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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당 Oct 21. 2021

주말 세미나

그놈의 포르쉐


매주 토요일, 진료를 한 시간 일찍 마치고 SRT를 탄다.


아침도 점심도 못 먹고 수서로 올라가는 기차 안은 피로가 흘러넘친다. 일은 일대로 하고 밥은 못 먹고 연수교육은 들으러 가야 하고. 주중에는 학회도 참가해야 한다. 이러려고 잠 아껴가며 공부했나 생각하며 흔들거리는 차 안에서 잠에 든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어디서나 마스크가 필수가 되어 자다가 입이 벌어져도 들키지 않는다. 부끄럽지 않다.


대전역을 지난다.

엄청 빨리 달리면 성심당에 들려서 빵이라도 사 먹을 수 있을까.

어림없다. 다시 잠에 든다.


건너편 승객이 전화통화를 한다. 옆집 아주머니네 손자 돌잔치가 어쨌는지 딱히 알고 싶지 않지만 말씀해주시니 고맙게 듣겠습니다. 결혼식에 갔었는데 어느 호텔 뷔페가 맛있고 고기를 잘 굽더라 하는 이야기 또한 잘 들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양갈비를 좋아하는데 그건 어느 집이 잘합니까? 하고 텔레파시를 보낸다. 내 마음이 전달되지 않았나 보다.


수서역에 내리면 정장 입은 사람도 한껏 꾸민 사람도 보인다. 서류가방을 든 사람과 백팩을 멘 사람을 보면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진다. 당신도 이 주말에 쉬지 못하고 무언가 이루러 가십니까? 그건 당신이 원해서 하는 겁니까 아니면 사회적 압박에 의해 가는 겁니까? 저는 저의 부족함을 견딜 수 없어 매주 기차를 탑니다. 그리고 서울에 와서 끝나지 않을 공부를 합니다.


졸업만 하면, 면허만 따면, 취직만 하면 포르쉐를 타고 40평짜리 아파트도 사고 언젠간 빌딩도 갖게 될 줄 알았다. 대학교 가면 애인이 생길 거야- 라는 엄마의 말처럼. 허상이다. 파노라마 엑스레이에 미치는 당신의 귀걸이처럼 (분명히 빼 달라고 말했는데) 실체를 판독하는데 방해가 된다. 헛된 기대를 하고 있으니 마음만 힘들 뿐이다. 다음에는 주의사항을 꼭 지켜주세요. 


세미나가 4시에 시작인데 3시 50분에 도착했다. 다들 서울 사람들인지 미리 잘 와계시네요. 지방 사람은 밥도 못 먹었습니다. 빈자리를 찾는데 맨 앞자리와 맨 뒷자리가 비어있다. 어쩜 다들 학생 때랑 똑같은지. 맨 앞자리에 앉으면 교수님 눈에 뜨이고 질문만 받는다. 그렇다고 맨 뒤에 앉으면 "맨 뒷줄은 맨 앞으로 옮길게요"라는 레지던트의 말을 따라야 할 수도 있다. 이번엔 레지던트도 없거니와 뒤쪽 벽에 세미나용 간식들이 그득하다. 별 수없지. 맨 뒷자리가 내 자리다. 




- 치과의사가 되면 뭐부터 하고 싶나요?

- 저는 포르쉐부터 사고 싶습니다. 911 아니면 뚜껑 열리는 카브리올레요. 


포르쉐는 무슨. 700만 원짜리 2013년형 쉐보레를 샀다. 기름값이 아까워서 평소에는 버스를 타고 출근한다. 삶은 그렇게 한방에 포르쉐를 허락하지 않는다. 


"졸업하고 6개월간은 적자다."라는 선배의 말. 

그건 정말이었다. 나에겐 6개월이 아니라 1년이었지만.




밤 9시가 되었는데 세미나가 끝나지 않는다.

교수님, 이 세미나에 밥 먹는 시간이 없다고는 말 안 해주셨잖아요. 밥이라도 먹게 해 주세요. 그러나 그의 슬라이드는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배우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나의 시간과 (돈과) 열정을 쏟아부어 좋은 진료를 위해 밥조차 굶는 나는 얼마나 훌륭한 의사인가. 세뇌를 해본다. 귀로는 수업을, 눈으로는 주변에 아직 닫지 않은 밥집을 검색한다. 열린 건 맥도날드밖에 없다. 그거라도 먹어야지.


빈 속을 주려 잡고 노트와 필기구를 가방에 넣고 선릉로를 걷는다. 커다란 대로변에 벤츠가 보인다. 길가에는 마세라티가 주차되어있다. 배기음이 들려서 쳐다보면 BMW와 아우디도 보인다. 호텔까지는 얼마나 더 걸어가야 할까. 배가 고프다. 수업내용과 비슷한 케이스의 환자가 생각이 나 수술 과정을 복기해본다. 마취를 한 앰플 더 하고 연조직 절개는 저렇게 하고. 아- 배고프다. 


숙소에 체크인하기 전에 맥도날드부터 들린다. 키오스크에서 치즈버거 세트 하나를 테이크아웃으로. 콜라를 쥔 손이 차갑다. 숙소까지 걸어가야 하니 옷을 제대로 여민다. 걸어가는 길에 시끄러운 배기음이 들린다. 람보르기니가 텅 빈 대로변을 달린다.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배가 고프니 별 생각이 든다.


나의 차는 쉐보레. 너의 이름은 포르쉐보레. 너도 언젠가 강남대로를 달릴 수 있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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