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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lda Aug 09. 2019

'김치전'과 '된장찌개'는 같지 않아요  


식탁 위에 놓인 것은 된장찌개였다. 뚝배기에 담긴 채 여전히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를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물론 반가움의 웃음은 아니었다. 살면서 나는 된장찌개를 좋아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도 몇 시간 후면, 비행기를 타고 먼 나라로 떠나는 딸을 위해 엄마가 마지막으로 만들어 준 음식은 된장찌개였다. 그러니까 내가 웃은 것은, 엄마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유였다. 우리 엄마는 아직도 여전하시구나. 나이가 드셨다는 이유로 딸에게 다정해질 마음 같은 건 아직 없으시구나. 하는 뭐, 그런 종류의 안도감.


“엄마, 그거 알아?”


엄마와 나의 수저를 한 쌍씩 각각 챙겨 들면서 나는 물었다. 사실 엄마를 탓할 마음 같은 건 없었다. 나와 엄마가 같은 집에서 살지 않은 지도 벌써 십 년이 넘었다. 그러니 엄마가 무슨 수로 내 식성 같은 걸 기억하겠는가.


“난 된장찌개 안 좋아해.”


그런데도 굳이 그 말을 하고야 마는 것은 엄마를 닮은 나의 성격 탓이었다. 다정하지 않은 엄마. 다정하지 않은 딸. 나는 세 딸 중에서 엄마를 가장 닮은 딸이었다. 그러니까 엄마도 나의 이런 의도된 무심함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시리라.  


“나는 살면서 된장찌개를 좋아해 본 적이 없어. 된장 냄새를 안 좋아하거든. 그래서 청국장도 안 먹잖아.”


식탁 앞에 앉으며 내가 하는 말을, 엄마는 마치 이국어를 듣는 것처럼 낯선 표정으로 들었다. 네가 된장찌개를 안 좋아한다고? 응. 언제부터? 아주 어릴 때부터.


그러자 엄마의 얼굴이, 옛 기억을 더듬어 보려다가 셋째 딸의 식성과 관련된 기억을 찾아내기엔 자신이 가진 기억이 너무 많음을 깨닫고 곧 그 일을 포기해 버린 듯 아득해졌다.  






버섯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엄마가 만들어 낸 버섯 요리들. 하지만 어릴 때 엄마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지 못하셨다.



엄마에게는 세 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이 있었다. 엄마는 그 아이들을 길러 내느라 하루하루 숨을 허덕이며 살았다. 딸들을 학원에 보내고 아들의 숙제를 봐주고 하는, 그런 삶이 아니었다. 엄마는 우리를 키우면서 일을 쉬어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네 명의 아이를 키웠고, 그런데도 우리 형제들은 밖에 나가면 어느 집안의 외동딸이나 외동아들쯤으로 오해받을 만큼 깔끔한 옷차림을 하고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엄마는 그렇게나 부지런했고, 그렇게나 책임감이 강했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상을 차려 놓고 나간 엄마는, 회사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우리들의 저녁상을 차렸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집 안에서 엄마는 늘 밥을 하고 있었다. 엄마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준 기억을,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엄마에게 칭찬을 들은 기억도, 엄마와 함께 어딘가로 놀러 간 기억도 어디쯤에선가 나는 모두 잊어버렸다. 그런데도 꿋꿋하게 기억 속에 남은 것은 나를 먹이려 드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아침 먹고 가! 싫어. 밥 다 됐어. 지각한단 말이야. 그러면 이거라도 좀 먹고 가. 그럴 때마다 짜증을 내는 나를 붙잡고 엄마가 식탁 위에 올려놓곤 하던 계란말이. 손에 들고 가면서라도 먹으라고 만든 토마토와 계란 샌드위치. 그런 것을 고작 두어 개 집어 먹고, 늦었다고 뛰쳐나가는 내 손에 엄마가 쥐어주던 보온 도시락. 한 끼쯤 안 먹는다고 큰 일 안 나! 그렇게 인상을 쓰며 받아먹곤 하던 사과 주스.


무심하던 엄마는 딸이 반에서 몇 등을 하고, 누구와 친하고, 어떤 아이돌 가수를 좋아하는지는 알지 못해도 어떻게든 딸이 굶지 않고 자라도록 만들었다. 그게 우리가 좋아하는 음식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는 그저 우리를 굶기지 않기 위해 자신의 젊은 시절을 다 보냈다.






사실 나는 엄마가 해주는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엄마의 음식은 너무 깔끔하기만 해서 싱겁게 느껴졌다. 나는 달고 매운 음식이 좋았고 아니라면 고기반찬이 먹고 싶었다. 햄이나 소시지나 계란 반찬이라도 괜찮았다. 어쨌든 가지나 시금치 같은 건 맛이 없었다. 미역국이나 재첩국 같은 건 너무 심심했고, 밋밋한 김치찌개보다는 차라리 라면이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최악은 된장찌개여서, 집 안에 된장 냄새가 퍼질 때면 배가 고파도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이 사라지고는 했다.   


지금은 너무나 좋아하는 엄마표 반찬들. 하지만 어릴 땐 엄마의 요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좋아했던 된장찌개가 이 세상에 딱 하나 있기는 했다. 그것은 나보다 일곱 살이 많은, 그래서 내가 엄마보다 더 엄마처럼 여겼던 나의 첫째 언니가 끓여 주던 된장찌개였다. 언니가 만들어 주던 된장찌개는 엄마가 만들어 주던 그것과 전혀 달랐다. 언니의 된장찌개에는 큼직큼직한 두부나 감자뿐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버섯들이 풍성하게 담겨 있었다. 국물 맛은 한없이 깔끔했고, 어떤 요리법을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싫어하는 그 된장 냄새도 거의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언니가 된장찌개를 끓여 줄 때면,


“언니, 이거 너무 맛있어. 진짜 너무 맛있어.”


라고 매번 감탄을 하곤 했다.


“엄마는 요리를 못하는데, 언니는 왜 이렇게 요리를 잘해?”


그래서 내가 물었을 때, 하지만 언니는 고개를 갸웃- 하며 나를 보았다. 엄마가 왜 음식을 못 해? 그래서 나도 고개를 갸웃- 하며 대답했다. 글쎄, 엄마가 해주는 건 내 입맛에는 안 맞아.


그렇지만 난 언니가 해주는 건 뭐든지 잘 먹었다. 언니가 끓여주는 라면. 언니가 해주는 떡볶이. 언니가 해주는 잡채. 그리고 언니가 해주던 버섯 된장찌개.  


엄마의 삶은 너무 바빴다. 엄마에겐 먹여 살려야 할 자식이 넷이나 있었으니까. 엄마는 내 옆에 있었지만 내 옆에 없었고, 엄마는 나를 먹여 살렸지만 내 마음을 먹여 살리지는 못했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입학 선물을 사준 건 엄마가 아니라 큰언니였다. 나에게 생애 첫 번째 정장을 사준 이도 엄마가 아니라 큰언니였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나는 교복을 갈아입지도 않고 언니 옆에 앉아서 수다를 떨고는 했다. 오늘 우리 선생님이 있잖아. 그러니까, 내가 잘못한 게 아니고 선희가 잘못했잖아. 그치? 학교 시험이 끝나고 오면 내게 시험을 잘 쳤는지 물어보는 이도 엄마가 아니라 언니였고, 그러면 나는 시험지를 꺼내 들고 ‘이 문제는 맞힐 수 있었는데.’라며 언니 옆에서 아쉬워하고는 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도 엄마가 해주는 음식은 언니가 해주는 음식을 넘어설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열아홉이 되던 해, 나는 엄마 곁을 떠났다. 그 뒤로 엄마와 한 집에서 잠을 잔 건 손에 꼽을 정도이다. 당연히 엄마의 밥과도 멀어졌다. 엄마 곁을 떠나 혼자 사는 동안 나는 요리를 하지 않았다. 요리를 하는 귀찮음을 감수할 바에야 그냥 대충 먹고사는 삶을 살기로 했다. 그렇게 엄마 곁을 떠나는 순간, 내 삶에서 ‘집밥’이란 것이 사라졌다.


한동안 나는 친구들에게서 '그렇게 먹고살다가는 죽어서 썩지도 않을 거야.'라는 말을 들을 만큼, 가공된 음식만 먹으면서 살았다. '한국인은 밥을 먹어야 해.'라는 말 같은 걸 들으면 나는 혼자서 코웃음을 치곤 했다. 한 달씩, 일 년씩, 쌀 한 톨 안 먹고도 나는 잘만 살았다. 우연히 먹방 프로그램 같은 걸 보게 될 때나, 맛집에 가기 위해 몇 시간씩 차를 몰고 가는 사람들을 마주칠 때면 이상하게도 엷은 짜증이 스물스물 마음 안에서 피어오르곤 했다. 기껏해야 그냥 먹는 것일 뿐이잖아. 먹고 나면 다 그냥 똑같은 거잖아!


혼자서 그렇게 짜증을 낸 것은, 어쩌면 '집밥'이 없는 삶을 산다는 데서 오는 상실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엄마의 집으로 다시 찾아간 것은 그로부터 십 년쯤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때 나는 살던 집을 정리하고 아일랜드로 떠날 생각이었다. 그래서 정리할 수 없는 물건들을 엄마에게 맡겨 두기 위하여 고향으로 내려 갔을 때, 엄마는 여전히 바빴고, 그러니까 여전히 내 곁에 없었다. 서운하진 않았다. 내가 비행기를 타는 날 아침, 엄마가 나를 위해 마지막으로 만들어 준 음식이 된장찌개라는 걸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엄마는 내가 된장찌개 먹는 거 본 적 있어?”


나는 방금 엄마가 끓여 준 된장찌개를 먹으며 엄마에게 물었다. 나 키우는 동안, 내가 된장찌개 먹는 거 본 적 있어?


엄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 보려 해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엄마의 기억 속에, 어린 시절의 내가 차지할 공간은 별로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엄마에겐 먹여 살려야 할 자식이 넷이나 있었으니까. 게다가 나는 첫째도 아니었고 막내도 아니었다. 넷 중에선 그럭저럭 말을 잘 듣던 셋째 딸이었다. 언니들이 조금 요란한 학창 시절을 보내는 동안, 별 말썽 없이 조용히 사는 나를, 엄마는 늘 ‘믿는 도끼’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때도 이미 철이 들어 있던 나는 ‘믿는다’라는 말이 실은 ‘너에게는 네가 원하는 만큼의 관심을 줄 수 없다’라는 의미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 넌 뭘 좋아하는데?”

“난 엄마가 해주던 김치전 좋아했잖아.”


김치전. 그러니까 그게 나의 soul food 같은 거였다. 나는 ‘엄마의 요리’를 떠올리면 김치전부터 떠올렸다. 그런데도 엄마는 내가 김치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건 별로 어렵지도 않은 거야. 그런데 왜 안 해줘?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엄마가 해준 된장찌개로 밥 한 그릇을 다 비웠다.  






나를 위해 엄마가 만들어 주기 시작한, 채식주의자를 위한 카레



그 날로부터, 다시 엄마의 밥을 먹기까지는 꼭 2년 1개월이 걸렸다. 내가 온 세계를 떠돌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는 내게 물었다.


"뭐 먹고 싶어?"

  

그 질문이 낯설어,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요리를 하기 전, 엄마가 나에게 뭘 먹고 싶은지 물어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 무어라고 대답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김치찌개나 떡볶이 같은 것을 말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 날 이후, 다시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엄마의 곁에서 머물던 나를 위해, 엄마는 셋째딸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하나하나 만들기 시작했다.


김치전 해줄까? 너 카레 좋아하니? 미역국은 먹어? 여기다가 브로콜리를 넣어 달라고?


엄마는 고기반찬은 뭐든 다 좋아하던 열아홉 살의 딸이, 이제는 ‘채식주의자’라는 것이 되어 돌아온 것을 이해하기 힘들어했다. 엄마 식으로 말하면 매일 빵 쪼가리나 먹고살던 딸이, 자신이 해주는 잡곡밥의 광팬이 된 것도 낯설어했다. 그래도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만들어 주기 위해 새로운 요리법을 시도하셨다. 카레에는 돼지고기를 넣지 않고, 햄이나 소시지를 굽기보다는 버섯을 손질해서 볶아주고, 간식으로는 브로콜리나 방울토마토를 내놓으면서.

 




이제 나는, 엄마의 네 명의 자식들 중, 엄마가 해주는 밥을 가장 잘 먹는 딸이다. 다시 엄마 곁을 떠나 혼자 살고 있는 셋째 딸에게, 엄마는 문자를 보낼 때마다


[밥은 먹고 다니니?]


하고 물어보신다. 그럴 때마다, '응.'하고 거짓말을 하는 대신, 나는 엄마에게 어리광으로 대답을 한다.


[아니,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엄마의 답에 마음이 아플 때도 있다.

 

[네가 없으니까 밥을 해놔도 먹는 사람이 없어.]


그래서 나는 다가오는 휴가 때 한국에 가면, 밖에서 밥을 사 먹는 대신 엄마가 해주는 밥을 실컷 먹기로 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시 엄마표 집밥이 최고라고, 판에 박힌, 그렇지만 이제는 나도 이해하게 된 그 말을 덧붙이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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