, 뒤통수가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한다.

“야! 저기! 너!”

목소리에 절실함이 실렸는지, 남학생이 이제야 뒤를 돌아 지수 쪽을 쳐다본다. 좀 전에 에너지를 한꺼번에 폭발시켰는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돌아와 물었다.  

“그럼 다치지 않고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작가의 말: 최근에 유튜브 은재TV를 보면서 소설 공부를 시작했어요. 원하는 만큼 시간이 나지 않아서 조급함이 스멀스멀 올라오긴 하지만, 차근차근 해보려고요 :^)   



이미지 출처:https://kor.pngtree.com/freepng/thumbelina-and-mr.-cat-manuscript_422114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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