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초등 1학년 첫 가을방학, 숙제
처음 만난 가을방학 생각나니?
선생님도 보고 싶고 친구들과 놀고 싶은데 왜 학교를 못 가는 것인지 넌 그걸 이상해했지. 나는 그게 참 고마웠어. 네가 학교를 사랑하는 것이 느껴져서.
너의 가을 방학 숙제, 난 그게 참 좋았어.
연 날리기,
호박 수프 끓여서 먹기,
낙엽 밟으며 산책하기,
가을 느낌의 차 마시기,
핼러윈 유령 만들어 보기
우리와 하나하나 리스트를 지워가며 했던 것 기억나니? 네 덕분에 가을을 온전히 즐겼지.
너와 연 날리던 날에는 여기 하늘이 그렇게 높은지, 바람이 그렇게 부드러운지 처음 느끼는 사람 같았어
너와 주황색 홋카이도호박을 사 와서 끓여 먹었던 것이 너무 맛있어서 우리 가족 메뉴에 호박수프가 자주 등장했지.
낙엽이 잔뜩 쌓인 동네 곳곳, 공원, 잠깐 기차 타고 나간 외곽 마을까지 우리는 신발이 닳도록 낙엽을 밟았지.
차를 절대 안 마시던 네가 처음 차를 마셔 보기도 했어. 가을 느낌의 국화차, 물 끓이는 것부터 차를 우려 내 마시기 좋은 온도까지 기다리는 것, 그렇게 집중해 차를 마셔본 것이 얼마 만인지.
핼러윈 유령, 우리는 한 번도 챙기지 않았던 날을 네 덕분에 이것저것 찾아보며 휴지심에 종이에 가위, 풀 한참을 뒤적거렸지.
나는 이 숙제가 참 좋았어. 나 혼자서는 하지 않았을 일을 너와 함께 하면서, 익숙해진 일들을 너와 다시 단계를 나누고 하나씩 새롭게 만들어 가면서 지금 오늘을 살고 있다 느꼈어.
가을 산책을 하며 네가 학교에서 지켜야 할 것들을
여러 번 말해 줬지. 절대 잊으면 안 되는 거라면서.
선생님의 질문에 빨리 말하고 싶어도 먼저 손을 들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네가 말할 차례를 기다리는 것!
쉬는 시간에만 화장실에 가야 하는 것, 배고파도 먹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
가방과 신발은 정해진 장소에 두는 것, Hort에서 사용한 장난감과 보드게임, 운동기구를 꼭 정리해야 하는 것!
이렇게 다 함께 있기 때문에 서로 잘 지켜야 하는 것들 말이야.
나는 그런 것들을 잊고 있었어. 우리가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기 위해 지켜야 하는 것들을. 오늘 하루에 맛볼 수 있는 계절을 온전히 느끼는 것, 다른 이와 함께 이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에 내가 해야 하는 것들을 의식하며 생각하며 하는 것.
너의 오늘을 함께 살며 나의 오늘도 살아나는 걸 느껴.
내가 너와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오늘 지금을 바라보며 살고 있구나
살아 있다는 거, 살고 있다는 거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고 있어.
아이가 학교를 좋아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학교가 가기 싫은 곳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학교라는 곳에서 배우는 것을 즐겼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아이의 모습을 보며 내 첫 직장이 떠올랐다. 그때 내 옆자리 선배의 말, 아침마다 내 얼굴을 보면 '오늘 무슨 일이 있을까'하고 신기해하는 표정이라던 그 말.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시작했던 첫 직장, 그때 나는 그곳을 참 사랑했다. 모든 것이 신기했고 모든 것에 의미가 있었다. 내가 보내는 하루가, 그 오늘이 감사했다.
그런데 그건 10년을 가지 않았다. 어느 순간 내가 보내는 오늘에는 오늘이 없었다. 후회가 많은 어제가 쌓였다.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미워해야 하는 오늘일 때가 많았다. 잘 안 될 것 같은 내일을 걱정하는 오늘일 때도 있었다. 내가 신기해하던 일에 경력이 붙으며 나는 오늘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잃어버린 오늘을 다시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다.
아이의 오늘을 본다.
오늘의 계절을 그대로 느껴본다.
오늘 내가 해야 할 일 중 의식해서 치를 것을 찾는다.
함께 하기 위해 지킬 것에 마음을 다해 본다.
그리고 아이와 드리는 잠자리 기도를 생각한다.
오늘도 재밌게 놀았습니다.
오늘 하루 감사합니다.
내일도 재밌게 놀겠습니다.
오늘 하루를 내 것으로 온전히 느끼며 사는 삶
다시 거기서부터 시작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