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를 10번 써야 하는 이유
초등 1학년, 하나씩 독일 알파벳을 배우는 중,
E를 배우면 그걸 여러 번 써 보는 것,
E로 시작하는 단어와 아닌 단어의 그림을 보며
E가 들어간 단어를 골라내는 것,
E와 e를 여러 번 다시 쓰는 것
그게 시작이었는데 네가 우리에게
선생님이 계속 지우라고, 다시 쓰라고 한다며 울었지.
친구들도 네가 쓴 E를 보며 웃는다고 했지.
넌 이해할 수 없었어.
알고 있는 E를 왜 그렇게 많이 써야 하는지를,
왜 같은 것을 또 쓰고 또 써야 하는지를
네가 쓴 E를 왜 지워야 하는지를
담임 선생님과의 첫 면담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해 주신 아이의 수많은 강점은 aber(그런데), 그 단어 뒤로 모두 사라졌다.
과제를 할 때 너무 느리다는 말씀, 과제도 다 이해하고 있는데 그걸 손으로 쓸 때는 너무너무 느리다고 말씀하셨다. 아직 아이가 유치원과 학교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씀, 분명 좋은 이야기도 많이 해 주셨는데 우리 부부에게는 느리다는 단어 하나만 남았다.
아이는 알고 있는 것을 손으로 써서 끝내야 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E를 10번 쓰고 스스로 잘 썼다고 생각하는 것 아래에 별을 그리는 것이었는데 그 별을 그리는 것만 좋아하고 10번을 쓰는 건 엉망이었다.
아이에게 같은 걸 반복하는 이유를 무엇이라 해야 할까 그 답을 나도 찾기 어려웠다. 매일 똑같이 나에게 주어진 일들이 어느 순간 의미 없는 일처럼 느껴진 적이 있었다. 왜 이걸 또 해야 해? 어제랑 다른 게 뭐야?
내 하루가 의미 없이 반복된다고 느낄 때 내가 했던 건 여행이었다. 낯선 공간에 익숙하지 않은 것에 둘러싸여서 거기에서 숨 쉬며 살아있다고 느꼈다. 무엇인가 날마다 달라져야 하고 반복해야 하는 것들은 시시하게 느껴졌다.
이걸 또 해야 해? 여길 또 가야 해? 이 사람들과 또 같이 해야 해? 왜 그렇게 해야 해? 그게 내 마음의 소리였다.
매일 가야 하는 학교가 그런 곳이었고, 직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의미를 찾지 못해서, 그래서 함부로 하기도 했다. 아이가 다섯 번째 E를, 여섯 번째 E를 함부로 하는 것처럼.
매일 보니까, 항상 하니까 중요하지 않다 생각했다. 시시하다 생각했다.
아이의 E를 보며 생각한다. 그리고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첫 번째 E는 호기심이야. 이런 게 있구나. 나는 몰랐어하는 발견이야.
두 번째 E는 순서야. 그래서 E를 쓸 때 뭘 먼저 써야 하는지 의식하는 거야.
세 번째 E는 확인이야. 내가 정말 알고 있는지, 내가 정말 할 수 있는지 말이야.
네 번째 E는 실수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럼 집중하지 못해, 그럴 때 우리는 잘 틀리지.
다섯 번째 E는 반성이야. 네 번째 E를 보며 다시 한번 잘 써보는 거지. 집중해, 기억하고 있어!
여섯 번째 E는 연습이야. 실수하는 부분도 줄이고 한 번 더 해 보는 것.
일곱 번째 E는 완성이야. 이제 다 왔다는 것, 가장 완벽한 모습을 만들어 보는 거지.
여덟 번째 E는 안정이야. 이제 손에 힘을 주지 않아도 정말 예쁜 E를 편안하게 쓸 수 있지.
아홉 번째 E는 역사지,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해 왔는지 돌아보는 거야. 이때 힘들었네, 이때도 잘 넘겼어하면서
열 번째 E는 반복이지. 하나를 알면 다른 새로운 것이 시작돼. 이제 우리는 다른 시작을 하는 거야.
같은 것을 반복하는 것, 그건 무의미한 일상이 아니다. 항상 같은 E가 아니라 조금씩 다르면서 그 안에서 깊이를 더해 가는 것, 그래서 새롭게 하나하나를 채워 만드는 시간, 그렇게 해서 온전하게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을 연습하는 일이다. 사람이 하는 대부분의 일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여섯 살 아이에게는 E를 10번 쓰는 것이 힘든 일
나에게는 일상을 제대로 살아가는 것이 힘든 일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할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