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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서련 Sep 22. 2022

악의가 있었을까? 없었을까?

W 마트에서 일어난 일

주말에 있을 둘째의 생일을 준비하러 집을 나섰다. 컵과 그릇, 가랜드 등의 파티 용품들은 어제 사두었고 오늘은 손님들이 먹을 물과 주스를 사러 가야했다. 식료품과 함께 생필품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대형 할인 마켓, W 마트를 가기로 했다. 집에서 가까운 S 마트보다 서비스가 별로이지만 신선 식품이 아닌 음료들은 질에서 큰 차이가 없을테고 무엇보다도 가격이 훨씬 저렴하니까.


근데 가격 경쟁력 때문일까. 예전부터 느꼈지만 이 공간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은 경제적 취약 계층, 아우리가 어두컴컴한 사람이 많다. 손님부터 그들을 맞이하는 직원들까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생활고 짓눌림이 눈에 보이는 사람들. 10명 중 서너명은 날씬한 여자 두 세명을 한데 묶어놓은 듯한 초고도 비만의 몸을 하고 매장의 좁은 복도 이곳저곳을 걸어다닌다. 지난 번에는 마트에 주차 해놓고 장을 봤는데 누가 차에다가 흠집까지 내 놓았다. 차끼리 부딪혀서 생긴 게 아니라 누군가 일부러 못을 써서 차체를 긁어놓고 도망을 갔다. 십자가라 하기엔 길이가 조금 애매한 더하기 표시를 만들어놓고.


여러모로 불길한 예감이 들어도 그래, 살 것만 사고 빨리 여길 빠져나가자! 라는 생각으로 W 마트에 들어섰다. 일사분란하게 아이를 카트에 태우고 포스트잇에 적어놓은 구매 목록을 카트 안으로 착착착 옮겨 담았다. 마지막으로 8oz 짜리 12개들이 생수병을 사러 한 복도로 들어섰는데 하필 그 녀석들은 선반의 가장 꼭대기, 3층 선반에 올려져 있었다. 비교적 키가 큰 편인 나도 손이 닿지 않을 거리라서 옆에 서 있는 여자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와 달리 뒤돌아 본 그녀의 얼굴은 칙칙한 갈색이었다. 돌출된 눈꺼풀 아래로 멍한 눈빛을 장착하고 말 한마디 없이 나를 보더니, 자기 눈 앞에 잡히는 직원용 쇠꼬챙이를 건네준다.


........?


한쪽에는 빨간 손잡이 한쪽 끝에는 갈고리가 있던 긴 막대기. 생김새로만 보아 나는 도저히 이거를 어떻게 해서 물병을 아래로 내릴 수 있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옷 파는 가게에서 옷걸이 내리는 것도 아니고, 고리도 달려있지 않은 무거운 생수병을 어떤 재주로 내리라고 이걸 준 걸까.


곰과 여우 중, 곰. 그것도 대장곰에 가까운 둔탱이인 나는 여기 마트에서 일하는 그녀에게는 내가 모르는 특별한 재주라도 있는가 싶어서 "Can you please help me?"라고 말하며 건네받은 쇠꼬챙이를 다시 넘겨주었다.  


그녀는 축 처진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 아마도 한숨을 쉬었던걸까? -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건네받은 쇠꼬챙이를 들어 올리더니 비닐 포장된 물통 위로 끼적끼적대었다. 내가 해 보려는 방법이랑 별반 다르지 않은 거 같은데 어, 어?어? 어! 저러다가 물통이 쏟아지는 거 아냐?!일단 본능적으로 아이가 앉아있는 카트부터 옆으로 밀어본다.


우당탕탕탕탕!!!


우리들 바로 옆으로 투명한 생수병들이 복도 바닥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살다살다 처음 만난 생수병 폭포. 다행히 통이 터져 물난리가 나는 건 면했지만, 비닐 포장이 뜯어지면서 생수병 대여섯개가 사방으로 데구르르 구르며 퍼져나간다. "으갹갹!" 동물 소리를 한번 발사한 나는 그 이후 벙쪄서 아무말 없이 서 있고, 여자는 터진 포장 안으로 생수병 개수를 주섬주섬 맞춰주더니 나에게 한 세트를 건네준다. 그리고는 하던 일을 마친 거 같지 않은데 밝은 갈색 머리를 휘날리며 내가 보이지 않는 옆 칸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녀에게 생수병을 떨어뜨려 우리를 위협하려는 악의가 있었을까? 아니면 없었을까? 귀찮으니까 꺼져버리라는 그녀의 경고를 바보같이 못 알아듣고 꼬챙이를 다시 건넨 나처럼, 나쁜 의도는 전혀 없이 그저 우리를 도우려고 했는데 바보같은 방법으로 하는 바람에 생수병이 와르르 쏟아져버린 걸까?


나는 그녀도 나같은 인간이라 생각해본다. 조금 많이 위험하긴 했지만.




p.s: 오늘 있었던 일을 적어넣은 일기니까 'Dance, Dance, Dance' 매거진에 올려야 할 것 같은데 생각하면 생각 할 수록 오늘 진짜 이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믿기지가 않아서 '일상과 환상 사이' 매거진에 올려야 할 것 같다. 갈고리에 찢긴 생수병 포장을 보면 진짜 있었던 일이 확실한데......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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