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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단지: 자연과 하나 되다 [1편]

by 윤우영




1편: “야산을 놀리면 뭐 합니까?”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다


암막 커튼이 젖혀지고 어두웠던 실내는 박수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환해졌다. 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겨울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고 브리핑 파일에 갇혀있던 평면들도 햇살과 함께 실내를 가득 메웠다. 브리핑실 맨뒤에 서서 마음 졸이며 지켜보던 낯익은 얼굴들과 맨 앞자리에 앉아 바라보던 호기심 어린 표정들 모두 그 순간은 햇살처럼 환한 얼굴이었다.


1년간 준비한 생명단지 계획안이 드디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시간이었다.

같은 목적을 갖고 활동하고 있는 여타 농민회, 농업신문 기자들과 모든 관계자들이 모였다. 브리핑을 마치고 인사를 하던 그 순간,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환하게 웃던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다.


00 농민회는 예나 지금이나 올바른 방향으로 시대를 이끌어 간다고 자부하는 단단한 조직 중 하나였다. 1966년 농민운동 단체로 창립된 이래 90년대 초반까지 사회민주화와 농업, 농촌, 농민의 권익보호를 위해 쉼 없이 달려왔으며 그 후 지금까지 생명농업 실현과 도농공동체 건설을 위해 여전히 분명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곳에서 추진하는 일이라면 그 계획안의 이름이 생명단지라는 거창한 이름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수십 년간의 활동을 정리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기 위한 프로젝트였다. 농민회의 이념뿐 아니라 다음세대에게 보여줄 세상을 축약해서 건립해보고자 했다.


단 1분도 고민하지 않았다.


이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건립계획에 대한 미팅을 갖고 설계계약을 할 때까지 숱하게 세웠던 밤들과 스케치의 시간들은 힘들지 않았다. 모두가 잠든 매일밤이 빛나는 시간이었다.

8,9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들에게 그 시절은 디테일한 미래의 삶을 준비하는 과정이 될 수는 없었다. 시대는 젊은이들에게 거리로 나서거나 도서관에 있거나, 둘 중 하나의 혹독한 선택을 강요했고 중년이 된 모두는 서로에게 표현하기 힘든 미안한 마음을 여전히 갖고 있다. 무엇이 옳은 선택이었는지 아무도 모른 채 강의실엔 동기들의 빈자리가 늘어갔다. 알 수 없는 그 미안함을 가슴 밑바닥에 꾹꾹 눌러 담은 채 말이다. 도서관으로 오르는 가파르고 숨찬 계단 위로 매일매일 최루탄이 터졌다. 더러 누군가는 괘념치 않은 채 도서관 자리를 지켰으며 또 누군가는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흐르는 물에 아린 눈을 씻었다. 도서관의 창문으로는 폭죽처럼 터지는 하얀 포말이 보였고 화장실 그 작은 창문으로는 하얀 대리석으로 치장한 도서관 입면이 한가득 들어왔다. 누가 누굴 탓할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채 나는 어설프게 양다리를 걸치고 서로 다른 낮과 밤을 보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건축설계 말고 다른 일을 두리번거리지 않았다. 그렇게 묵묵히 걸어왔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특히 건축설계라는 분야는 태생이 어쩔 수 없이 자본의 그늘 아래서 자랄 수 밖에는 없다. 거대자본이 들어가지 않는 건축이 어디 있겠는가. 어떤 일은 오직 대기업의 손익계산서를 위한 일개 소품에 지나지 않았으며 또 어떤 일은 수익률 10%의 가치 아래 사용자가 중심인 가치 따위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덮어 두기도 했다. 물론 그 안에서도 끊임없이 질문했다. 내가 선택한 이 일이 나와 함께 조금은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함께 성장하고 있는 것인지.


생명단지의 설계로 왠지 모를 그 마음의 빚을 덜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그동안 해온 건축설계가 허튼일이 아니었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할 수는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만큼 내게도 중요한 일이었다.


생명단지 터 마련, 그 묘수


처음 농민회 관계자를 만나 생명단지 사업구상을 들으며 궁금했다. ‘이 정도 규모의 토지를 갖고 있다고?’ 예나 지금이나 농민회의 자금사정이 넉넉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었으니 당연한 궁금증이었다. 농민회에서 이런 사업지를 갖게 된 데에는 드라마틱한 사연이 있었다.


당시 부동산 시장에는 서울 근교의 전원주택 단지가 돈이 된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역시 그 소문에 들썩거리며 하루가 멀다 하고 외지인이 드나들 때였다. 하지만 모든 주택단지가 성공적으로 분양이 되지는 않았다. 부푼 기대를 앉고 토지를 매입했으나 사업은 지지부진하고 개발을 위한 인허가 비용과 홍보 비용만 들어가기 일쑤였다. 당연히 빚을 내서 토지를 매입했으니 사업일정이 늦춰지면 금융비용으로 인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게 된다. 망하기 직전의 사업지가 속속 드러났다.


농민회와 관계된 누군가가 부동산업자에게 묘수를 하나 제안하게 되었다.

“아니 주택단지 뒤에 있는 야산을 놀리면 뭐 합니까? 그거 입주민들 산책로든 텃밭이든 만들어줘 봐야 분양하는데 도움이 되겠어요?”

“그럼 어쩝니까? 팔릴땅도 아니고 그렇다고 집을 지을 수 있는 땅도 아닌데요”

“농민회에 무상으로 소유권을 넘겨주는 겁니다. 조건은 그 땅에 농민회에서 주도하는 공공시설을 근사하게 짓는 조건으로요”


묘수이긴 했다. 주택단지 뒤 야산은 농림지, 임업용 산지 등으로 어치피 사업 이익을 남길 수 있는 땅은 아니었다. 부동산 개발업자 입장에서 곰곰이 생각하면 잘하면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농민회의 공공시설이 들어선다면 매스컴도 타면서 자연스럽게 인근 주택지의 광고도 될 것이고 무엇보다 주택단지를 분양받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구미 당기는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아이들에겐 농업에 대한 체험과 경험의 기회가 될 것이고 어른들에겐 주말농장을 넘어 기대 이상의 공간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었다. 그렇다고 농민회가 손해일리 없다. 부동산업자를 위해 무슨 큰일을 도모해 주는 것도 아니고 잘하면 오랜 숙원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다. 게다가 경기도 광주라면 일반인들의 접근성도 좋고 투자를 받기도 수월해 보였다. 양쪽의 기대가 맞아떨어지자 사업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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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있는 현장은 말 그대로 그냥 동네의 야산이었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서 나무와 흙이며 풀들은 가장 자유로운 모습으로 저마다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농민회 관계자들과 처음 현장을 방문했을 때 모두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아마 오기 전부터 온갖 아름다운 상상을 하고 있었으리라. 파란 잔디의 들판과 꽃들까지는 아니어도 길 잃은 등산로의 황량한 야산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현장답사에 심지어 샌들이라니.


하지만 현장을 내려다보는 능선에 선 회장의 열변에 모두의 얼굴에 홍조가 들었다. 농민회장의 인생은 당시 농민회의 역사이기도 했다. 70이 넘은 어른의 배에서 나오는 웅변은 현장 전체를 휘돌았다.

모두는 생각했으리라. 그동안 자신들이 해온 일들이 곧 눈앞에 나타나겠구나. 옳은 일을 하고 있었구나. 현장을 오르는 동안 농민회의 누군가는 벌써 인근 지역으로 이사 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또 누군가는 벌써 벼농사가 끝난 들판을 상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현장을 한 바퀴 돌아본 것뿐인데 처음 야산을 오르던 당혹감은 온데간데없었다. 또 누군가는 인근 주택단지를 분양받아 동호회처럼 모여 살자고 했으니 조심스럽게 뒤따라온 부동산업자는 내심 쾌재를 불렀으리라. 모두가 가진 저마다의 희망으로 야산은 푸르게 덮여갔다.

최소한 그날 오후는 그랬다.

다소 거창하게 보일지도 모르는 명분이 회의자료로 건네졌다. 야산에 펼쳐질 생명단지가 담아야 할 내용들이었다. 첫 미팅부터 만만치 않았다. 공간에 대한 요구조건이 명확한 다른 프로젝트와는 확연히 달랐다. 이런저런 공간이 몇 평 필요하고 공사비 얼마에 맞춰야 하고 향후 유지관리도 신경 써야 하고 등등 대부분 이미 실무진의 수첩에 빼곡히 메모된 설계조건이 있었을 테지만 이번일은 달랐다. 사업의 명분 쌓기부터 시작했다.


" 농민운동에서 생명공동체운동으로 새 운동을 전환한 지 20여 년. 그동안의 성과를 정리, 계승하고 향후 운동의 전망을 밝히는 데 있어 퇴촌 생명학교가 연구, 교육 및 실천공간으로의 역할을 담당하고자 함 "

"교육연구센터, 교육농장 등을 통해 농업의 가치에 대한 인식 확대 도모"

"토종종자의 구입, 보관, 재배, 보급을 위한 교육공간으로 활용"

"농법을 넘어 생활공간과 생활양식에서 에너지 자립 시도와 보급"

"생명평화를 위한 마을 만들기"


하기사 이런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회의가 이들에게는 그 어떤 실무적인 회의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다. 농민회를 이끌어 오면서 한 번도 그 일이 건축과 관계된다는, 심지어 건축을 통해 그 모든 일들이 엮어지고 눈앞에 펼쳐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회의가 구체적이고 실질적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회의가 거듭될수록 이 추상과 관념은 도면 위에 숫자로 표현될 것이다. 건축가가 해야 할 일이다.


벤치마킹 보다 한걸음 더


몇 번의 설계 미팅을 가진 후 농민회 관계자들과 설계팀은 강원도 인제로 출발했다. 그곳에는 [ 한국 DMZ 평화생명동산 ] 이란 이름으로 운영되는 단지가 있다. 10여 년의 준비 끝에 지난 2009년 개관했으며 지금까지 모범적으로 운영되는 손에 꼽히는 성공적인 사례로 알려졌다. ' 생명의 열쇠로 평화의 문을 열고, 평화의 들판에 통일의 집을 짓는다 ' 는 생명동산의 갈길과 할 일에 걸맞은 건축물이 조성되어 있다.


산의 능선을 따라 산책로를 내려오다 보면 숙소동의 지붕에 이른다. 건물이 산자락에 그대로 안겨져 있다. 잔디와 풀로 덮인 지붕의 끝에선 단층 건물의 외벽으로 코르텐강 (녹슨 철판)이 단단함을 넘어 당당하게 외벽을 감싸고 있다. 그 포근함과 당당함이 충격적이었다.

마치 하드커버의 두꺼운 책 한 권이 무릎 앞에 쿵 떨어진 느낌이었다. 저걸 어떻게 읽어야 하나 책을 펼치기도 두려운 그런 느낌이었다.


숙소동의 건물 복도를 따라 발목 높이에 가로로 길게 만들어진 창이 특별했다. 단층 건물의 층고를 서로 다르게 만들어서 중간중간 낸 천창도 특별했다. 하루종일 생명동산을 견학하고 저녁 어스름 이곳 숙소로 들어서는 상상을 했다. 조명 없이 발목에 비치는 저녁의 창가 노을이라면 그것만으로 내 걸음걸음을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될 듯했다. 건축가의 재치와 유머를 넘어 그 자신만만함이 느껴졌다.


그날밤 농민회 관계자들과 우리의 논의는 걱정과 희망으로 가득 찼다. [ 한국 DMZ 평화생명동산 ]은 농민회의 계획을 위해 배울 점이 많은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보다 한걸음 더 가보기로 했다. 생명동산은 훌륭한 단지였으나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견학과 교육은 숙소동과 교육동에서 분리되어 있었다. 우리는 배치계획 개념을 그날 다시 논의했다. 숙소동의 거실창을 나가면 논과 밭이 있고 교육동과 에너지관의 교육 동선도 내부와 외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변경과 변경을 거듭했다.


다음날 아침 마당에서 올라오는 향기와 풀잎에 반짝이던 햇살을 기억한다. 술 때문이었는지 회의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퉁퉁 부은 서로의 얼굴이 든든하게 다가왔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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