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동화 속의 벽장문
단지의 설계컨셉을 그림보다 먼저 말로 설명하며 이걸 좀 더 쉽게 논의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했다. 기우였다. 가칭 ‘생명단지 건립추진위’에 참여한 회원들은 이미 그 찬란한 결과를 위해 자료를 모으고 틈나는 대로 공부하며 그렇게 충분히 건축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대책 없이 순수한 열정은 목표에 다다르기 전에 깨지고 망가지겠지만 끝까지 완주하는 서로의 힘이 될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하는 회의가 기다려졌다.
“함께 돌아본 현장은 급하거나 완만한 경사의 야산입니다. 물론 장애인을 위한 시설도 있어야겠지만 기본적으로 현재의 경사면과 능선, 흙의 반출을 최소화하는 계획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
“사용자의 생명과 터의 생명이 함께하는 컨셉을 기본으로 하겠습니다. 인위적인 절토와 성토를 지양하고 다소 공사기간이 더 걸리더라도 이곳 야산이 오랫동안 갖고 있었던 성향을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가능한 모든 에너지는 현장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계획하겠습니다. 지열과 태양광, 그리고 펠렛을 이용한 나무 보일러도 적극 고민하겠습니다. 제로에너지, 친환경 단지 만들기를 기본목표로 잡을 것입니다.“
모든 건축물의 첫 스케치는 무조건 현장에서 시작된다. 그 규모와 용도와 관계없이 현장에서 보는 아침과 저녁의 석양, 무엇보다 오래도록 걸어 다리가 아플 때쯤이면 알게 된다. 이렇게 야산으로 이루어진 현장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등고선과 주변현황이 그려진 측량도서가 있긴 하지만 두 발로 걸으면서 파악하는 현장과는 사뭇 다르다. 그렇게 몇 번을 오르내리면 관계자들과의 컨셉회의가 비로소 손에 잡히게 된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논밭을 계획했던 위치와 물을 끌어모으려던 저장고, 그곳으로 걸어가던 능선의 폭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스케치 안의 아랫부분 회색으로 칠해진 곳이 부지 조성 작업이 일단락된 전원주택 단지이다. 6미터 개설도로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 연두색으로 표시된 곳이 농민회의 생면단지가 조성될 곳이다. 야산 하나를 농민회로 소유권을 이전했다. 물론 꽤 경사가 심한 야산이긴 하나 주택단지와의 관계는 좋아 보였다. 주택단지의 입주민 입장에서 보면 대규모의 관광객이 몰릴 시설이 아니고 언제나 산책하듯 시설을 경험할 수 있어 보인다. 농민회의 생명단지 입장에서도 그건 마찬가지다. 아무리 도심지와 접근성이 좋아도 황량한 산지에 덩그러니 놓인 시설들 보다는 사람들 두런거리는 주택단지 옆이 좋아 보인다.
생명단지가 들어설 지형은 우선 북향이다. 남쪽으로 등고선이 높아지고 좌우 부지의 가운데는 움푹 들어간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다. 높아진 등고선은 부지의 지점에서 다시 내려가기 시작한다. 부지의 어느 지점에 서면 부지를 가로지르는 골짜기 부분이 한눈에 들어오고 또 어느 지점에 서면 진입도로를 포함해서 부지 전체가 조망된다.
배치의 몇 가지 원칙이 결정되었다. 북향을 극복하기 위한 세부 시설들의 배치였다. 모든 시설들을 남향으로 배치할 필요는 없다. 모든 남향 배치가 정답은 아니듯이. 낮시간에 주로 사용되는 시설들과 그렇지 않은 시설들의 활동 시간을 계산해서 적정 일조를 확보해야 한다. 교육관, 에너지관, 숙소동이 모두 서로 다른 활동시간을 갖고 있는 건 다행이었다. 계절풍, 바람의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 특히 부지를 가로지르는 골짜기는 바람에 대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조망권과 지형의 높낮이도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이다.
스케치 안의 오른쪽이 주출입구 자리이다. 주차장과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이 배치되고 등고선을 따라 가장 먼저 교육관이 들어선다. 교육관의 옥상이나 테라스에 나오면 골짜기에 형성된 논, 밭 등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지점이 교육관의 외부 휴게공간이 된다. 에너지관은 그곳에 들어설 각종 시설들을 고려해서 서로 다른 크기의 공간들이 모여 하나의 건물이 될 수 있도록 했고 지형의 등고선을 그대로 유지했다. 어느 부분은 밖으로 드러난 지하층이 되기도 하고 어느 곳은 천청을 통해 가장 깊숙한 곳까지 햇살이 들어올 것이다.
이제 능선을 따라 부지의 왼편으로 걸어가 보자. 숙소동은 능선의 반대편, 부지의 남쪽을 활용했다. 부지의 남쪽으로는 오직 산뿐이었다. 숙소동의 침실 조망이 결정되었다. 숙소동을 나와 야생으로 가꿔진 조경을 지나면 처음 모였던 광장에 도착한다. 중간중간에 단지를 관리하는 사택과 전망대, 일부 체육시설들도 자리를 잡았다. 최종 결과물은 많이 달라졌지만 굵직한 배치의 원칙은 그대로이다.
건축가의 상상은 보행자의 동선에서 시작한다.
단독주택을 설계할 때나 이런 야산 하나를 디자인하는 경우 모두 마찬가지다. 도시인의 퇴근길, 원룸 오피스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침대에 쓰러지는 그 짧은 동선을 디자인하는 동안 창문의 크기와 샤워기의 위치가 결정된다. 국립미술관의 홀에 쏟아져 내리는 햇살은 또 어떤가. 기획전시실로 향하는 산책로와 외벽을 장식한 붉은 벽돌 하나하나 모든 디자인은 그렇게 공간을 걸으며 시작한다. 차를 세우고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오는 동선은 얼마나 편리하고 얼마나 효율적인가로 설계의 점수가 매겨진다. 하지만 보행자의 동선에는 그보다 다른 점이 있다. 건물의 가슴으로 빨려 들어가 몸을 기대는 평화로움이 있다.
당신의 인생에 무엇이 꼭 필요한가요?라는 질문에 내가 서슴없이 ‘걷는 자유’라고 답하는 이유이다. 이제 천천히 생명단지의 초입부터 걸어보자.
생명단지의 작은 광장에서 처음 만나는 건물은 ‘교육관’이다.
서울뿐 아니라 전국에서 달려온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처음 마주하는 건물이다. 생명단지의 첫인상이었다. ‘교육관의 강당에 모인 사람들은 무슨 강의를 듣고 또 무엇을 얻어갈 것인가’를 고민했다. 교육관인 건물에서 강당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 맞는지를 줄곧 고민했다. 교육관이 들어설 부지를 아침저녁으로 걸었다. 교육관의 주인공은 강당이 아니라 강당문을 열고 나오면 펼쳐질 잔디 옥상이었다. 교육관으로 걸어 올라가는 폭넓은 외부 계단과 함께 논과 밭이 한눈에 들어오는 그 옥상이 주인공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단지로 걸어 들어가면 폭 30여 미터 가량의 계단이 눈에 들어온다. 계단은 그대로 주차장 앞 작은 광장을 향해 관람석이 되고 견학하기 전 안내의 장소가 된다. 계단을 오르면 교육관의 출입문이고 올라왔던 계단실 하부는 교육관의 강당이다. 등고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이제 강당밖으로 나오면 1층 사무실의 지붕, 옥상이다. 강당에서 들었던 생명단지의 논밭이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
다음코스인 에너지관으로 가는 길은 굳이 1층으로 내려갈 필요는 없다. 강당에서 오르막길을 따라가면 그곳이다.
모든 보행자 동선은 야산의 등고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숨을 몰아쉬게 배치되었다. 헐떡거리는 숨소리마저 이곳에선 유쾌하다.
에너지관은 방금 전 교육관에 비해 좀 더 내부공간에 무게를 두었다. 종자를 보관하고 친환경에너지, 농법등에 대한 적극적인 전시공간이다. 가능하면 외부환경에 대해 안전해야 하고 또 외부의 햇빛과 바람도 자연스럽게 내부공간과 자연스럽게 어울려야 한다.
교육관을 나오면 멀찍이 에너지관이 보인다. 에너지관 맨 끝에 오르면 계곡처럼 움푹 파인 골짜기에 논과 밭이 있다. 그렇게 하나하나 계획안은 완성되어 갔다.
그림에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계단실을 중심으로 에너지관의 공간들은 반층의 계단 (스킵플로어)으로 각각 다른 레벨을 가지고 배치되어 있다. 부지의 등고선을 따른 자연스러운 배치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에너지관의 각 공간이 갖는 그만의 특별한 공간에 대한 배려가 필요했다. 모든 공간이 한 평면에 놓이는 배치는 땅을 오래 바라보지 못한 결과에 다름 아니다. 무려 4가지의 서로 다른 높낮이가 형성되었다. 공사비를 생각하면 비효율적인 구성이다. 하지만 생명단지라는 단어를 입속에서 한번 중얼거리고 나면 당연한 배치였다. 교육관에서 나온 사람들은 어느덧 에너지관 안으로 들어와 있고 사람들은 레벨이 다른 각공간으로 흩어져 있다. 그들은 모두 계단실 천창에서 쏟아져내리는 햇살을 함께 느끼고 또 바람을 함께 느낄 것이다. 에너지관은 계단실이 주인이다.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방문객을 위한 숙소였다. 교육관, 에너지관, 종자관, 논밭 등등 농민운동과 생명공동체 운동에 대한 실천공간을 계획하는 일도 중요했지만 어느 정도 계획안이 그려지면서 숙소동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이곳 생명단지에서 저녁과 밤, 다시 아침을 맞이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누구든 이곳 생명단지에서 하루를 보내고, 깊게 심호흡을 하며 걷는 아침 산책이 행복하길 바랐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건물보다는 오로지 이곳 산등성이에 가만히 묻혀 있는 그런 숙소를 생각했다. 처음 현장을 방문했을 때 능선을 따라 걸었던 오솔길부터 시작했다. 그 능선 오솔길의 좌우로 다소 급한 경사의 산허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논의했다. 그 정도의 경사라면 당연히 정지작업을 한 후 평지에 건물을 세우는 방법이 적당해 보였다. 하지만 우리가 계획한 방법은 능선 좌우에 출입문만 설치하고 숙소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방식을 택했다.
오솔길을 따라 1층의 출입 공간을 최소화하고 숙소는 지하에 구성했다. 물론 숙소의 전면은 생명단지 전체의 조망이 가능했고 생명단지의 주동선에서 숙소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스케치의 왼쪽 그림이 길에서 만나는 숙소동의 1층 평면이다. 아파트 경비실 만한 크기의 매스가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저 문을 열고 계단실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비로소 거실과 방이 마련된 숙소가 나타난다. 교육관부터 쉬지 않고 오르막길을 걸었다. 이곳 숙소의 거실에 서면 눈아래 숲이 보인다. 오직 숲만 보인다. 해가 지고 별이 뜨면 적막이 친구가 될듯하다. 숙소동은 하루종일 생명단지를 걸어온 발과 마음과 머리를 다독여줄 것이다. 숙소동이 그곳에 있는 이유는 그 다독거림 때문이다.
스케치업으로 올려서 확인해 본 숙소동의 1층 출입문은 마치 동화 속의 벽장문처럼 보였다.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순식간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광주 퇴촌의 야산 하나가 도면 위에서 점점 색이 입혀지고 그곳에선 어느덧 방문객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도 없이 시물레이션을 했고 예상 질문까지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농민운동과 생명공동체 운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도 문제 되지 않았다.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은 풀과 나무와 논밭이 안내하는 동선을 따라 걸을 것이다. 그렇게 걷다 보면 알 수 있으리라. 이곳에서 지낸 하루를 통해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흙과 풀과 나무와 함께 하는 것. 그 평화로움을. 생명공동체라는 거대담론의 작은 시작이었다.
브리핑의 첫 장면은 볼품없는 야산 그대로의 모습부터 시작했다. ‘생명 공동체’라는 다소 추상적인 농민회의 이념이 구체적인 건축의 모습으로 야산을 채워나갔다. 교육관을 지나 에너지관의 홀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종자도서관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숙소동에 이르러 거실 데크에 서자 생명단지의 석양이 한가득 눈에 들어왔다. 브리핑하면서 스스로 목소리가 격앙됨을 느낀 순간이었다. 강당에 모인 사람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시간을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보냈고 또 얼마나 많이 싸웠는가. 이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한 자료들은 또 얼마나 많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겠는가.
다른 농민회 관계자들은 종자도서관에 큰 관심을 보였고 어떤 이들은 숙소동을 생명단지의 수익모델로 만들자고도 했다. 논 밭의 수확을 위해서 상주인원을 어떻게 배치할지 궁금해했고 초등학교와 연계해서 세상의 중심이 되는 농업이야기를 들려주자고 했다.
농업 관련 소식을 다루는 전문지의 기자는 맨 앞자리에서 꼼꼼히 메모했다. 서울근교의 ‘생명단지’가 시민들에게 많은 역할을 해줄 것이라며 농업계 연수시설의 모범이 되길 기대한다고 마이크를 잡았다.
그날 모인 사람들은 이미 교육관의 계단을 올라 강당의 옥상 테라스에 모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