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느리게 이해되는 도시

4th. 이스탄불(4)

by 조르바와 춤을


서로 다른 시선들이 겹쳐지며 이 도시의 초상이 완성된다.
혼란과 낭만, 불편과 감동이 뒤엉켜 있는 거대한 퍼즐.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본 이스탄불이었다.


1.

새벽의 공기가 희미하게 창문 틈으로 들어온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아잔 소리에 눈을 뜬다. 하루를 깨우는 기도의 울림은 어느새 우리를 위한 라이브 알람이 되었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운동복으로 갈아입는다. 조깅 코스는 어제 미리 살펴둔 게지공원 - 탁심광장 - 이스티크랄 거리 구간을 왕복하는 방식이다. 달리기에 썩 좋은 코스는 아니지만, 도심 한복판을 달리는 재미는 남다르다.


이스티크랄 거리의 아침


아직 출근 전이라 거리는 비교적 한산하다. 상점 주인들은 이미 문을 열고 하루를 맞을 준비를 한다. 게지공원을 출발해 약 3km쯤 지났을 때, J는 속도를 높이며 나를 멀찍이 따돌린다. 어제 하루 종일 3만 보를 걸었는데도, J의 다리는 여전히 가볍다. 시야에서 J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냄새를 쫓는 개처럼 J의 흔적을 뒤따른다. 이스티크랄 거리 끝을 돌아 다시 광장 입구에 다다르자, 그곳에 J가 서 있다. Ziraat 은행의 현금인출기 앞. 검은 운동복에 모자, 마스크까지, 멀리서 보면 현금인출기 털이범으로 오해받을 법한 차림이다. J는 3,000리라를 인출해서 내보인다.


이 도시의 거리에서는 여전히 현금만 받는 곳이 적지 않다. 작은 상점이나 노점은 카드 단말기를 갖추지 않은 곳이 많다. 여행에서는 사소한 것 하나가 곧 추억이 된다. 먹고 싶은 음식, 사고 싶은 물건이 있을 때, 그때를 놓치면 나중에 후회는 몇 배로 증식해 아쉬움을 낳는다. 어제 플리마켓에서 수공예 팔찌를 사지 못한 아쉬움이 지금 J를 현금 인출기 앞으로 불러낸 것처럼. 여행에서 새로운 시도와 도전은 이렇게 ‘놓친 것’에서 자라난다.


게지 공원의 아침. 고양이 친화적인 도시
이스티클랄 거리 트램 종점. 짧은 구간을 운행한다.
조깅 후, 현금을 인출하는 J. (은행강도 아님)


2.

아침식사는 오늘도 우리의 방식대로 만들어 먹기로 한다. 숙소 앞 동네는 거리를 따라 케밥 식당과 빵 카페가 줄지어 있지만,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는다. 거리의 진한 음식 향에 지친 탓일까. 샤워를 마치고 각자 익숙한 요리 역할을 맡는다. J는 내 몫의 요거트를 컵에 담아 꿀을 얹고, 나머지는 500ml 요거트 통째 자기 앞에 놓는다. 야채와 과일을 손질해서 치즈를 얹은 샐러드도 만든다. 한쪽 레인지 위에서는 달걀이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삶아진다. 그 사이 나는 에그 스크램블을 만든다. J는 내 계란요리에 늘 엄지를 치켜세운다. 가스라이팅인 줄 알지만, 달콤한 거짓말이 주는 행복감이 싫지 않다. 추가로 콜리플라워를 살짝 데쳐 데리야키 소스 반 큰 술을 넣어 살짝 볶다가, 마지막에 올리브유를 넉넉히 뿌린다. 부드러운 식물 향이 퍼지며 식욕이 살아난다. 공수해 온 작은 블렌더로 말차 라테를 만들고, 주전자에는 홍차 티백을 넣는다. 우유가 데워지고, 차가 우려 지는 동안 부엌은 은근한 향으로 가득 찬다. 대단한 메뉴는 아니지만, 이 조합은 언제나 옳다. J는 요거트를 한입 맛보더니 입꼬리가 올라간다.

“이건 진짜 마음에 들어. 요거트가 이 정도는 되어야지!”

맛에 감탄한 것인지, 용량에 감동한 것인지 불분명했지만 나는 따라 웃는다. 유난히 진하고 새콤한 맛, 어쩌면 이 땅의 햇살과 바람이 함께 발효된 맛일지도 모른다.


이 편안함에는 숙소의 발코니도 한몫한다. 작지만 아늑하고 편안하다. 우리가 이 숙소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독립된 구조라 바람이 잘 통하고, 앞으로는 탁심의 건물들이 계단식으로 내려다보인다. 멀리서 들려오는 차량 소음조차 잔잔한 배경음악처럼 들린다. 아침 햇살이 식탁 위의 그릇들을 부드럽게 감싸며 도시의 하루를 천천히 깨운다. 낯선 도시에서 익숙한 식탁을 차릴 수 있다는 사실이 하루를 안정시키고, 여행의 중심을 잡아준다.


3.

식사를 마친 뒤, 여유롭게 차를 한잔 마신다. 햇살이 부드럽게 드리운다. 도시의 소음은 멀고 바람은 느리게 흐른다. 오전 시간인데도 가벼운 나른함이 몸에 퍼진다. 그 여유를 조금 더 즐기다 오늘 목적지를 정하고 일어선다. 돌마바흐체(Dolmabahce) 궁전. 오스만 제국의 영광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이다.


돌마바흐체 궁전 가는 길, 길 건너 베식타쉬 JK(Beşiktaş JK) 축구팀의 홈구장 보도폰 파크(Vodafone Park)
돌마바흐체 궁전으로 내려가는 길, 멀리 보스포루스 해협이 보인다


숙소에서 내려와 해안을 따라 걷자, 보스포루스의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궁전은 해협 바로 옆, 마치 바다 위에 걸터앉은 듯 웅장하게 서 있다. 대리석의 벽과 금빛 문양, 섬세한 조각들.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제국의 권력과 부가 건축물 하나에 얼마나 정교하게 담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줄을 따라 궁전의 중앙으로 들어서자, 입이 벌어지며 잠시 숨이 멎는다. 연회장, 이 대홀(Grand Ceremonial Hall) 은 내가 지금껏 본 어떤 실내보다 압도적 분위기다. 끝이 보이지 않는 천장, 하늘에서 쏟아지는 듯한 보헤미안 크리스털 샹들리에, 벽면을 따라 이어지는 금빛 장식과 거울, 그리고 해협 쪽 창문으로 쏟아지는 바다의 햇살. 그 모든 것이 환상처럼 느껴져 잠시 현기증이 인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감탄이 절로 새어 나온다.


궁전 내부 모습, 사진 촬영을 제한하는 곳이 많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정수, 무아예데 살롱 (Muayede Salonu)
돌마바흐체 궁전은 보스포루스 바다를 정원으로 품고 있다.
궁전의 뒤편, 손님이 묵던 숙소의 정원


돌마바흐체는 보통 궁전이 아니다. 19세기 중엽, 서구 열강과의 경쟁 속에서 오스만 제국이 보여주려 한 문명의 세련됨과 근대의 자존심이다. 궁전의 건축양식은 오스만의 전통과 바로크·로코코·신고전주의가 절묘하게 뒤섞인 형태다. 그것은 동양의 권위와 서양의 화려함이 맞닿은 결과이자, 제국이 마지막으로 꿈꾸던 '근대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화려함 이면에는 이미 쇠락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과도한 건축비로 국고는 바닥났고, 궁전이 완공된 지 불과 반세기 뒤, 제국은 무너졌다. 그래서 돌마바흐체는 단순히 아름다운 궁전이 아니라, 번영의 절정과 몰락의 시작이 공존하는 상징으로 남았다. 화려함 속의 고요, 웅장함 속의 쓸쓸함, 그것이 이 궁전이 주는 진짜 울림이다.


궁전 앞의 정원은 이 궁전이 가진 뷰의 완성이라 할 만하다. 조각 분수와 대리석 계단, 해협을 향해 열린 문, 그 사이를 오가는 갈매기들까지, 모든 풍경이 한 폭의 아련한 회화 같다. 두 시간을 훌쩍 넘기며 궁전 내외부를 천천히 둘러본다. 궁전을 나서며 마지막으로 뒤돌아보니, 마르마라의 햇살에 빛나는 대리석 벽이 유난히 눈부시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조차 시간의 슬픔을 감추지는 못한다.



4.

이스탄불 음식은 여전히 우리 입맛과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입에 넣는 순간 “맛있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 적이 거의 없다. 혹여나 음식이 괜찮다 싶으면, 양이 적거나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다. 오늘 점심 겸 저녁을 해결한 식당도 예외는 아니다. 고기를 조금 얹은 케밥 2인분에 아이란 두 잔, 콜라 한 병을 주문했는데, 계산서를 받아 든 순간, 눈을 의심했다. 8만 원이 넘게 나왔다. 식당 분위기는 괜찮지만, 그만한 값을 할 이유는 딱히 보이지 않는다. 어제 점심도 마찬가지였다. 한 입 크기의 양갈비 네 조각과 파스타 한 접시, 물 한 병에 9만 원을 지불했다.


여행지에서 음식 가격을 아끼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비싼 만큼 맛있는’ 식당의 법칙이 이곳에서는 작동하지 않고 있다. 최근 들어 물가가 크게 오르면서 튀르키예 식당의 음식 가격을 감당하기 어려워졌다는 불만이 많다. 정치와 경제의 불안은 식탁의 가격표에 그대로 반영된다. 관광지일수록 그 격차는 더 벌어진다. 그게 정말 물가 상승 때문인지, 아니면 외국인 상대로 한 상술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우리가 방문한 베식타쉬 거리의 식당과 시그니처 메뉴


튀르키예의 음식은 대체로 육류 중심이다. 양고기, 소고기, 닭고기 등 그릴에 구운 요리가 식탁의 중심을 차지하고, 여기에 토마토, 요거트, 향신료가 결합되어 진하고 묵직한 풍미를 낸다. 기름 사용이 많고, 조리법이 단순해 첫맛은 강렬하지만 뒤끝은 다소 무겁다. 입안에 오랫동안 향신료의 잔향이 남는다. 그 점이 현지인에게는 ‘깊은 맛’이지만, 외국인 여행자에게는 종종 ‘지치는 맛’으로 느껴진다.


한국 음식과 비교하자면 그 차이는 더 뚜렷해진다. 한국의 식탁은 조화의 문화다. 한 가지 주 요리보다 여러 반찬이 한 상에 어우러져, 매운맛·짠맛·단맛·신맛이 서로 균형을 이룬다. 입맛이 질리지 않게 돌려먹고, 밥과 국이 전체의 중심을 잡아준다. 그래서 한국인은 자연스럽게 “균형 잡힌 맛”을 음식의 기준으로 삼는다.


반면 튀르키예 음식은 집중의 문화다. 한 접시에 주재료 하나가 주인공으로 올라서고, 그 맛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요거트, 향신료, 고기의 조합은 단순하지만 강렬하다. 식탁은 균형보다는 ‘한 입의 만족감’이 중심이 된다. 한국의 밥상이 여러 가지 맛이 한데 어울린 조화와 균형을 지향한다면, 튀르키예의 식탁에서는 한 가지 맛이 정면으로 부딪치며 주메뉴의 기세를 드러낸다. 하나는 섬세함의 미(味)학이고, 다른 하나는 원초적 힘의 미학이다. 그렇기에 한국인의 입맛으로는 튀르키예 음식이 때로는 무겁고 단조롭게, 또는 짠맛과 향신료가 지나치게 직접적으로 느껴진다.


5.

이스탄불 신시가지의 지형이 어느 정도 눈에 익어서 그런지,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굳이 지도를 보지 않아도 됐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가 본다. 베식타쉬 근처로 접어드니 공기가 달라진다. 오래된 저택과 외교관저, 고급 호텔이 언덕의 경사를 따라 줄지어 있다. 카페의 야외 테라스에는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늦은 오후의 커피를 즐기고, 거리에는 고급차가 천천히 미끄러지듯 지나간다. 도시의 다른 구역보다 한결 차분하고, 여유가 있다.



언덕을 천천히 오르다 보니, 계곡을 가로지르는 큰 공원이 나타난다. 마츠카 민주주의(Maçka Democracy) 공원. 도시의 골짜기 사이에 숨은 오아시스처럼 자리하고 있다. 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산책로 사이로 어린이들의 웃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온다. 조금 걸어 들어가자, 아래쪽 계곡을 따라 움직이는 작은 곤돌라가 눈에 들어온다. 운행 구간이 짧고, 곤돌라는 아담하다. 최대 6명 탑승 가능하다고 적혀있지만, 적정 인원은 4명이다. 교통수단인지, 놀이 기구인지 경계가 모호할 정도다. 도시의 비밀스러운 장난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다른 커플과 앞뒤로 곤돌라에 앉는다. 천천히 움직이는 곤돌라가 계곡 위를 건널 때, 발아래로 펼쳐지는 이스탄불 풍경은 낯설면서 아름답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열린 창문 너머로 보스포루스의 푸른빛이 반짝인다. 짧은 시간이지만,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는다. 메트로 시티 한복판에서 이렇게 작은 곤돌라를 타고 웃고 있다니, 이 또한 여행이 주는 의외의 선물이다.


마츠카 공원을 가로지르는 교통수단, 미니 곤돌라


6.

숙소로 바로 돌아가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조금 피곤하긴 해도 아직 밤은 멀다. 보스포루스가 내려다보이는 카페를 찾아 바람과 풍경을 즐기기로 했다. 유명 호텔이 밀집한 지역을 지나 바다 쪽으로 내려가본다. 반짝이는 통유리 창이 바다를 향해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멀리서 보기엔 호텔의 라운지 카페 같다. 입구엔 낮은 철문과 통제소가 있다. '고급 호텔이라 통제가 엄격한가?' 철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던 중, 마침 밖으로 나오는 20대 청년과 마주친다. 여기가 카페인지 묻자, "아니요, 이곳은 도서관입니다"라고 답하며 미소를 짓는다.

‘아니, 이런 위치에 도서관이라니!’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직원에게 "혹시 외국인도 출입 가능한가요? 저희는 한국에서 왔어요. 교육 분야에서 일했던 사람인데 여기 도서관을 꼭 보고 싶어요."라고(슈렉에 나오는 '장화 신은 고양이'의 표정을 최대한 흉내 내며) 부탁한다. 직원은 잠시 망설이다 여권을 맡기고 들어가 보라고 한다. 도전 성공이다. 여행에서 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되든 안 되든 일단 부딪혀보는 게 좋다. 세상엔 호의를 가진 사람이 많다. 밑져야 본전이다.


아타튀르크(Atatürk) 도서관 입구와 내부


도서관 내부는 우리가 한국에서 자주 보던 ‘독서실형 도서관’과 다르다. 각자가 원하는 자료를 자유롭게 찾아보고, 편한 자리에 앉아 책을 읽거나 공부하는 개방형 구조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창가의 좌석들이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향해 길게 난 통유리 앞, 바 형태의 테이블을 따라 의자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 그 자리에 앉아 고개를 들면 바다와 하늘이 한눈에 들어온다. 순간, 서울 남산 중턱의 용산도서관이 떠오른다. 한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그곳처럼, 이곳 역시 도시와 바다 사이에 놓인 조용한 쉼표 같다. ‘이런 곳에서 공부가 제대로 될까?’ 웃음이 피식 나오다가 곧 멈춘다. 그렇지, 도서관은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지. 머무름과 사유, 그리고 재충전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니까.


"우리 국민의 정치적, 사회적 삶과 지적 교육에서 우리의 길잡이는 과학과 기술이 될 것입니다." - 아타튀르크
클래식한 분위기와 현대적 디자인이 어우러진 도서관, 멀리 포스포루스 해협이 보인다.


밖으로 나오며 J가 말한다.

“우리가 이스탄불에 한 달 살기를 한다면, 아마 이곳엔 여러 번 오게 됐을 것 같아.”

그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이 도시와의 관계가 한 걸음 더 깊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7.

이쯤에서 '고양이'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이스탄불을 한 번이라도 방문한 사람이면 고양이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이스탄불의 거리를 걷다 보면, 어디서든 고양이를 만나게 된다. 이 도시 어디에 있든 고양이를 보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당신이 숨어 있어도 결국 고양이가 당신을 찾아올 테니까. 모스크의 계단 위, 항구의 난간, 작은 카페 의자 위, 자동차의 보닛 위에도 고양이는 마치 주인처럼 앉아 있다. 누구도 그들을 쫓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가던 이들이 음식을 나눠주거나 작은 플라스틱 그릇에 물을 채워놓고 간다. 그 배려가 너무나 자연스러워, 이 도시에서는 ‘길고양이’라는 말조차 낯설다.


이스탄불에서 만난 고양이들


터키에서 고양이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다. 이슬람 전승 속에서 고양이는 청결하고 복된 존재로 여겨진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기도 중이던 옷자락 위에서 잠든 고양이를 깨우지 않기 위해 소매를 잘랐다는 일화는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에 따라 사람들은 고양이를 해치거나 내쫓는 일을 꺼리고, 함께 살아가는 것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과거에는 곡식을 쥐로부터 지켜주는 고마운 존재로 여겨졌고, 지금은 도시의 풍경 속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남았다. 그래서일까, 이스탄불의 고양이들은 인간을 경계하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거닐며, 카페의 의자 위에서 낮잠을 자고, 책방의 진열대 위에 몸을 말고, 항구의 바람 속에서 털을 정리한다.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그 느긋한 고양이들의 생태에 익숙해졌다. 사람과 동물이 서로의 삶에 스며들어 한 도시의 일상이 되는 풍경, 그것이야말로 이스탄불이 가진 가장 따뜻하고 인간적인 얼굴이다.


거리에서 팔고 있는 고양이 쿠션. 개도 고양이인 척하는 게 여기선 나은 처세일 듯하다.


8.

탁심광장을 중심으로 도시의 이곳저곳을 걸어보니, 이제야 이곳의 지리와 지형에 대한 감이 잡힌다. 지도 위에서만 보던 선들이 실제 거리의 굴곡으로 이어지고, 길의 오르내림이 도시의 성격을 드러낸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이스탄불은 단순한 도시라기보다 시간이 겹쳐 있는 풍경 같다. 비잔티움, 오스만, 그리고 지금의 터키가 한 공간 위에 겹겹이 쌓여 빛나고 있다.


숙소를 오가던 골목의 모습


이스탄불은 리스본 못지않은 언덕의 도시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경사면마다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그 사이로 이어진 골목길은 미로처럼 얽혀 있다. 도시에는 빈 공간이 거의 없다. 수백 년의 시간이 층층이 쌓여, 언덕마다 하나의 작은 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 속에서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어디서든 보이는 모스크의 돔과 미나렛이다. 도시의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이자, 이스탄불이 여전히 신앙의 도시임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바다를 향해 반짝이는 대리석 벽, 하늘로 곧게 솟은 첨탑들은 이 복잡한 도시의 무게 중심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축처럼 느껴진다.


9.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카페를 찾는 일은 결국 포기했다. J와 난 '차라리 우리 숙소의 발코니가 낫겠다'고 합의하고 숙소로 발길을 돌린다. 해 질 무렵의 공기는 차분해지고,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다. 탁심 광장에 이르자, 뜻밖의 풍경이 펼쳐진다. 광장 옆 시민회관 앞마당에서는 일요일을 맞아 다양한 철제 조형물을 전시하고 있고, 화려한 노래 공연을 위한 무대도 꾸며지고 있다. 어린아이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평화로운 생동감이 흐른다. 탁심의 저녁이 활기로 가득하다. 도시의 심장부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다. 우리는 그 장면들을 구경하며 광장을 관통해 지난다.


시민회관 앞 전시물


광장이 있다는 것, 그것은 도시가 시민의 얼굴을 가진다는 뜻이다. 광장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사람들이 만나고, 휴식하고, 함께 노는 도시의 심장이다. 그동안 여행하며 마주한 수많은 도시의 광장들이 떠오른다. 그들 모두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도시의 숨결을 담고 있었다.


로마의 나보나 광장은 분수와 예술이 공존하는, 시간조차 느리게 흐르는 무대였다. 화가와 음악가, 그리고 연인들의 대화가 이탈리아의 햇살 아래에 흩어진다. 분수대 앞에서 까르르 웃음을 쏟아내던 금발의 아가씨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리스본의 코메르시우 광장은 바다와 도시가 맞닿는 거대한 현관 같았다. 노란색 아케이드와 하얀 돌기둥 사이로 대항해 시대의 바람이 여전히 불고 있다.

세비야의 에스파냐 광장은 색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스페인의 자존심이다. 타일의 푸른빛과 물길의 반사, 건축이 음악처럼 흘러내리는 공간이다.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은 르네상스의 중심이다. 베키오 궁전의 그림자 아래에서 정치와 예술, 시민의 의식이 하나로 어우러진다.

하이델베르크의 마르크트 광장은 작지만 정겹다. 성당 종소리와 커피잔의 부딪힘이 어우러진, 조용한 행복이 머무는 유럽의 작은 심장 같다.

바르셀로나의 레이알 광장은 자유와 예술의 공기 속에서 밤마다 기타와 와인이 흐르는 파티의 무대였다. 흥에 취해 춤 무리에 섞이던 40대 남녀의 춤을 잊을 수 없다. 아직도 '순간'에 미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브뤼셀의 그랑 플라스는 황금빛 장식의 길드 하우스들이 줄지어 선, 유럽의 장인 정신과 도시의 자부심이 응축된 공간이다. 밤이 되면 둘레의 건물마다 불빛이 켜져 도시 전체가 하나의 보석처럼 빛났다.


그 모든 광장을 떠올리며 나는 깨닫는다. 어떤 도시에 있든, 광장은 결국 사람이 만든 가장 사회적이면서도 인간적인 공간이라는 것을. 권력의 무대이든, 예술의 정원이든, 광장을 완성하는 것은 건축이 아니라, 그 위에서 서로를 인식하고 연결하는 사람들의 시선이다. 탁심 광장의 밤이 깊어간다. 사람들의 목소리, 음악, 웃음이 뒤섞인다. 광장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도시가 사람을 품고, 사람이 다시 도시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순환의 공간이니까.


탁심 광장의 밤


10.

이스탄불에 온 지 나흘째. 내일이면 카파도키아로 떠난다. 하루의 끝, 숙소의 불을 낮추고 침대에 누워 J와 함께 이 도시의 인상을 열 개의 키워드로 정리해 본다. 여행의 기억을 단어로 묶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단어는 짧지만, 그 속에는 풍경과 냄새, 사람의 온도가 모두 담겨 있다.


내가 먼저 단어를 말하고 부연 설명을 짧게 붙인다.


보스포루스 해협 -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기도 하고 잇기도 하는, 마르마라의 푸른 심장. 이 도시가 가진 역사와 운명의 상징.

페리 - 보스포루스 해협의 물과 바람을 느끼고, 해협 주변의 도시 풍경을 즐기는 가장 완벽한 방법.

모스크 - 도시 어디서든 눈에 들어오는 랜드마크. 둥근 돔과 첨탑은 도시의 무게 중심이자 삶의 기준.

아잔 - 하루 다섯 번, 하늘을 가르는 기도 소리. 낯설면서도 묘한 평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 공항에서, 화폐에서, 거리의 벽화에서 끊임없이 마주치는 얼굴. 상상 이상의 영향력.

교통 불량 - 교통 '혼잡'이라는 말로는 부족. 도시의 시스템과 시민의 수준을 1차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

흡연 - 낭만은 사라지고 지독한 습관만 남음. 이 도시에 피할 수 없는 3가지 : 담배 연기, 고양이, 아잔.

고양이 - 모스크의 계단, 카페의 의자, 항구의 난간. 튀르키예 사람과 고양이 중 누가 더 많을까?

디저트(타를르) - 디저트의 천국. 바클라바, 로쿰, 쾨네페... 지독하게 달면 쓰다.

시밋 - 어디서 만들어져서 공급되는지는 몰라도, 24시간 어디서나 보이는 참깨 빵.


J의 열개 키워드 중 5개는 나와 같고, 5개는 다르다. 다른 키워드는 '바자르, 짝퉁, 바가지요금, 수염, 바람'. J의 단어들은 보다 현실적이고, 약간 냉소적이다. 나는 주로 풍경을 보았고, J는 사람을 보았다. 나는 상징을 떠올렸고, J는 일상을 떠올렸던 것 같다. 우리 둘의 서로 다른 시선이 겹쳐지며 이 도시의 초상이 완성된다. 혼란과 낭만, 불편과 감동이 뒤엉켜 있는 거대한 퍼즐.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본 이스탄불이었다.





** 이스탄불 여행 4일차 여행 루트 : 베식타쉬 경기장 - 돌마바흐체 궁전 - 베식타쉬 지역 - 마츠카 공원 - 아타튀르크 도서관 - 시민공원 - 탁심광장/게지공원

이스탄불 신시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