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미르, 여행과 일상의 경계

12th. '안탈리아'에서 '이즈미르'로

by 조르바와 춤을


한 사람에게 건넨 인사를 모두가 받고, 미소로 화답해 준다.
그들의 환한 미소가 순식간에 이 도시를 낯선 곳이 아닌 '머무를 만한 곳'으로 바꿔놓는다.
여행은 풍경이 아니라 사람의 얼굴로 기억된다는 사실을 이즈미르의 버스 안에서 다시 배운다.


1.

어젯밤 미리 짐을 싸놓고, 비행기 시간을 계산해 아침 조깅 시간을 확보했다. 아침식사는 공항 체크인 후 하기로 했다. 안탈리아에서 보내는 마지막 아침이라 그런지, 카리알리올루 공원의 길이 유난히 또렷하게 다가온다. 나무 한 그루, 벤치 하나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해안 쪽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차갑지 않고, 아침 빛은 지중해 바다 위에 잔잔하게 흔들린다.


길가의 소철과 만다린 잎이 반짝이는 모습이 싱그럽다. 이곳의 아침은 언제나 조용하고, 도시의 번잡함이 닿지 않는다. 이 평온한 공간이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이 도시에서 달리고 산책할 수 있었던 모든 아침이, 하나의 선물처럼 마음 속에 남는다.



카라알리올루 공원에서 바라본 안탈리아의 아침
공원 산책길과 칼레이치 골목길(영업을 준비하는 카페)


며칠 동안 이 도시의 생활에 익숙해진 덕에 공항까지 이동은 여유롭다. 탑승 수속을 마치고 대기석에 앉자, 오전의 고요한 빛이 통창 안으로 번진다. 캐리어를 끌고 이동하는 사람들 사이로, 안탈리아에서 지나온 순간들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지중해의 햇빛과 그림자가 번갈아 도시의 표정을 만들던 칼레이치. 오래된 시간의 골격만 남아 있었지만, 그 자체로 ‘영원’의 의미를 새기게 했던 페르게. 소금기 어린 바람과 파도, 해변의 평화가 깃든 콘얄티. 그리고 부겐빌레아 같던 J의 웃음. 반짝이던 장면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마음속에 조용히 가라앉는다.


J가 배낭에서 삶은 달걀을 꺼내 내민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다. 소박하기 그지없는 아침식사지만, 여유롭고 편안하다. 주스로 목을 축이고 있을 즈음, 천천히 계란을 씹던 J가 무심하게 말한다.


"아마 내가 외국에서 오래 못 산다면, 그건 두부가 없어서일 거야."


그 말에 웃음이 났다. 맞다. 한민족 음식의 근원은 콩이다. 된장, 간장, 고추장, 두부까지 모두 콩에서 비롯된다. J의 말에 나도 시큼 칼칼한 볶음김치를 얹은 부침두부가 떠오른다. 음식이 끌어내는 기억과 정서. 한 인간의 정체성 맨 아래에는 익숙한 음식이 자리하고 있다. 이즈미르 마트에 두부가 있으면 좋으련만.


이제 곧 비행기는 이즈미르로 향한다. 어떤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새로운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의 설렘이 작게 일렁인다.



공항행 기차를 타러 가는 시장 골목과 정류장 풍경


2.

비행기는 11시에 이륙해, 한 시간 남짓 날아 정오 무렵 이즈미르 아드난 메데레스 공항에 도착했다.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안탈리아와는 사뭇 다르다. 바다는 여전히 푸르렀지만, 더 짙고 단단한 색이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할 때, 도시 외곽에는 규칙적으로 배열된 올리브나무 밭과 붉은 지붕의 단정한 마을이 보인다. 아나톨리아 남쪽에서 에게해 입구로 들어선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이즈미르 해안


공항은 생각보다 현대적이다. 유리벽과 금속 프레임이 반사하는 빛이 차갑다. 출입문을 나서자, 건조한 공기가 바뀐 도시의 질감을 알려준다. 숙소가 있는 도심으로 가기 위해 '이즈반(IZBAN)'이라 불리는 교외선 기차를 탄다. 기차 안은 한산했지만, 곧 묘한 시선들이 느껴진다. 누가 봐도 여행자 행색인 아시안 둘, 그것도 커다란 캐리어를 끼고 있는 모습은 이 도시에서 '낯선' 존재다. 한국인은 물론, 그 흔한 중국인 여행객조차 기차 안에 보이지 않는다. 낯선 시선들을 받으며 우리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이즈미르 교통카드, 시(市)를 상징하는 시계탑이 새겨져 있다


코수(Kosu) 역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니, 이번엔 시선이 더 직접적이다. 버스 안은 조용하다. 사람들은 말없이 창밖을 보다가, 새로 탄 우리를 힐끗 바라본다. 그들의 표정은 경계라기보다 호기심에 가깝다. 아시아 관광객이 흔하지 않은 도시에서, 동양인의 얼굴은 단번에 눈에 띄는 존재다. 여행 중 처음으로, 내가 누군가의 일상 속에 불쑥 들어온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낯섦이 조금은 어색하지만, 동시에 흥미롭다. 언제나 익숙함 속에 살아온 내가, 이곳에서는 완전히 '타자(他者)'로 서 있다.


낯선 여행지의 문을 여는 열쇠는 언제나 '인사'다. 나는 내 앞에 앉은 젊은 남자에게 다가가 "메르하바(안녕하세요)" 라고 말한 후, 내릴 정류장 이름을 말한다.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보니 내 발음이 틀린 모양이다. 터키어의 점 두 개 움라우트와 꼬리 달린 C나 S 글자는 발음이 쉽지 않다. 그는 한 번 웃더니, 손가락으로 버스 노선표를 가리키며 손가락 네 개를 펴 보인다. 남은 정류장의 수였다. 언어는 다르지만, 친절은 언제나 통한다.


잠시 후, 버스가 내릴 정류장에 가까워지자 앞 좌석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가 손짓으로 우리 가방을 문 쪽으로 당겨준다. 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고, 미리 친절을 베푼 것이다.

"테셰퀴르 에데림(고맙습니다)."

내 터키어 인사에 버스 안에는 작은 미소들이 번진다. 한 사람에게 건넨 인사를 모두가 받고, 미소로 화답해 준다. 그들의 환한 미소가 순식간에 이 도시를 낯선 곳이 아닌 '머무를 만한 곳'으로 바꿔놓는다. 여행은 풍경이 아니라 사람의 얼굴로 기억된다는 사실을 이즈미르의 버스 안에서 다시 배운다. 여행에서 내가 마주한 미소만큼, 내 여행은 풍성해진다.



버스에서 본 이즈미르 도심


3.

창밖을 보니 도시의 윤곽이 더욱 뚜렷해진다. 이즈미르는 생각보다 컸다. 도시의 틀은 견고하고, 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다. 균형 잡힌 건물들이 질서있게 들어서 있고, 곳곳의 조형물과 광장은 도시가 지닌 세련된 기운을 드러낸다.


이즈미르는 이스탄불과 앙카라에 이어 튀르키예 제3의 도시이자, 오랜 항구의 역사 위에 세워진 상업의 중심지다. 고대 그리스 시대엔 스미르나(Smyrna)라 불리며, 로마와 비잔티움, 오스만의 흔적을 차곡차곡 쌓아온 도시. 이곳은 언제나 문명들이 교차하고, 서로의 자리를 주장해 온 무대였다. 도시 외곽을 따라 펼쳐진 해안선은 매끄럽게 이어져 있다. 안탈리아가 남쪽의 느긋한 휴양지라면, 이즈미르는 북쪽의 실용적인 항구도시다. 오후 햇살은 여전히 강렬했고, 공기 속에는 바다의 짠내와 약간의 금속성 냉기가 섞여 있다. 바다와 산업, 유적과 현대가 공존하는 이즈미르는 느긋함보다 도시적 긴장을 품고 있다.


버스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본다. '이 도시는 나에게 어떤 감정을 남기게 될까'. 바람은 차분하고, 거리의 표정은 낯설다. 하지만 이 낯섦이야말로 또 다른 여행이 시작되는 신호다.


4.

이즈미르도 언덕의 도시다. 우리 숙소는 바다를 내려다보는 코낙(Konak) 지역 언덕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지역은 도시의 초기 정착지로, 구시가지에 해당하는 곳이다. 언덕을 따라 다닥다닥 붙은 집들은 층층이 얽혀 있고, 골목은 미로처럼 구불거렸다. 돌계단과 어수선한 스카이라인, 어딘지 익숙하다.

"아! 부산. 여기는 튀르키예의 부산 같은 곳이구나."

바다와 항구를 품은 대도시, 언덕이 많고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 그 위로 화려한 불빛이 번들거리는 도시. 두 도시는 8,500km나 떨어져 있지만, 바람의 냄새와 도시의 모양이 꽤 닮아 있다.


해안 언덕을 따라 형성된 이즈미르 구도심


숙소까지 오르막은 만만치 않았다. 정오를 넘긴 시간, 500미터 남짓한 이동 거리지만 캐리어를 끌고 돌계단을 오르자 금세 땀이 흐른다. 그러나 그 수고가 헛되지 않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에어비앤비 숙소를 고를 때마다 우리는 같은 선택을 해왔다. '언덕이지만 시야가 트인 집'이냐, '편리하지만 창밖이 막힌 집'이냐. 이번에도 우리는 전자를 택했다. 여행지에서 하루를 마무리할 때, 발코니에서 석양을 보거나 저녁 바람을 쐬며 휴식하는 시간과 바꿀 만한 것은 거의 없다.


숙소로 오르는 길


숙소의 컨디션은 기대 이상이다. 작은 아파트였지만 침실, 거실, 욕실, 주방이 각각 구분돼 있고, 세탁기와 조리도구도 잘 갖춰져 있다. 무엇보다 수압이 강하다. 이전 숙소에서 미약한 물줄기와 배수 문제를 아쉬워했던 J는 샤워기를 빼들고 환하게 웃는다.

"너무 좋아, 살 것 같아."

여행에서 겪는 불편은 나중에 사소한 편리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미래의 교관이다. 창문을 열자 오후의 따뜻한 공기와 함께 희미한 바다 내음이 스친다. 짐을 풀면서 이 도시가 점점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이즈미르 숙소의 발코니와 주방


5.

이번 여행지에 이즈미르를 포함한 이유는 세 가지다. 우선, 아테네로 넘어가는 비행 노선 중 가장 현실적인 경로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꼭 보고 싶던 에페소스(Ephesus) 유적이 이즈미르 외곽에 자리하고 있다. 그곳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이 맞닿았던 교차점이자, '문명의 탄생과 쇠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유적지다. 그리고 마지막 이유, 이곳에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튀르키예로 오기 전, 여행 정보를 얻기 위해 SNS로 교류하던 현지인 세브기(Sevgi)가 이곳에 산다. 그녀는 이즈미르의 초등학교 교사로,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성격을 가진 40대 여성이다. 남편 에르귄(Ergun)은 공무원이고, 13살 된 외아들 찬(Chan)을 두고 있다. 세브기는 한국 드라마의 열성 팬이자 '한국'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다. 작년에 가족과 함께 한 달간 한국에 머물며 서울과 부산을 여행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이즈미르는 부산과 닮았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웃으며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브기의 남편 에르귄은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다. 연락할 일이 있으면 영상통화 버튼부터 누른다. 가까운 사이라도 '문자가 우선'이 되어버린 한국의 문화와 달라서 수신을 머뭇거린 적이 여러 번이다. 이곳에 도착한 이후에도 벨이 울리며 에르귄의 얼굴이 뜰 때마다 깜짝 놀라곤 했다. 이제까지 세상에 이런 단도직입 소통법은 엄마 밖에 없었는데 한 사람 더 늘었다. 게다가 실제로 본 적도 없는 튀르키예 남자다.

"이동으로 피곤할 테니 오늘은 쉬고, 내일 저녁에 만나요."

내일 몇 시에 어디서 보자는 얘기는 없지만, 우리는 만나게 될 것이다. 온라인으로만 소통하던 사람을 직접 만나려니, 기대와 긴장이 교차한다.


에르귄이 밤에 보낸 문자(심지어 이 부부는 카카오톡을 쓸 줄 안다) / 이들 가족이 보여준 한국여행 기념 사진


J는 낯선 만남에 늘 조심스러운 편이라 잠시 망설였지만, 나는 설렘이 앞선다. 언어는 다르지만 한국에 호의를 가진 이즈미르 현지인을 직접 만난다는 생각이 마음을 들뜨게 한다. 그들이 들려줄 도시의 삶과 일상의 이야기들은 어떤 가이드북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여행의 진짜 즐거움과 오래 남는 기억은 장소보다 사람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캐리어 안에는 한국 라면이 4번의 비행기 이동에도 무사하게 대기 중이다. 세브기가 아들 찬이 한국 라면을 좋아한다며 부탁한 것들이다. 특별히 좋아하는 라면이 있냐고 물으니, 한국 라면이면 무조건 좋다고 했다. 해외에서 유행하는 '불닭볶음면'과 '불닭 까르보나라', '신라면', '짜파게티' 그리고 컵라면을 챙겨 왔다. 나는 벌써 내일이 궁금해진다. 저녁 식탁 위에서, 이 도시에 담긴 진짜 '터키의 얼굴'을 엿보게 될 테니까.


6.

숙소의 주방이 잘 갖춰져 있어서, 외식 대신 직접 요리를 해 먹기로 했다. 이 도시의 상점과 식재료도 궁금하다. 지도를 보니 2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식료품점과 야채 가게가 있다. 그곳까지 가는 길은 거의 내리막이다. 나중에 다시 올라와야 할 오르막길이기도 했다.


좁은 골목을 따라 내려가자, 이즈미르의 '사람 사는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식당 환풍구에서 새어 나오는 케밥 냄새에 이어 건너편 미용실 안의 터키 여인들과 미용사의 분주한 손놀림이 보인다. 미용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터키 노래는 골목을 채운다. 오래된 빵집 간판에는 큼직하게 "PiDECiM(피데가게)"이라 적혀 있다. 유리 진열장 뒤로는 갓 구운 빵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가게 앞에는 장작더미가 쌓여 있다. 빵을 굽는 화덕이 아직도 나무를 태우는 방식이란 게 반갑다.

앞 보도에는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늘어진 채 낮잠을 자고 있다. 저 정도는 되어야 '개 팔자가 상팔자' 소리를 듣겠다 싶다. 아무도 그 개를 쫓지 않는다. 이즈미르 뿐 아니라 튀르키예의 거리에는 사람과 동물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산다. 이곳은 관광지가 아니라, 도시의 일상이 매일 이어지는 곳이었다.


장작 화덕 피자 가게와 호두를 가마니째 내어놓고 파는 식료품점
처음 봤을 땐 '죽었나?' 생각했던 노상의 개. 아무도 이들의 잠을 일부러 깨우지 않는다.


조금 더 걸어가자 식료품점이 보인다. 유리창에는 손 글씨로 쓴 'İNDİRİM(세일)' 안내문이 붙어 있고, 문 앞에는 커다란 자루에 호두가 수북이 담겨 있다. 가게 안에는 치즈, 올리브, 꿀, 말린 과일이 가지런히 진열돼 있다. 그 옆의 야채 가게는 천연 색으로 빛난다. 피망, 오이, 가지, 각종 과일 그 위로 터키어 가격표가 나란히 붙어 있다. J는 바구니를 들고 토마토와 양파, 가지를 고르며 신이 난 표정이다.


앞에는 호박, 뒤에는 수박
식료품점의 싱싱한 야채들


여행지에서 식료품점은 우리에게 하나의 놀이동산이다. 새로운 도시의 시장에 들어서면 우리는 아이처럼 호기심에 차서 진열대를 한 바퀴 순례한다. 지역마다 포장 디자인이 다르고, 낯선 글씨들이 상품 위에 적혀 있다. 어떤 것은 향이 강하고, 어떤 것은 알 수 없는 용도로 팔린다. 그 모든 '모름'이 흥미롭다.


장을 본다는 건 단순히 음식을 사는 행위가 아니다. 그건 한 도시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식재료는 그곳 사람들의 식습관과 계절, 경제, 심지어 기후까지 말해준다. 토마토의 밀도, 치즈의 염도, 빵의 숙성도 속에는 그들의 일상과 문화가 압축돼 있다. 그걸 손으로 집고, 가격표를 읽고, 주인에게 미소와 함께 값을 건네는 순간, 우리는 단순한 '여행자'에서 '이 도시의 한 사람'이 된다.


7.

오후부터 하늘이 서서히 흐려졌다. 구름은 낮게 깔리고, 바람에는 바다의 비린내가 살짝 섞여 있다. 저녁부터 비 소식이 있지만, 우리는 산책을 겸해 구도심을 둘러보기로 한다. 숙소 아래쪽으로 내려가자 곧 코낙(Konak)역 주변의 번잡한 도로가 펼쳐진다. 차들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달리고, 그 사이로 버스들이 쉼 없이 드나든다. 버스 정류장과 메트로 입구에는 퇴근길 직장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줄지어 움직이고 있다. 도시의 하루가 천천히 저물고 있다.



조금 더 걸으니 이즈미르 시계탑 광장(Konak Square)이 나온다. 하늘빛과 맞닿은 하얀 탑은 섬세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고, 저녁 불빛이 스며들며 은은히 붉게 물든다. 이 탑은 1901년, 오스만 제국 술탄 압둘 하미드 2세의 즉위 25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시의 상징이 되었고, 시청 차량이나 공공건물에는 어김없이 이 시계탑 문장이 붙어 있다. 탑 주위에는 비둘기 떼가 모여들고, 사람들은 탑 아래에 앉아 담소를 나누거나 사진을 찍는다. 옆의 야자수는 바람결에 천천히 몸을 기울이며, 마치 이 도시의 일상을 묵묵히 지켜보는 듯하다.



이즈미르의 원도심은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다. 대신 도시인의 생활이 보인다. 코낙 메트로 옆 쇼핑몰 1층은 이곳의 저녁 일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육점에서는 선홍빛 고기가 진열대에 가지런히 놓여 있고, 손님이 고기를 고르면 직원이 즉석에서 정교하게 손질한다. 튀르키예 사람들에게 고기는 ‘식탁의 중심’이자 가족의 단란함을 상징하는 음식이다. 인기 있는 정육점이었는지, 매장 입구에 계산만 전문으로 하는 여직원이 둘이나 앉아 있다. 아무것도 사지 않고 나가는 아시안 남녀 둘을 빤히 쳐다본다.


근처의 시장 골목으로 들어서자, 의류와 신발, 액세서리를 파는 가게들이 빽빽이 이어진다. 제일 많이 눈에 띈 것은 의류 상점들로, 서울 외곽의 재래시장과 닮은 풍경이다. 어물전에서는 막 잡아온 듯한 고등어와 대멸치가 은빛 비늘을 반짝이며 쌓여 있다. 상인들의 외침과 사람들의 흥정이 좁은 골목을 가득 메운다. 이곳은 관광객을 위한 시장이 아니라, 현지인의 생활이 살아 있는 공간이다. 꾸밈없는 생생함으로 도시 생활의 진짜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다.


튀르키예는 과일이나 생선을 파는 단위가 kg이다. 대멸치 한 양푼에 5,000원 정도다.


시장 골목을 빠져나오자, 하늘은 어두워지고 빗방울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페리 선착장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바다 위에는 화물선의 불빛이 밝은 점처럼 떠 있고, 맞은편 언덕의 집들은 노란 불빛으로 반짝인다. 그 빛들이 물결 위에 길게 늘어져 흔들린다. 바람이 차가워지자 연인들이 서로의 어깨를 감싸며 걷는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온기를 만들어내는 풍경. 그들의 모습은 해변의 작은 난로 같다.



비가 내려 스마트폰 카메라 렌즈에 빗방울이 수시로 묻었다.


해변을 따라 이어진 도로와 육교, 육교에서 본 이즈미르 밤 풍경


우리는 도로를 건너는 육교가 나올 때까지 해안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비에 젖은 길 위로 가로등 불빛이 번지고,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는 도로 위를 따라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멀리서 들려오는 페리의 기적 소리와 바람에 실린 빗소리가 어우러지며, 항구 도시의 밤에 고요한 숨결을 더한다. 걷다 보니 기온이 점점 내려가고, J가 어깨를 웅크리며 추위를 타기 시작한다. 최대한 빠른 길을 찾아 숙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비에 젖은 신발에서 습기가 배어들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평온하다. 여행에서 날씨는 단순한 환경이 아니라, 그날의 감정을 결정짓는 배경음 같은 것이다. 숙소에 도착해 운동화부터 말린다. 창밖에는 여전히 가랑비가 내린다. 내일은 부디 맑게 개기를 바라며, 낯선 도시에서의 첫날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