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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애 May 15. 2017

우리는 모두 이어져 있다

  홈리스의 자립을 돕기 위해 청년과 재능 기부자들이 만들고 홈리스가 파는 잡지가 있다. 바로 <빅이슈>다. 이 잡지에는 이효리, 달라이 라마 등 유명인의 인터뷰와 사회문화 관련 기사가 실린다. 나는 어느 책을 읽다 이런 좋은 취지의 잡지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어느 날부턴가 지하철역 입구에서 <빅이슈>를 파는 분을 보면 다가가 사게 되었다. <빅이슈>는 광화문역, 홍대입구역 등 주로 지하철역 입구에서 판매한다. 빅이슈 판매원을 줄여서 ‘빅판’이라고 하는데, 빅판에게는 불볕더위에도, 살이 에이는 듯한 추위에도 변함없이 거리가 일터다. 요즘처럼 여름에는 폭염이, 겨울에는 혹한이 계속될 때에도 꿋꿋이 일하시는 그분들을 보면 그 의지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올가을 종로구청 입구의 빅판에게서 잡지를 산 날이었다. 커다란 나무 밑에 가지런히 쌓아 놓은 잡지가 눈길을 끌었다. 눈이 마주치자 서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는데 빅판 분의 환한 웃음에 기분이 좋아졌다. 신간을 사서 포장을 뜯어보니 빅판 분의 편지가 함께 들어 있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지만 <빅이슈> 판매를 통해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하셨다. 거친 비바람 휩쓸고 지나간 땅을 다시 정성스럽게 일구어가는 그 모습이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독자들이 잡지를 사면 잡지 가격의 50%가 빅판에게 돌아가는데, 빅판은 이 돈을 저축해서 자립을 준비하고 임대주택에 들어간다. 직업 훈련을 받아 새로운 직업을 갖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내가 가끔씩 잡지를 사던 한 빅판 분이 임대주택에 입주하셨다. 그 소식에 가슴이 따듯해졌다. 독자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니 다른 독자들도 자기 일처럼 기뻐한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의 기쁨에 함께 기뻐할 수 있다는 것도 <빅이슈>로 이어진 사람들이 나누는 행복이다.

  잡지에 소개된 어느 빅판은 추운 겨울에 <빅이슈> 판매를 시작했는데 누군가 다가와 목도리를 둘러주고 갔다고 한다. 그 빅판 분은 판매를 하며 힘든 점도 많았지만 그 일을 떠올리면 힘이 나서, 여름에도 그 목도리를 가지고 다니며 ‘첫 마음’을 되새기면서 일을 했다고 한다. 한 사람의 작은 행동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사실 처음부터 홈리스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길에서 구걸을 하는 사람을 지나칠 때도 일할 의지가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편견을 갖기도 했다. 그런데 언젠가 아주 어렸을 적에, 거리에서 몸이 불편한 분이 구걸을 하는 것을 보았을 때 다가가 돈을 드렸던 기억이 났다. 그때 나는 그분에 대해 판단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마음을 기억하며 나는 어려운 이웃들을 조금씩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노숙을 하거나 구걸을 하는 사람들의 상황을 나는 모른다. 그 사람들이 어떤 아픔과 역경을 겪고 그 자리까지 왔는지 내가 어떻게 아는가?

  <빅이슈>를 파는 분들은 모두 노숙을 한 적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각각 다양한 인생길을 걸어오셨다. 그중에는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은 분도 있고, 대기업에 다니다가 상황이 어려워져 거리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분도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노숙인 등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지금의 겉모습만 보고 섣불리 판단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으면 평범한 사람도 큰 병에 걸리거나 사기를 당하거나 갑자기 실직했을 때 집을 잃고 거리로 내몰릴 수 있다. 누구든 그런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이것은 나와 동떨어진 ‘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고, 저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힘겨운 상황에 처한 개개인을 지원하고 이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리라.

  <빅이슈>를 읽으며, 밤에 잘 수 있는 집과 세 끼 밥처럼 우리가 평소 당연시하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특히 무더운 날이나 추운 날에는 거리에서 주무시는 분들은 얼마나 힘드실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날마다 몸을 누일 요와 이불이 있고, 입을 옷이 있고, 정답게 얼굴 마주할 가족이 있다는 것은 사실 모두가 누리지는 못하는 기적이다. 

  빅판들이 거리 생활을 끝내고 자립하기로 결심하면서 파는 <빅이슈>는 다양한 사람들의 재능 나눔으로 만들어진다. 잡지에 실릴 글을 기고하고 번역하고 삽화를 그리는 것 모두 대가를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하는 일이다. 빅판 옆에 서서 잡지 판매를 돕는 친구들도 있다. 나는 글을 기고해 실린 적이 있는데, 모두 함께 힘을 모아 잡지를 만드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 기뻤다.

  잡지를 만들어 팔기까지의 과정은 우리가 모두 이어져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햇빛과 바람과 비가 나무를 키우면, 그 나무로 만든 종이에 여러 사람이 협력해 글과 그림을 담는다. 인쇄소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잡지를 찍어내면 운전기사분이 실어 나른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 권의 잡지가 바로 오늘도 거리에 선 판매원의 손에 들린 <빅이슈>다. 당당한 사회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그분들의 모습에 독자들은 힘을 얻는다. 이 가운데 어느 한 존재라도 없었다면 이 잡지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수많은 존재 덕분이 아닌가. 어제까지 땅과 하나였던 시금치를 오늘 먹으면 시금치는 내가 된다. 시금치는 해와 흙과 농부, 수많은 조건이 갖춰졌기에 존재할 수 있었고, 시금치를 먹는 나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존재가 자신만의 고유한 모습으로 다양하게 나타나 있으면서도 모두 이어진 하나라는 것은 그야말로 신비다. 모두 없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존재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만은 근거 없는 것이리라.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그 뒤의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그물망이 새벽이슬 맺힌 거미줄처럼 반짝 빛나는 순간,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모든 것이다.

  우리는 한순간도 무언가와 닿아 있지 않은 때가 없다. 땅, 공기, 누군가의 손으로 만든 옷, 옆 사람의 감정……. 각자 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놓으면 외로움도 슬픔도 없으리라. 우리 모두는 지구라는 한집에 함께 사는 가족이 아닌가. 언젠가 <빅이슈>에서 달라이 라마는 홈리스들은 물리적인 집은 없을지 몰라도, 이들이 가족이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따스한 손길을 내밀자고 하신 적이 있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렇듯 삶에서 내가 제어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사랑할 수 있고 영향 미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많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함께 행복한 삶을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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