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
류블랴나(Ljubljana)에 도착한 건 사흘 전이다. 남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쓰기도 읽기도 어려운 이름을 가진 이 도시를, 혼자서 꾸역꾸역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긴 어렵다. 사실 아직 런던 여행도 못해봤는데. 로마나 베니스나 나폴리도 가보지 못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프스 남쪽 끝에 조용히 숨어 있는 이 도시에 꼭 한 번 와보고 싶었다. ‘사랑스러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 도시의 이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 도시의 골목골목에 걸려 있는 그 신발들 때문이었을까?
류블랴나에는 ‘트루바리예바(Trubarjeva)’라는 이름을 가진 거리가 있다. 그리고 이 거리에는 낡고, 멋없고, 먼지 쌓인 신발들이 주렁주렁 공중에 매달려 있다. 사실 그리 아름다울 건 없는 풍경인데, 이 신발들이 찍힌 사진을 보았을 때 저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왠지 그 신발 한 켤레 한 켤레에 특별한 사연들이 담겨 있을 것 같았으니까.
이 신발들을, 누가, 그리고 왜, 공중에 매달아놓기 시작했는지는 모른다. 무책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 이유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어쩌면 누군가 그 날 마신 술에 취해 엉뚱한 장난을 한 것인지도 모르고. 그리고는 제 신발을 어디 둔지 잊어버려 그대로 공중에 매달아 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었든 이 풍경이 이상하리 만큼 인상 깊은 건 사실이다. 어딘가 제 신발을 벗어둔다는 건, 왠지 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니까 말이다.
하릴없이 공중에 매달려 있는 이 낡은 신발들은 빈약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러니까 이 신발들을 보았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돌던 누군가가 어쩌다 이 자그마한 도시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을 거라고. 처음엔 지나치게 평화로운 이 도시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오히려 그 평화로움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을 거라고. 때문에 그녀는 세상 곳곳을 헤집고 다녔던 제 신발을 이곳에서 잠시 벗어두기로 했을 거라고. 그리고 6개월이나 1년쯤 후에는 다시 다른 곳으로 떠날 생각이었지만, 그녀는 결국 죽을 때까지 이 도시를 떠나지 못했을 거라고. 그래서 그녀의 신발은 주인이 사라진 후에도 오랫동안 이 도시의 하늘에 매달려 있었을 거라고 말이다.
혼자 이런 상상을 하다가 잠시 웃었다.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지만, 왠지 스스로 만든 이 이야기가 조금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슬로베니아(Slovenia)는 작은 나라이고, 그 수도 류블랴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슬로베니아의 면적은 남북한을 합한 면적의 10 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류블랴나의 인구가 고작 27만 명이라고 하니, 한 나라의 수도라고 해도 이 도시가 얼마나 한적할지는 상상이 갈 것이다.
그런데도 류블랴나에는 여행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구석이 없다. 무슨 이유인지, 이곳의 사람들은 모두 다 굉장히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다. 그러니 슬로베니아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모른다 해도 이 곳을 여행하는 중 곤란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슬로베니아는 2007년, 통화를 유로로 전환하면서 열여섯 번째 유로 사용국가가 되기도 했다. 때문에 물가는 그리 비싸지 않으면서도 미리 환전에 따른 번거로움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은 적당히 친절하고, 음식은 적당히 맛있으며, 동양 여자가 혼자 지나간다고 해서 특별히 더 신기하게 쳐다보는 눈길도 없다. 당연히 괜스레 내게로 다가와 ‘니하오’ 라거나 ‘곤니찌와’라고 인사하는 사람도 없다.
여행자들은 걸어서 류블랴나 성을 오르고, 삼중교(Tromostovje: 트로모스토브예)와 용의 다리(Zmajski Most: 즈마이스키 모스트)를 건너고, 프레세렌 광장(Preseren Square)과 류블랴나 강변을 거닌다. 활기차고도 고요한 이 도시에는 웬일인지 호객꾼도 없고, 빵빵거리며 클랙슨을 눌러대는 차들도 없다. 물론 그런 이유 때문에 이 도시를 심심하게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심심한 생활이 간절해서 여행을 떠나는 나는, 제 이름값을 하느라 관광객들로 인해 몸살을 앓는 다른 도시들에서보다 류블랴나에서 조금 더 행복해진다.
류블랴나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을 달리면 ‘알프스의 눈동자’라는 애칭을 가진 블레드 호수(Lake Bled)를 만날 수 있다. 이 호수에서 바라보는 블레드 섬이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스트리아에서, 헝가리에서, 이탈리아나 크로아티아에서 이 섬을 만나러 온다. 그중 몇몇은 블레드 호수를 보러 온 김에 류블랴나를 거쳤다 가고, 또 그중 몇몇은 별로 대단한 볼거리라고는 없는 이 도시를 그냥 외면해 버린다.
“류블랴나가 좋다고요? 난 너무 심심해서 좀 실망했는데.”
블레드 섬으로 들어가는 나룻배 안에서, 함께 여행을 온 두 명의 한국인 아가씨를 만났다. 서로 한국인인 것이 너무 뻔해, 인사를 하긴 했는데 그 후엔 딱히 할 말이 없어 ‘류블랴나, 너무 좋지 않아요?’라고 괜히 싱거운 질문을 던진다. ‘그렇죠? 너무 예쁘죠?’라고 반색을 할 줄 알았는데, 돌아온 대답은 예상외다. 그런데 막상 이 사랑스러운 도시를, 전혀 사랑스러워하지 않는 다른 여행자를 만나니 나도 모르게 비식 웃음이 나온다. 그러니까, 이 도시를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세상을 떠돌다 어디선가 나처럼 류블랴나를 사랑스러워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와는 왠지 사랑에 빠져도 좋을 것 같다.
사실 류블랴나에 도착했을 때 나는 벌써 일 년 반째 타지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외국 생활을 하는 중에도 여행이 그리워, 한 달 넘게 혼자서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류블랴나까지 발길이 닿았다. 그런데 트루바리예바 거리에 매달린 신발들을 본 순간, 문득 나 역시 내 상상 속의 그녀처럼 잠시 신고 있던 운동화를 벗어두고 싶어졌다. 그녀처럼 나도, 그 신발을 공중에 매달아두고 그대로 류블랴나에 머물고 싶어졌다. 누구도 나를 알지 못하는 이 도시에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신발을 신고, 이 도시에 눌러앉고 싶어졌다. 그러다 언젠가 내가 벗어두었던 신발을 다시 꺼내 신고 류블랴나를 떠나고 싶어지는 날이 오더라도, 당분간은 류블랴나에서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난, 류블랴나에 정착하지 않았다. 이 도시에 도착한 지 꼭 사흘째 되던 날, 나는 신발을 벗어 거는 대신 호스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미리 예약해 둔 자그레브 행 버스를 탔다. 그리고 한참을 달려 슬로베니아의 국경을 벗어날 때까지도 아쉬움에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다만, 혼자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여행은, 아마도 류블랴나를 만나려고 시작했던가 보다고. 이렇게 사랑스러운 도시를 만났으니, 이 여행의 종착점인 크로아티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이다.
류블랴나 여행 정보
나라>> 슬로베니아
통화>> 유로
언어>> 슬로베니아어
비자>> 관광 목적으로 방문할 경우, 비자 없이 90일까지 체류 가능
인접국가>>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주변 도시 이동>>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트리에스테, 오스트리아의 빈,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 등에서 열차나 버스로 이동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