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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서련 Feb 04. 2023

길 건너편 그 사람

소설에 써먹을 듯한 일상의 기묘한 순간

미국의 학교는 자동차를 타고 학교 코 앞까지 데려다주는 드라이브 스루(Drive Through) 등교 시스템이 흔하다. 그러다 보니 아침의 학교 주변은 걸어서 등교하는 부모와 아이 보행자, 꼬맹이 무법자 자전거들, 똥줄 타듯이 줄지어 선 줄줄이 승용차까지 몰려 전쟁터가 따로 없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혼자서 갈 만큼 적당히 떨어져 있고 한적한 주택가의 길에 주차를 하고 아이를 내려주는 편이다.


오늘은 아이를 내려주고 바로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다가 주차 자리에 멈춰 핸드폰을 꺼내보았다. 얼마 전 써 두었던 글에서 수정하고 싶은 게 생각나서 까먹기 전에 손을 보고 싶었다. 작가 지망생이랍시고 뭐라도 써보려고 아등바등하며 만든 허구의 이야기였다.


배우면 배울수록 소설 쓰기가 쉽지가 않다. 내가 만든 세계가 스스로 팽창되지 못하고 내가 조사한 자료들, 내가 해 온 경험 딱! 고만큼까지만 확장하고 멈춰버리는 경향이 있다. 빨강머리 앤처럼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님들은 다를 텐데, 이성에 의지하는 글쓰기를 훈련받은 나는 소설이나 동화 같은 창작글을 쓰는데 브레이크가 자주 걸리곤 한다. 눈덩이를 굴렸는데 가다 말고 서고 가다 말고 서고. (아오!!!!) 경사가 가파른 비탈길에서 밀어야 하는데 평지에서 낑낑대고 있어서 그런 거겠지. 여하튼 중간중간 멈춰서는 녀석을 보면 나도 만들기를 당장 멈춰버리고만 싶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써야지.


그러다보니 요즘에는 내가 한 경험들을 조금이라도 움켜쥐려는 습관이 생겼다. 물론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자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생생한 소설을 쓰는 작가, 아니 에르노처럼 할 순 없지만 (그녀의 소설 '단순한 열정'은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과 사랑을 다룬 자전적 소설(읭?)이다.) 별 거 아닌 거 같은 일상이래도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포착해서 차곡차곡 쌓아두려 한다. 소설의 어떤 장면에 쓰일지도 모르니까.


다시 오늘의 자동차로 돌아와서, 나는 내가 쓴 소설을 읽다 말고 문뜩 창 밖을 쳐다보았다. 길 건너편에는 아마도 나처럼 아이를 내려주고 차에 남아 -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ㅋ - 운전자가 있었다. 처음에는 직관적으로 그 사람도 나와 같은 누군가의 엄마라고 생각했다. 회색 후디를 입은 풍채 좋은 남미 계열 얼굴이었고, 자동차 창문 너머로 살집이 두툼한 팔뚝이 보였다.


근데 그 사람의 손에는 핸드폰인지, 볼펜인지 정체불명의 막대기가 쥐어져 있었다. 은빛으로 반짝 거리는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져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 자세히 쳐다보는데 이제는 낡아버린 내 두 눈 덕분에 도무지 무엇인지 알수 가 없었다. 그 와중에 그 이가 물건을 손에 잡고 자신의 턱 주변을 아래에서 위로 문질러댄다.


손에 쥐고 있는 것, 그리고 그걸 들고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일상에 이렇게 쉽게 금을 낼 수 있다니....라는 깨달음이 오는 동시에 내가 여자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성별이 불분명한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꽃을 두르지 않고 머리를 뒤로 묶어낸 프리다 칼로 느낌이라고 해야 하려나? 이마에서 코, 턱으로 내려오는 옆선이 투박해졌다. 팔뚝도 그냥 두툼한 게 아니라 뭔가 다부져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인지 그인지, 여하튼 그 사람은 은색 막대기를 턱에 문지르는 그 행동을 꽤 오래간 반복 했고 나는 그 물건이 설마 휴대용 면도기인가 생각하며 유심히 쳐다보았다.


참으로 신기하지, 소리 내어 말은 걸은 것도 아니고 손을 뻗어 어깨를 덥석 잡은 것도 아닌데 사람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사람의 시선을 감지해 낼 수 있다. 아주 가까운 거리가 아닐지라도 말이지. 그 사람은 뚫어져라 쳐다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자신을 방어했다. 낯선 위협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탐색하는 경계심 많은 동물처럼. 나는 주차해 놓은 자리에서 나가려는 듯 뒤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아무렇지 않게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주택가를 빠져나와 눈앞에 길게 뻗은 큰길을 운전하며 집으로 돌아가는데 기분이 묘했다. 그 사람은 여자였을까, 남자였을까. 그 물건을 핸드폰이었을까, 펜이었을까, 아니면 면도기였을까. 알 수 없는 의문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또렷함보다는 흐릿함에 가까운 내 시력 덕분에 일상이 소설 속 한 장면이 되어버렸다. 그래, 내가 마주하는 현실이 한 편의 소설이고 내가 쓰는 소설이 또 다른 현실이지. 멈춰 선 눈덩이를 다시 굴려볼 힘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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