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 명분만 앞선 모래성
얼마 전 생명단지를 계획할 당시 농민회를 이끌었던 회장과의 저녁자리였다. 생명단지의 일이 결국 실패로 결론 져진 이후 회장은 정부 주요 직책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 후로도 간혹 안부를 물으며 지냈다.
막걸리가 두어 잔 도는 동안 개인의 건강과 터널에 갇힌 세상의 답답함에 대해 가벼운 이야기가 이어졌다.
" 윤건축사한테는 내가 늘 마음의 빚이 있지요."
이미 지나간 이야기에 대해 그런 두서없는 고백이라니. 순간 나는 움찔했다. 때로 문장에 담기지 않는 진심이 있다. 목소리는 건조했고 옆자리였다면 툭툭 어깨를 치며 그 시절 서로가 참 고생 많았다며 위로의 몸짓이 뒤따를 순서였다. 진심이 담긴 고백이라기보다는 저녁 술자리를 끌고 가는 가벼운 소재로 느껴졌다. 최소한 내게는 그랬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 광화문의 겨울 밤거리는 유독 차가웠다.
동행한 지인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윤소장님! 그럼 그동안 제대로 된 설계비는 고사하고 계약금도 못 받고 일을 하셨다고요?”
“저 사람들도 문제지만 소장님도 참 문제시네요. 재능기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계약서가 있는데도 정부예산을 받지 못해 비용을 지급하지 못했다는 변명이 말이 되는 소린가요?”
아마 그날이었을 것이다. 대체 무엇이 그 시절의 열정을 실패로 결론짓게 하였는지 그 실패를 기록해야겠다 생각했다.
못 받은 설계비에 대해서 소송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팀원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소장님도 고생하셨지만 저희들도 너무 기분 안 좋습니다. 솔직히 이런 매너는 아닌 거죠. 이미 납품확인서도 받아 놨는데 그동안 고생한 거에 대해 최소한의 보상은 받아야죠. 우리 잘못은 아니잖아요." 당연한 이야기였다. 탁자 위 복사지와 함께 숱하게 새벽을 맞이했다. 아침 바람을 가장 먼저 맞이하던 시간들은 행복했다. 팀원들 모두 매일매일 새로운 설계 콘셉트를 내보이며 싸웠다. 그 싸움은 얼마나 유쾌했었던가. 그 싸움 뒤에 마시던 술 한잔은 또 얼마나 달았던가.
이 사태에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잠정적으로 생명단지 사업이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느껴졌던 날이었다. 실무자인 사무국장과 늦도록 술을 마셨다. 생명단지 얘기는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다. 불편한 이야기였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앞으로 벌어질 일보다 그날은 서로에 대한 배려로 마무리했다. 당신은 얼마나 힘들었겠냐는 가식적인 다독거림으로 술을 마셨다.
헤어질 무렵 소송 얘기를 꺼낸 건 나였다. 그것도 아주 조심스럽게. 나중에 본격적인 변호사 상담을 받게 되었을 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변호사는 말했다. 조용히 진행해도 될까 말까 한 일을 그렇게 떠들고 알려줘서야 되겠냐고. 거리는 추웠다. 지금 당장 비용지급을 받을 수는 없더라도 우선 토지에 가압류라도 해둬야겠다고 말했다. 단단히 마음먹고 사무국장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토지에 대한 가압류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때다. 계약당사자인 농민회 법인과 토지 소유권을 가지고 있던 농민회의 농업법인은 서로 다른 법인이었다. 결국 계약당사자 말고 엉뚱한 사람의 땅에게 가압류하자고 달려든 셈이었다. 그날 실무자인 사무국장이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도 않고 또 알 수도 없는 일이었다. 분명 나의 이런 결정과 행동을 농민회 집행부 모두 보고 받았겠지만 그중 누구 한 명 연락이 오지 않았다. 참담했다. 이런 사람들과 일을 도모했구나.
“선배! 정말 괜찮겠어요?”
“돈이 나올 것 같지도 않고 이러다가 선배 인맥의 한쪽을 잃어버리는 거 아닌가 해서요. 누가 소송을 했다더라 소문 나봐야 그 양반들이 다치기야 하겠어요? 선배만 이상한 사람 되는 거 아닌가 해서요.”
하지만 이건 나 한 명의 문제는 아니었다. 유쾌한 싸움을 밤새 이어가던 팀원들에게 그 지나간 기억이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나에게도.
“후배님! 걱정 마! 이건 소송이 아니고 다짐이야. 잃어버려야 얻는 다짐.”
2015년부터 2018년까지 4년 동안 매년 정부예산을 신청했다. 그리고 매년 선정에서 제외되었다.
물론 이 결과가 나의 몫은 아니었다. 이미 마스터플랜은 완성되었고 그다음은 그들의 몫이었다. 중앙정부와 경기도(광주시), 사업주체가 1/3씩 사업비를 마련하는 경우였다. 사업주체는 이 부분을 토지로 대신하는 구조이니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세종 정부청사를 방문해서 관계자를 미팅할 때는 마스터플랜 풀세트와 요약본, 심지어 A4 용지 한 장으로 그 방대한 자료를 축약하기도 했다.
난 지금도 예산을 확보하지 못한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물론 이런 방대한 사업의 복잡한 역학관계를 알 수 없으니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도 알 수가 없다.
농민회 관계자들에게 계획안의 브리핑이 끝나고 곧장 예산확보를 위한 절차에 들어갔다. 실무자인 사무국장은 이미 정부의 담당부처, 지자체 등에서 긍정 답변을 얻었다며 자신만만 한 표정이었다. 이만큼 확실하게 명분 있는 사업이 어디 있냐며 벌써부터 건축 인허가 일정을 챙길 정도였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밖이었다. 지역 국회의원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결과라며 분개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뭔가 취약점을 찾아서 보완하면 일 년 후의 예산확보는 가능하다고, 아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연거푸 두 번의 예산확보에 실패하고 뭔가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논의할 때였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면서 회의실의 이상한 기류를 느낀 것은 나 혼자뿐이었을까. 야산의 능선을 휘돌던 농민회 회장 목소리는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다. 1년여 밖에 남지 않은 회장의 임기가 이상한 기류의 한몫을 했다. 소극적인 입장으로 바뀐 것은 그 때문이었다. 될지 안 될지 모를 사업을 추진하면서 임기 안에 마무리되지도 않겠지만 어쩌면 사업이 추진되지 않는 책임을 온전히 짊어져야 하는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부와 불편한 관계를 만들 이유가 없었다. 예산확보를 해서 사업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이고 안된다고 해서 무슨 책임이 있는 건 아닌 일이다. 나를 따르라며 앞에 나설 이유가 없었다.
실무자인 사무국장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굳이 내게 말할 이유 역시 없었다. 두 번 세 번 네 번 조바심 속에서 나는 새롭게 자료를 준비했다.
그 길고 긴 마라톤 코스를 실패로 완주하고 결승선에는 나 혼자 덩그러니 서 있었다. 회장도 사무국장도 그 자리에는 없었다. 박수를 보내던 관람석의 관중도 함께 출발선에 섰던 그 누구도 결승선에 없었다. 가칭 ‘생명단지 건립 추진위’의 회장과 핵심 멤버들은 마라톤이 끝나기 전에 이미 정부의 중요직책과 서울시의 특채로 자리를 옮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모든 상황들이 생명단지의 추진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트랙의 그 빈자리에는 세상에 나오지 못한 도면들만 대신 뒹굴었다.
실패에 이르게 된 농민회 내부의 원인도 있었다. 호기롭게 예산신청을 하던 그즈음 개발업자의 달콤한 제안은 생명단지를 위한 큰 그림처럼 여겨졌다. 개발업자가 진행하다 지지부진해졌던 주택단지의 분양이었다. 물론 생명단지가 들어선다는 소문 덕택에 인근 주택단지가 들썩거리던 때였다.
“00 농민회 분들이라면 분양가의 절반 가격으로 해드리겠습니다. 나중에 생명단지 들어서면 2배는 더 뛸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고생하시는데 저희들이 이 정도는 해드려야죠.”
당시 꽤 많은 농민회 사람들이 함께 땅을 매입하고 실제로 공동체 마을을 꿈꿨다. 결국 이런 사실이 땅을 매입하지 않은 사람들과 드러나지 않는 불신이 쌓이게 된 이유였다. 생명단지를 바라보는 내부의 시선들은 그렇게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농민회 내부에서도 '이 사업이 되겠어? 굳이 이 사업을 해야 해?' 하는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생명단지를 추진했던 회장과 관계자들이 귀를 막고 일을 추진하고 있었던 점이다. 듣기 싫은 얘기에 귀를 막았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단지 앞에 전원주택 단지가 있는데 거기 농민회 관계자들 다수가 토지를 갖고 있다더라는 둥 생명단지가 조성되면 누구누구가 그걸 맡아서 평생직장이 된다는 둥 한심하기 그지없는 소문이 돌았지만 아무도 그 소문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생명단지 사업은 농민회 모두가 아닌 일부가 원하는 사업으로 전락했다. 그렇게 모두가 원하던 명분은 각자의 명분 속에서 천천히 사라졌다.
생각해 보면 내가 두려웠던 것은 못 받게 된 설계비가 아니었다. 매년 정부예산과의 싸움에서 이들이 지쳐 떨어지는 건 아닌지. 그렇게 이 모든 일이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 저녁 술 한잔으로 사라지지는 않을지 그 점이 두려웠다.
계약서대로 비용을 지급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4년이나 ‘생명단지 건립추진위’의 일을 계속 도왔다. 그동안 대한민국의 자본시장에서 건축가로 살아오며 수도 없는 경험을 해왔다. 자본의 지배 아래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구조에서도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멈춘 적은 없었다. ‘나는 건축과 함께 성장하고 있는가’ 도서관의 책장과 광장의 최루탄 사이에서 위태롭게 한 시대를 지낸 우리는 항상 같은 질문을 했다. ‘우리는 지금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생명단지는 그동안 건축을 통해 고군분투해 온 그 모든 질문의 과정이 결코 헛수고가 아니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는 일이었다. 내가 세상을 대하는 신의에 관한 일이었다. 생명단지의 설계, 그 일은 그렇게 내게 간절했다.
하지만 어느 사업에서건 설계는 어느 순간 뒷전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는 구조임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 사실을 목도하기 두려웠다. 심지어 설계비 등 돈얘기가 사업의 걸림돌이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으니 참으로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오죽했으면 동료들은 ‘납품확인서’라는 제목으로 확인 도장까지 받아놨을까.
무엇보다 농민회의 그 누구도 이 사업에 목숨 걸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만큼 절박하지도 않았으며 명분이 앞선 사업은 언제나 모래성 같았다. 누군가 그 명분에 흠집을 내면 신기루를 쫓아가듯 몇 달이고 시간을 허비했다. 그뿐이겠는가. 경기도 예산을 신청할지 광주시 예산을 신청할지도 그들에겐 또 다른 명분이 필요해 보였다. 그렇다고 어느 날 ‘이제 이 사업은 접읍시다’ 결정한 일도 없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면이 있다. 대전 유성 어디쯤이었다. 농민회의 신임 회장이 취임하고 농민회의 향후 사업에 대한 발제가 있던 그런 날로 기억된다. 생명단지 사업의 실무를 책임지던 사무국장은 꼭 같이 가야 한다며 수시로 확인 전화를 했다. 유성의 유스호스텔 입구에는 신임회장의 취임 축하 플랜카드가 펄럭였다. 그나마 아는 얼굴이 악수를 건네며 자리를 안내했다. 행사가 끝날 때까지 생명단지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되지 않았다. 경기도 광주의 농림지역 산 하나를 농민회가 소유하게 되었고 그 땅을 활용해서 농민회의 어떤 사업을 진행할 수 있을 거라는 얘기 정도였다. 그 누구도 건축가의 존재를 몰랐고 관심이 없었다. 내게 악수를 건네는 신임회장의 표정은 불편함이 역력했다. 마무리되지 않은 사업을 이관받았으나 관심 밖의 일이었을 것이다. 많은 자리에 참석해 봤지만 그날 그 자리의 자괴감은 다시없을 기분이었다. 함께 간 사무국장은 생명단지 사업을 잘 마무리해보자며 건축사를 새로운 집행부에 소개했다. 그 저녁. 누구도 그 인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관계자들 모두가 한 방향을 바라보고 달려가기 위해선 각자의 역할과 의무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들은 정부예산이 집행되기 전에 초기 자금을 반드시 구해서 집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건축가 역시 제대로 된 설계비를 받고 단지계획안뿐 아니라 이 사업의 메커니즘에 깊숙이 관여해야 했다. 그랬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매번 국회 예산을 받기 위한 최종 리스트에서 제외되었다면 분명 그럴 이유가 있는 것이다. 진보 정권이 여당이고 농민회의 존재가 나름 그들에게 힘이 되었다고 해도 이건 돈이 오가는 사업이다. ‘이 사업을 반드시 해야겠다’는 절박함을 갖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서로가 든든한 연대로 어깨 걸고 걸어갔다면 분명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사업을 쪼개서 교육관이든 논밭이든 최소 사업비가 투입되는 쪽으로도 검토했을 것이고 숙소동은 맨 나중으로 사업을 수정했을 수도 있었겠다. 그렇게 4년이라면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명분에 기댄 사업은 개인의 욕망과 처세 앞에서 맥없이 무너졌다. 그 누구도 한 방향을 함께 바라보며 길고 힘든 마라톤의 결승선까지 달려가지 못했다.
그날 광화문 사거리에서 기막히다는 표정을 짓던 지인은 한마디 덧붙였다.
“설마 이 이야기의 끝이 실패의 기록이겠어요?”
이 회고가 실패의 기록일리 없다. 최선을 다해 달려온 누군가의 결승선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선이다. 건축가로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달려가고 있는 마라톤의 한 이정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