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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 읽는 곰

문장 속에 잠시 살아낸 시간들 속에서

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

by 춤추는 곰
Yes24 도서 페이지 / 『잊기 좋은 이름』(열림원)

김애란의 『잊기 좋은 이름』은 하나의 큰 이야기보다는 작고 사적인 이야기들이 모여 있는 산문집이다. 그중에서도 마음에 깊이 남았던 이야기 몇 편을 소개해 보려 한다.


먼저, '몸과 바람'이라는 글 중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글을 쓸수록 아는 게 많아질 줄 알았는데 쥐게 된 답보다 늘어난 질문이 많다. 세상 많은 고통은 사실 무수한 질문에서 비롯된다는 걸, 그 다양한 사실을, 글 쓰는 주제에 이제야 깨달아간다. 나는 요즘 당연한 것들에 잘 놀란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려 한다. (p124)


이 구절을 읽으며, 나 역시 점점 나이를 먹어가며 세상에 대해 확신하기보다는 질문이 많아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나서 편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알게 되면서 오히려 세상이 더 모호해진다는 감각. 저자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리고 '여름의 속셈'이라는 글을 읽다 보면 다음의 문장들을 만나게 된다.


누군가의 문장을 읽는다는 건 그 문장 안에 살다 오는 거라 생각한 적이 있다. 문장 안에 시선이 머물 때 그 '머묾'은 '잠시 산다'라는 말과 같을 테니까. 살아 있는 사람이 사는 동안 읽는 글이니 그렇고, 글에 담긴 시간을 함께 '살아낸'거니 그럴 거다. (p141)


문장을 읽는다는 것이 단순히 정보를 얻는 행위가 아니라, 그 사람의 시간과 감정을 함께 살아내는 일이라는 작가의 설명이 신선하면서도 쉽게 와닿았다. 문장 안에 머무른다는 것, 그 시간 속에 잠시 살아 본다는 것. 이 표현 하나만으로도 나는 한동안 이 책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인상 깊게 읽은 장면을 하나 더 꼽자면 아래와 같다. 이건 '그녀에게 휘파람'이라는 글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언젠가 의가 상해 마음이 틀어지거나 실망하고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소리치고, 『문학동네』(2007년 가을호) 다 찢어버리겠다고 울지 몰라도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면 어떠랴 싶다. 꽃이 피면 비바람이 잦고, 인생에는 이별이 많나니." 이렇듯 또 한 시절을 잃었으니, 우선은 만나 더 놀아야겠다. (p164-164)


이별까지 담담하게 수긍하는 자세가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졌다. 상실과 아픔을 단순히 슬퍼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까지도, "울지 몰라도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라고 말하는 것이, "그러면 어떠랴 싶다"는 것이, 작가의 가치관과 세상에 대한 시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았다.


이처럼 『잊기 좋은 이름』은 작가 김애란의 가치관과 세상을 바라보는 섬세한 시선이 고스란히 드러난 책이다. 이 산문집에서 작가로서 글을 쓰며 글에 대해 마주하고 진지하게 사색한 끝에 닿은 생각들, 다른 사람들의 문장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나는 이런 점이 좋아 작가의 다른 글들도 좋았다. 작가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엿보는 기분이었다.


책 말미에 보면 제목에 대한 이야기도 실려 있다.


세상에 '잊기 좋은' 이름은 없다. (p300)


'작가의 말'에 작가는 자신은 여전히 어떤 이름들을 잘 모르고 끝내 잘못 부른 이름도 적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다 드물게 만난 눈부신 순간도 있었고, 그 이름과 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 여기 적는다고 했다.


『잊기 좋은 이름』은 그런 작가의 생각을 따라가 보게 되는 책이다.




참조: 김애란,『잊기 좋은 이름』, 열림원, 2019.

대문사진 출처: Yes24 도서 페이지 / 『잊기 좋은 이름』(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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