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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lda Dec 15. 2020

이야기는 계속될 거야, <Little Women>

앞으로도 계속 될 우리들의 이야기, <작은 아씨들>





어린 시절, 엄마가 책장에 사 넣어준 세계명작 전집에서 가장 좋아했던 소설은 <작은 아씨들>이었다. 기억컨대, 그 소설을 네 번이나 다섯 번쯤 읽었다. 열한 살 무렵의, 두 명의 언니를 둔, 셋째 딸이었던 나에게 <작은 아씨들>은 묘하게 내 이야기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우리는 사형제였고, 우리 집도 마치네 집처럼 부유하지 못했으며, 소설 속에서 마치 씨가 전쟁에 나가느라 부재했던 것처럼 나의 아버지도 내 유년시절 늘 집을 떠나 있었다. 


그러니까 <작은 아씨들>은 내가 쓰지 않았는데도 마치 나의 이야기인 것 같은 그런 소설이었다. 나와 가장 닮은 면이 없던 '베스'가 나의 '최애 아가씨'가 된 것도 그녀가 나처럼 셋째 딸인 이유였다. 나는 종종,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세 번째 딸'들이 행복하길 바랐다. 안타깝게도 베스 마치는 그런 아가씨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마치네 가족의 이야기는 내 관심사에서 멀어졌다. 소설에 탐닉했던 학창 시절의 나는, 다른, 더 많은, 나를 더 강하게 사로잡는 이야기들을 만났고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네 자매의 성장 스토리에는 더 이상 큰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 사실 내 형제자매와의 성격 차, 그로 인한 다툼, 다시 이어지는 화해 같은 것들만으로도 '가족 이야기'는 충분했으니까. 거기에 굳이 남의 자매들의 사정까지는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았으니까.




어린 시절, 나의 총애를 받았던 '베스 마치'(Beth March)'




그렇게 멀어졌던 <작은 아씨들>을 다시 만난 건, 2020년 2월의 일이었다. <기생충>의 쾌거를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싶어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고 있던 그 오후, 내 앞에 불쑥 제 존재를 드러낸 것은 '그레타 거윅(Greta Gerwig)' 감독의 <Little Women>이었다. <기생충>과 함께 작품상 후보에 오른 영화 중 <Little Women>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메그'와 '조', '베스'와 '에이미', 그리고 '로리'의 이름들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그들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벌써 언제 적 일인데. 어쩌면 그 이름들은 기억 속에 그렇게 선명하게 살아 있는지. 


사실 나는, 다소 고집스러울 만큼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모든 영화가 결국은 실망스럽기 마련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 원작 소설에 대한 애정이 크면 클수록 영화는 더욱더 실망스러워지곤 한다. 그러니까 나는, <Little Women>이 그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나의 베스'를 내가 생각해 온 만큼의 소녀로 만들어 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설 <오만과 편견>을 각색한 그 어떤 영화와 드라마도, 다아시를 내가 만족할 만큼의 다아시로 표현해 내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를 보았다. 추억이 그만큼 힘이 센 탓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누가 그랬던가? 추억은 아무런 힘이 없다고. 아니다. 추억에는 힘이 있다. 그토록 오랫동안 잊고 있던 과거의 애정을 이렇게 단숨에 현재의 것으로 바꿔 놓을 수 있으니 말이다. 




92회 아카데미에서 <결혼 이야기>로 여우 조연상을 수상한 '로라 던'은 <Little Women>에서는 네 자매의 어머니로 변신했다. - 출처: 아카데미 시상식 공식 홈페이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Little Women>은 나를 조금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영화가 책보다 훌륭하다거나(물론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영화가 원작을 똑같이 구현해 냈다거나(실제로 이 영화는 원작에 꽤 충실한 편이긴 하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 영화가 독립된 하나의 작품으로서 충분히 훌륭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 편집된 방식 때문에 원작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다소 헷갈릴 수도 있지만, 원작을 아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것이 오히려 이야기를 새롭게 즐길 수 있는 장치가 된다. 배우들의 연기는 그 누구의 것도 튀거나 어색하지 않다.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마치 고모'는 너무나 훌륭했고, '로라 던'이 보여준 네 소녀들의 어머니 역할도 좋았다. 아름답지만 다소 허영심이 있는 첫째 '메그'는 '엠마 왓슨'이 분했는데, 영화 속 그녀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동안 내가 상상해 온 메그의 아름다움을 조금도 해치지 않았다. 활달하고 재기 넘치는 말괄량이 둘째 '조'는 '시얼샤 로넌'이 분했는데, 그녀의 연기가 어찌나 마음에 들던지 영화를 보는 내내 어린 시절의 내가 어째서 조를 베스만큼 사랑하지 않았는지 계속해서 의문을 가져야만 했다. 아쉽게도 '베스'는 영화 속에서 다소 존재감을 찾기 힘들었지만, '일라이즈 스캔런'은 베스 특유의 착하고 수줍음 많은 어린 소녀를 잘 보여 주었다. 원작 속 인물과 가장 거리감이 느껴진 것은 넷째 에이미였는데, '플로렌스 퓨'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또는 좋은 의미로든 그렇지 않은 의미로든) 성숙한 '에이미'를 보여주었다. 



 

둘째 '조 마치(Joe March)'를 연기한 '시얼샤 로넌'. 그녀가 보여준 '조'는 여러모로 훌륭했다.



사실 제목이 'Little Women'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원작을 읽던 당시에는 이것이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몰랐다. 영화 속에서 '조'가 자신의 이야기를 가리켜 했던 말처럼 그저 '가족이 티격태격하고 웃고 하는 이야기(a story of domestic struggles and joy.)'라고만 여겼다. '결혼하거나 창녀가 되거나 배우가 되는 것' 말고는 부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없던(영화 속 '마치 고모'와 '조'의 대화 속에 등장하는 말이다.) 19세기 중반의 여자들에 대해서 열한 살의 내가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까 2020년에 <작은 아씨들>을 다시 만난 건, 이 작품을 이제야 좀 더 제대로 만났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네 자매 모두에게 꿈이 있다는 것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그녀들이 각자의 꿈을 꾸고 있었음에도 그녀들에 대한 마치 고모의 평가는 '메그는 가난뱅이와 사랑에 빠졌고, 조는 구제불능이며, 베스는 아프니, 남은 희망은 에이미 너뿐.'이었다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면서도 동시에 현실적인지 예전에는 생각해 볼 틈이 없었다. 너무나 이상적인 어머니로만 그려졌던 '마미'가 실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는 것 역시 그때는 감히 생각해 보지 않았다. 사실 열한 살의 나에게 소설 속 '어머니'란 존재는 아예 관심 밖의 대상이었다. 


어머니? 어머니는 그저 처음부터 어머니인 줄로만 알았지 그녀에게도 꿈이 있었고 열정이 있었을 거라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여자가 무엇을 포기하고, 어떻게 견디면서 어머니가 되는지 열한 살의 내가 무슨 도리로 알 수 있었겠는가. 





소설 <작은 아씨들>이 나에게 네 자매의 좌충우돌 성장기로 남았다면, 영화 <Little Women>은 여자들의 이야기로 남았다.



그런데 2020년에 다시 만난 <Little Women>은 나로 하여금 그 사실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열두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의 그녀들은 모두 꿈을 꾸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들에게 계속 '결혼을 잘하라.'라고만 말한다. 그런 세상 앞에서 '조'는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인지도 모를 부잣집 도련님의 청혼도 거절해 버리고 계속해서 글을 쓴다. 그마저도 '여자 주인공을 반드시 결혼시켜야 하는 이야기'를 쓰면서 그녀는 가난하고 외롭다. '여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세상이 지긋지긋하다.'라고 느끼면서도 실은 그녀 역시 사랑받고 싶다.  


이런 세상의 부당함. 그 세상 속에 존재했던 여자들의 삶. 그것들이 이제야 자꾸만 내 마음을 부여잡는다. 





영화의 원작이 처음 발표된 것은 1868년이다. 그러니까 <작은 아씨들>은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의 이야기인 셈이다. 그 사이 <작은 아씨들>의 이야기는 할리우드에서만도 일곱 번이나 재생산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듯이 그녀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세상은 이미 달라진 것 같은데. 그녀들의 이야기는 이제 그냥 오래된 과거의 이야기인 것 같은데.  

 

물론 지금은 여자 스스로도 돈을 벌 수 있다. 내가 번 돈이 결혼하는 순간, 남편의 것이 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이제 여자에게도 꿈이 있고, 열정이 있다는 것을 안다. 세상은 더 이상 '작은 아씨들'이 살았던 그때와 같지 않다.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에는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여전히 '여자 팔자는 뒤웅박'이라는 속담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능력과 가치를 결정하는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남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떤 이들은 여전히 '여자는 결혼을 잘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 여자들을 볼 때면 그녀들이 마치 본연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존재라도 되는 양 질타의 시선을 보낸다. 2020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여자의 외모가 그녀들의 야심과 재능보다 중요하다고 말하고, 딸이라는 이유로 별다른 차별을 받아본 적 없던 나마저도 집에서는 여전히 '네 동생은 남자니까.'라는 말을 지긋지긋하도록 듣고 산다.   




아마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녀들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세상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세상은 많이 변한 척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놀라울 만큼 예전 그대로이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다시 또 150여 년이 지난 후에는 '여자니까'라거나 '남자니까'라는 말들이 사람들에게 폭력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럴 거라고 쉬이 긍정하긴 힘들다. 그리고 이 세상의 어딘가에, '여자가 무슨. 결혼이나 해.'라는 말을 듣는 여자들이 존재하는 한, <작은 아씨들>의 이야기는 영원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로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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