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의 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서련 Sep 07. 2024

산출형 인간

미국 공립학교에서 교사가 되기 위해서 패스해야 하는 자격시험이 있다. 요즘 교사 인력이 많이 부족한지 지난 6월까지 등록을 할 경우에는 모든 교사 시험 등록비가 면제되었다! 공짜를 좋아하는 나는 ㅋㅋㅋ 시험을 망친들 잃을 게 없으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내가 치를만한 시험들은 모두 등록해 두었다.


그중 하나가 일주일 전에 치르고 온 CSET Korean 1 한국어 시험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수험생처럼 책상과 의자에 찰싹 붙어 앉아 준비하고 싶었지만 새 학기 적응하는 애 둘 엄마에게 그런 여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인터넷을 둘러보며 대강 자음동화, 모음동화, 구개음화 정도 눈으로 후루룩 훑고 시험을 치르러 갔다.


시험은 사지선다 20문항 단답 주관식 2개, 서술 주관식 2개로 나왔는데 마지막 서술형에서 시험을 완전 말아먹고 왔다! 첫 번째 문제는 대화 참여자의 특성에 따른 발화 양식 비교하는 거랑, 다른 하나는 역사 언어학에 대한 서술이었는데 시간이 많았다면 어떻게든 쥐어짜 내서 답을 쓸 수 있는 문제였다. 시간의 제약이 실패의 가장 큰 요인이었지만 답안을 적어가면서 나는 처절하게 깨달았다.


내가 나의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그것을 나의 밖으로 산출해내지 못한다는 것을.....ㅜㅠ


대학교 때 리포트라던지, 서술형 답안을 쓰는 게 이렇게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술술술 작업을 할 때 묘한 쾌감마저 있었다. 머리 창고에서부터 생각의 타래들이 어느 정도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고 같은 결로 내려오는 가닥들을 풀어내며 컴퓨터 자판이든 종이 위든 손가락으로 기록을 하면 됐고, 교수님이든 팀원들에게 받는 평가도 나쁘지 않았었다.


하지만 2024년 현재, 미국살이 17년 차 아줌마의 머릿속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완전 뒤죽박죽이다. 한국어 시험뿐만 아니라 당장 집으로 가면 애들 밥 뭐 해먹일지, 장은 봤었던가? 이번 주말에 첫째 축구 스케줄 있었던가, 둘째 짐내스틱 개강일은 언제던가, 클래스룸 펀드 내라고 했는데 아까 보냈던가? 그 와중에 애들이랑 반복해서 들었던 Sing OST가 배경 음악으로 지나간다. 답안이 될만한 알맞은 생각 뭉텅이를 겨우 발견했는데, 이것을 시험에 어울리는 적확한 단어로 끄집어내는 작업을 못해서 초조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종이에 연필로 개발새발 흘려가면서 마지막에 종이를 스캔해서 제출할 때의 낭패감이란.......


비단 글자로 적는 것뿐 아니라, 이번 여름에 한국을 다녀오면서 나는 정말 산출형 인간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MBTI가 나름 ENFP인데 과연 내가 여전히 E일까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예중 동창들을 만났는데 -- 육아로 인해 옛날보다 체력이 딸린다고 하지만 여전히 활기 넘쳐흐르는 -- 친구들 사이에서 좀처럼 대화에 낄 수가 없었다. 마치 올림픽 탁구 경기의 공처럼 대화는 빠르고 가볍게 주거니 받거니 이어졌다. 나도 모르는 새에 주제가 변하기도 했고, 친구들은 무용과답게 일반인보다는 큰 제스처까지 동반하여 반응을 보이고 대답을 하고 질문을 하고 생동감 넘치는 공연을 펼쳤다. 나는 관객처럼 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무용과가 아니더라도 서너 명 이상이 만나는 모임에 나가면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이번주 다글다글 독서모임을 위해서는 벵하민 라바투트의 소설 "매니악"을 읽었다. 우리가 사는 이곳에 실존했던, 그리고 우리 사는 이 세상을 다르게 감각했던 3명의 천재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3명 중에는 인공지능과 바둑 대결을 펼친 이세돌도 포함되어 있다.) 그 이들도 나도 눈코입이 달렸고 숨을 쉬고 먹고 마시고 싸는 똑같은 인간이건만, 그들의 아웃풋은 시대를 가르는 영향력을 펼치고 나의 아웃풋은.... 몸 밖으로 만들어지는 것조차 버벅거린다는 간극이 너무나 아찔하다. "도둑맞은 집중력"에서 경고하듯, 우리 동네에 있는 온갖 회사들 유튜브, 인스타, 넷플릭스, 구글에서부터 태평양 건너 네이버 웹툰, 이 글을 쓰는 브런치까지 내게 들어오는 인풋은 걷잡을 수 없이 많다는 사실도 나를 짓눌러온다.  


근데 이제 와 뭘 어쩌겠는가. 애들이 아침밥 먹고 남긴 밥에 김이나 싸 먹으면서 살아내야지! 20년 가까운 시간동안 이렇게 변했듯이 또 다른 20년동안 다른 방향으로 변화하기를 기대해본다. 이 때 인공지능을 잘못 써먹으면 지금보다 더 바보가 되어있을 듯;;;;

매거진의 이전글 다닥다닥 서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