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했길 바라본다
아주 가끔씩 기억나는 신호등이 있어.
넓은 사거리 신호등에 초록불이 들어오면
작은 도로 신호등에도 동시에 초록불이
들어오던 그 길은
강남 역과 뱅뱅사거리 중간에 있었던 것 같아.
기억은 아련하지만 아마도 역삼로였던 것
같았던 그곳 말이야.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길 기다리던 그날은
봄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던 것아.
오전 11시쯤 해가 부서지도록 눈이 부셨고
높은 빌딩으로 그늘진 건너편에선
먼지와 함께 건조한 바람이 불어왔지 뭐야.
직장을 그만두고 파마를 처음 한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고 무슨 이유였었는지
친구들끼리 장난치는 사이에서
난, 활짝 웃으면서 신호등 색깔이 초록색으로
바뀌길 기다리고 있었어.
그때 신호등 건너편에 서있던 사람들 사이로
낯이 익은 얼굴이 보였고 그와 눈이 마주쳤어.
그는 검은색 뿔테 안경너머로
우리들 아니 나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지.
그 장면이 삼십 년이나 족히 넘은 지금도
아주 가끔씩 선명하게 떠오르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날은 아마도 내가 전 직장으로 퇴직금을 받으러
가던 날이었을 거야.
그리고 신호등에 서있던 그는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기 위해서 막일본에서 공부를 마친
전 직장 회장의 아들이었던 걸로
기억해.
그는 한창 바쁘게 오가는 직장인들 사이에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고 있던
내가 부러웠을까.
아님 한심해 보였을까.
근데 말이야,
그는 내가 부러웠었는지도 몰라.
나의 자유로움이,
나의 새로운 출발이,
그가 행복까지는 아니지만
불행하지 않았길 바라본다.
굿바이, 내 기억 속 신호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