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괴물>
* 본 글에는 영화 <괴물>에 대한 스포일러가 다량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실 분이라면 어떤 스포일러도 보지 않고 관람하길 추천합니다.
그런 작품이 있다. 보고 난 직후에는 큰 감흥이 없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곱씹게 되는 작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이 나에겐 그랬다.
처음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호평 일색이었던 세간의 반응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어도 과연 그 정도인가 싶었다. 한 사건을 여러 사람의 관점에서 보여주는 라쇼몽식 연출법이 특별히 새로운 것도 아니었고, ‘모두가 괴물일 수 있다’는 이야기나 예상 밖의 퀴어 소재도 신선할 건 없었다. 어떤 것이 이 영화를 그토록 특별하게 만든 것인지 단번에 다가오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자꾸 어떤 장면이 떠오른다. 작중 인물들이 생각난다. 멀쩡히 아무렇지 않게 잘 살아가다가도 불쑥 미나토와 요리의 천진하면서도 무력했던 얼굴이 떠올라 잠시 하던 일을 멈추게 된다.
내 일상을 이렇게 붙잡는 이 영화의 힘은 대체 무엇일까.
“괴물은 누구인가”.
메인 포스터에 떡하니 박힌 문구이자 작중 아이들이 하는 놀이이기도 한 이 질문은 영화를 중후반까지 힘 있게 끌고 가는 핵심 동력이다. 1부에서 엄마 사오리의 눈에 학교와 선생님들은 기괴하게 그려진다. 아들의 피해 사실을 은폐하려 하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얼버무리는 학교는 사오리에게 괴물이다. 이때 미스터리물에서의 일인칭 시점 구성에 익숙한 사람들은 혹시 엄마나 아이들이 괴물인 건 아닐지 의심하게 된다. 추리가 계속되다가 2부 호리 선생님의 관점에 다다르면 아이들에 대한 의심이 커진다. 괴물은 미나토일까, 요리일까? 혹은 모두일까? “인간에게 마음이 있는가”라는 포스터의 또 다른 질문을 생각하며 결국 모두가 괴물인 이야기일지 생각한다.
마침내 3부에 이르러 아이들의 이야기가 나오면 이런 접근이 무용지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쩐지 괴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아이들을 의심한 스스로가 부끄럽다는 생각도 든다. 어느 새 질문을 잊고 아이들의 이야기에 빠져든다. '괴물 찾기'는 의도된 오도였다는 점에서 맥거핀과 같이 사용된 셈이다.
하지만 정말로 이 영화에서 ‘괴물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그저 맥거핀 정도로 쓰이고 만 것일까? 영화를 보고 한참 생각해 볼수록 ‘괴물 찾기’는 오히려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에 가깝다는 결론에 닿는다.
변화하는 시점 속에서 영화 속 인물들은 적어도 한 번씩 괴물 같은 얼굴을 보여준다. 사오리는 손녀를 잃은 교장의 마음을 후벼파는 막말을 퍼붓고, 호리 선생에 대해 진위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학교의 열린 공간에서 그대로 까발린다. 호리는 본인도 편모가정에서 자랐으면서 사오리 앞에서 편모 가정에 대한 편견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고, 학교 계단에서 도망치는 미나토를 위협적으로 쫓아가 추궁한다. 영화의 최대 빌런과 같이 그려지는 교장은 물론이고 호리가 곤경에 빠지자마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떠나버리는 호리의 여자친구도, 요리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반 아이들도 괴물이다. 그뿐인가. 미나토는 호리 선생님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주범이며, 천진하기만 한 듯한 요리 역시 아빠가 드나드는 걸스바에 불을 지른 방화범이다.
동시에 이들은 각자의 세계에서 누군가에겐 한없이 따뜻하고 인간적이다. 영화 마지막에 미나토를 이해하고 그에게 삶을 지속할 힘을 주는 유일한 존재가 가장 괴물처럼 묘사되어 왔던 교장이라는 점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최대의 아이러니다. 전사가 거의 나오지 않은 인물임에도 우리는 이 장면 하나만으로 교장의 입체성과 이면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극 중 다른 인물과 마찬가지로 그녀에게도 인간적인 마음과 그녀만의 사정이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단편적으로 봤을 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냉혹하고 ‘괴물 같은’ 지점이 있기 마련이다. 동굴에서 미나토의 ‘괴물은 누구게’라는 질문에 응답한 사람이 사오리였고, 화장실에 갇힌 요리의 ‘괴물은 누구게’라는 질문에 응답한 사람이 호리였다는 지점은 다시 곱씹을수록 서늘하다. 엇갈리는 시선 속에서 누군가는 의도치 않게 누군가에게 괴물이 되고 만다. 무해한 사람은 없다. 그건 영화 밖 관객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에서 어른들은 아이들의 세계에 조금도 침투하지 못한다. 난간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미나토를 붙잡고, 보행자 선을 지키며 걸으라 잔소리하고, ‘들어오지 마시오’ 푯말이 걸린 방문을 열어보지만 사오리는 자신이 안전하다고 믿는 세계 안에 아들을 가둬둘 수 없다. 미나토는 엄마의 안전한 차 안에서 뛰쳐나오고, 폐선된 기차로 향한다. 끝내 사오리는 미나토의 시선에만 걸리는 사각지대를 보지 못하고, 선생님은 요리의 신발이 벗겨지기 몇 초 전 괴롭힘 당하는 장면을 보지 못한다.
사오리와 호리가 영화 내내 무심코 내뱉은 ‘남자는 ~해야지’라는 말들은 미나토와 요리의 세계에서 숨 쉬듯 반복되는 억압이다. 정상 가족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미나토가 평범한 가족을 꾸리며 살아가는 걸 보고 말겠다는 사오리의 소망은 미나토에게 폭력이 된다. 호리가 미나토와 요리를 화해시키기 위해 ‘남자라면 이렇게 화해하는 거야’라고 한 말은 다시금 이들이 이 세계에서 평생 행복할 수 없으리라 확정해 버린다. 그렇게 둘은 의도치 않게 아이들에게 괴물이 된다.
영화 후반, 사오리가 학교에 있을 때 들리던 기이한 소리와 호리가 학교 옥상에 올라섰을 때 들리던 신경을 긁는 배경음이 실은 미나토가 부는 호른 소리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이 소리는 사오리에게도, 호리에게도, 관객에게도 들렸지만 잠시 귀를 스쳐갔을 뿐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넘어가 버린다. 일상에서 대단히 튀고 상당히 귀에 거슬리는 소리지만 누구도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적극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미나토로서는 차마 토해낼 수조차 없는 울분이자 생존의 몸부림이고 존재의 알림이었을 이 ‘소음’은 우리의 일상에서 울려 퍼져도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는, ‘내가 여기 있다’는 소수자의 외침과도 같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간다. 괴물은 누구일까. 호른 소리를 분명 들었으면서 관심 두지 않은 엄마도, 호리도, 그리고 우리도 이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괴물은 누구게?’라는 아이들의 질문에 무심코 응답하는 건 누구였나.
정말 좋은 작품은 일상에 서서히 침투하는 작품이다. 작품을 본 나는 보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내 세계는 이미 조금 달라져 있다. 이제 나는 미나토와 요리의 얼굴이 문득 떠오르게 되는 일상을 살아야 한다.
영화는 끝났지만 끝나지 않았다.
*이 글은 아트인사이트(https://www.artinsight.co.kr/)에 기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