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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늘보 Oct 04. 2023

즉흥의 태도

관성 깨기

대학에서 취미 삼아 듣기 시작한 현대무용 입문 수업에 슬슬 재미를 붙이고 있던 때였다. 현대 무용에서 ‘즉흥(Improvisation)’이 차지하는 비중이 꽤나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즉흥 수업을 신청하게 되었다.


나는 즉흥에 대해 잘 모르는 만큼 즉흥을 동경해 왔다. 즉흥이야말로 예술의 진정한 정점이라고 생각했다. 평소 언어로 사고하고 소통하는 비전공생 일반인에게 춤이나 음악을 통해 즉흥적으로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것은 언제나 신기하고 흥미롭게 다가왔다. 어쩌면 아직 나도 잘 모르는 내 몸에 대해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혹시 평소와는 다른 나의 모습을 즉흥을 통해 알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근거림을 갖고 첫 수업을 기다렸다.


첫 수업에서 선생님은 다짜고짜 눈을 감으라고 했다. 그러더니 ‘알에서 막 깨어 나온 것처럼’ 움직여 보라고 했다.


이 추상적이고 당황스러운 요구에 나는 살짝 실눈을 뜨고 전공생들을 훔쳐보면서 어색하게 울렁울렁 몸을 움직여보기 시작했다. 다들 전공생답게 세련된 몸짓으로 기지개를 활짝 켜듯이, 약하게 떨리듯이, 각자만의 방식으로 ‘알에서 막 깨어 나온’ 몸짓을 선보이고 있었다. 나는 얼른 다시 눈을 감았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말자.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도 말자. 나도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몸이 흘러가는 대로 둬보는 거다. 그렇게 최대한 머리를 비우고 나의 몸에만 집중해 보려고 노력하면서 몸부림치다가 어영부영 첫 수업이 끝났다.


기대했던 새로운 발견 같은 것은 없었다.


다소 얼떨떨하고 아리송했던 첫 수업 이후로도 나는 가끔 즉흥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매번 뭔가 명쾌하지 않았다. 즉흥은 언제나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내가 잘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즉흥이란 무릇 머리가 아닌 몸이 주도해야 하는 법인데, 항상 생각이 너무 많은 나의 즉흥이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나도 프로 무용가처럼 완전한 무의식의 세계에서 자유로운 즉흥을 하고 싶었다. 무용은 몸의 언어니까 정신이 끼어들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완벽하게 머리를 비우는 데 번번이 실패했다. 언제쯤 나는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저 아득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즉흥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즉흥을 할 때는 머리를 쉬면 안 돼요. 적극적으로 머리를 써야 합니다."


여태까지의 강박을 송두리째 뒤집는 이야기였다. 이제껏 나의 의식을 억누르려고 그렇게 애썼건만 사실은 반대로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좋은 움직임이 나오려면 의식적으로 몸을 탐구하고, 끊임없이 다음 동작을 구상해야만 해요.”


그러면서 선생님은 프로 무용가들도 즉흥 무대에서는 ‘다음엔 뭘 하지’라고 계속 생각한다고 덧붙여서 나를 더 놀라게 했다. 내가 동경해 마지않았던 즉흥 무대가 사실은 다 지극히 의식적인 움직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몸과 정신의 완전한 분리가 가능할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은 어디서 온 건지 의문이다. 몸이 정신을, 정신이 몸을 지배하는 경험을 자주 했으면서도 무용할 때만큼은 둘을 분리해야 한다고 참 철석같이 믿었다.


선생님의 조언을 듣고 나는 조심스럽게 억눌러온 의식의 문을 개방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선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찰했다. 최근 들은 무용 수업 선생님의 안무 스타일대로 주로 부드럽고 흘러가는 동작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스스로를 관찰보다 보니 문득 내가 계속 비슷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뭔가 안 해본 걸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맘껏 머리를 굴리며 다음엔 무슨 동작을 해보면 좋을지 생각했다. 계속 팔다리만 움직였으니 이번에는 복부를 위주로 움직여 볼까. 아예 허리 위로 다리를 높이 들어보면 어떨까. 아 참, 나에게는 머리도 있으니 머리를 흔들어보자. 조금씩 더 흥미로운 동작들이 나와서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다음에는 뭘 하지, 그다음에는… 슬슬 생각이 고갈되는 걸 느꼈다.


그때 선생님이 또 다른 팁을 주셨다. “잘 모르겠을 때는 남이 하는 즉흥을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이것도 나에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는데,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 신경 쓰지 말고 내 몸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것 역시 나에게 큰 강박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곡선보다는 직각으로 뚝딱거리며 움직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어색하지만 나도 직각으로 몸을 구부려 보았다. 또 어떤 사람은 몸의 높낮이에 다양한 변화를 주고 있었다. 나는 내가 바닥에서 움직임을 많이 해보지 않았단 걸 깨닫고 바닥에 몸을 뉘었다.


다른 사람들을 관찰해 보니 내가 여태까지 많이 해보지 않은 질감과 형태의 동작들이 보였다. 새삼스럽게 몸을 저렇게도 움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보지 않은 것이라 어색하면서도 새로웠다. 드디어 내가 줄곧 즉흥에서 찾아 헤맸던 새로운 발견을 해낸 것 같아 짜릿했다.


그날의 수업 이후 즉흥에 대한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맘껏 생각하고, 의식하고, 관찰한다. 그리고 어색하더라도 새로운 것을 찾고 시도해 본다.




즉흥 할 때 머리를 써야 하는 이유는 우리 몸이 하던 것만 계속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 없이 움직이면 내가 자주 몸을 쓰던 방향, 높이, 질감, 속도로 계속 움직이게 된다. 따라서 내 몸이 무슨 습관이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다. 그런 다음 그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해보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관성을 깨트려야 한다.


관성의 사전적 의미는 ‘외부의 힘을 받지 않는 한 정지 또는 운동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이다. 인간이 이해하는 한 우주에는 관성의 힘으로 많은 것들이 작동한다. 인간의 몸도 마음도 관성으로 움직인다. 삶도 대부분 관성으로 흘러간다.


관성을 깨는 것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힘든 일이다. 왜 인간은 하던 것을 계속하는 습성이 있는 것일까? 반복은 지루할 법도 한데. 실은 반복이 주는 안온함과 안정감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와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대체로 삶의 주체가 욕망보다는 관성이 되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다. 쉽게 말해 불같은 열정이 사그라들고 그저 안정적인 것, 내가 익숙한 것에 안주하게 된다.


하던 것만 계속하는 관성적 삶에서는 많은 것이 무뎌지고, 나태해진다. 단, 관성이라고 해서 꼭 무료하고 정적인 것만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관성이란 정지뿐만 아니라 운동 역시도 지속하는 성질이다. 겉으로 보기에 어떤 사람은 매우 바쁘고 활달한 삶을 사는 것 같아 보여도, 그것 역시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 관성적 운동일 수 있다. 이 사람은 운동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이미 나태함일 수도 있다. 여유롭고 정적인 삶을 살아보는 것은 되려 이 사람에게는 그 나태한 관성을 깨뜨리는 일일 것이다. 이때는 정지에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 것이다.


욕망이 관성을 이길 때, 삶에 변화가 찾아오고 관성이 깨진다.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특히나 안온한 관성을 깨뜨릴 만큼의 욕망이 생길 일이 점점 줄어든다.


그러니 언제 올지 모를 욕망을 기다릴 게 아니라, 조금 더 적극적으로 관성을 탐구해 볼 필요가 있겠다. 무용 즉흥을 할 때처럼, 삶에서도 가끔 즉흥 할 때의 태도가 필요하다. 나의 관성이 무엇인지 의식적으로 탐구하는 자세. 관성을 깨뜨려보는 용기. 감이 안 잡힐 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가끔 둘러보는 것이다.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고,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 궁금하면 일시적으로 따라 해보기도 하면서. 그렇게 내 삶의 새로운 영역을 발굴해 나가는 것이다.


요즘도 나는 즉흥 수업에서 고군분투한다. 생각이 조금만 느슨해지면 금세 익숙한 흐름과 나태한 반복으로 돌아간다. 낯설지만 흥미로운 나를 찾기 위해 머리를 계속 굴린다. 안락한 관성을 깨트리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이 글은 아트인사이트(https://www.artinsight.co.kr/)에 정식 기고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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