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음악만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
우리는 흔히 예술이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을 거라 기대한다. 영화를 보고 나면 평론가가 풀어놓은 해설이나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보고, 전시에 가서도 도슨트나 작품 해설 가이드를 열심히 듣는다. 예술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었을 거라 믿고, 그 의도를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서양 음악사를 공부하고 작곡가에 대해 찾아보면서 음악을 이해하려고 한다. 가사도 없어서 모든 해석이 열려 있는 클래식 음악은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듣기에 참 막막하다. 그래도 배경지식을 알고 들으면 음악에서 어떤 메시지나 의도를 읽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하게 된다. 이를테면, 베토벤이 평등을 지지하고 혁명가 기질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왠지 그의 음악에서 평등을 지지하는 메시지가 느껴지는 것만 같다.
예술에 의미 부여를 하려는 시도는 일반 대중들뿐만 아니라 정치계에서도 번번이 있어 왔다. 히틀러가 바그너 음악을 아주 좋아했고, 민족 우월주의와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하고자 바그너 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실제로 바그너는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고 꽤나 끔찍한 사람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이런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가 바그너의 음악을 감상하는 데 영향을 미칠까? 예술가의 사상이나 예술 밖에서의 행위가 그의 창작물을 평가할 때 고려되어야 하느냐의 문제는 최근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딜레마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역사적인 배경이나 창작자에 대한 정보 없이 접하는음악은 그 자체로 무슨 의미일까? 사전 지식을 공부하고 향유하는 예술도 의미가 있지만, 예술은 오로지 예술만으로도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 음악은 음악만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사실 음악은 그저 음의 나열일 뿐이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청소년 음악회>에서 결국 음악이 전달하는 것은 이야기도, 장면도, 메시지도 아닌 오직 감정 뿐이라고 말한다. 베토벤의 음악도, 바그너의 음악도,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오로지 ‘음악’만을 접한다면 우리가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은 ‘감정’ 밖에 없다. 음악 그 자체만으로는 베토벤의 자유에 대한 메시지나 바그너의 나치즘 지지 의도를 읽을 수는 없다.
음악이 전하고자 하는 것이 이야기도 메시지도 아닌 감정일 때, 음악의 역할은 무엇일까?
최근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감정 일기를 쓰고 있다. 상담 선생님은 마음 어딘가에 아무런 가치 판단 없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봐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공간에서만큼은 감정의 정당성을 의심하거나 필요성을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인정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 감정을 가질 만한 ‘자격’이 있을까, 혹시 이 감정이 나를 더 해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감정을 억누르거나 외면한다는 것이다.
음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를 위로할 수 있다. 어떤 메시지도 의도도 없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음악은 가치 중립적인 존재다. 어느 것도 판단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이끌어내어 솔직하게 마주할 수 있게 해줄 뿐이다.
'가슴이 찢어지게 좋다', '시리도록 아름답다', '마음이 미어질 만큼 행복하다'… 클래식에 대해 쓸 때는 부정적인 단어를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거나, 상반된 의미를 가진 단어들을 한 문장에 쓰게 된다. 이렇게 클래식에는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고, 고통과 환희가 뒤섞인다. 예컨대 베토벤 비창 2악장을 들어보면, 따뜻한 선율 속에서도 왠지 모를 쓸쓸함과 초연함이 녹아 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3악장에서는 승리의 감정에 벅차 오르면서도 가슴을 울렁이게 만드는 애수를 느낄 수 있다. 클래식 음악은 너무 슬퍼서 기쁘고, 너무 기뻐서 슬프다. 기쁨 안에 슬픔이 있고, 슬픔 안에 기쁨이 있다.
클래식이 그려내는 이런 복합적인 감정은 곧 우리 인생과도 같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결말에서 성장한 라일리의 기억 구슬에 슬픔과 기쁨이 뒤섞이는 것처럼, 우리는 살면서 여러 감정을 동시에 복합적으로 느낀다. 우리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아무런 판단 없이 긍정하고 공감해 주는 것. 클래식이 주는 위로는 거기서 오는 게 아닐까 한다.
좋은 예술의 역할 중 하나는 사람들이 어렴풋이 느끼고만 있는 것들을 정직하게 마주하게 해주는 것이다. 세상에 없던 완전 새로운 것을 발굴해 내는 것이 아니라, 사실 다들 알고는 있었지만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것을 짚어주는 것.
예술이, 음악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는 ‘세상은 아름답다’라거나 ‘나는 행복하다’는 일시적 환각 효과가 아니라, ‘내가 이런 감정이었구나’라고 낱낱이 일깨워주고 인지하게 해 주는 공감과 치유에서 발생한다.
(..) 클래식 음악은 현실 도피가 아니다. 연주회가 이어지는 동안 우리는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을 뒤에 남겨두지 않는다. 오히려 작곡가와 함께 인간 존재의 가장 심오한 일부를 탐험한다. 음악은 우리를 치유한다. 음악은 진통제가 아니라 항생제다.
-<한 번 더 피아노 앞으로>, 스티븐 허프
음악의 배경 지식을 공부하고 그 너머의 메시지와 의도를 읽어내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음악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불러내는 내 감정을 온전히 마주해보면 어떨까. 그것이야말로 작곡가들이 음악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의도'에 가장 밀접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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