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꾸유 아줌마
2007년 선배네에서 일하던 키 크고 착한 끼구유 부족 아줌마를 잊을 수 없다.
그녀가 만들었던 기데리(콩과 야채를 섞어 만든 음식) 맛은 지금껏 먹어 본 기데리 중 최고이다. 케냐 모든 요리에 기본으로 들어가는 양파와 토마토를 달달 볶다가 감자, 양배추, 피망, 옥수수, 당근, 붉은 콩과 완두콩까지 들어간 기데리는 끼꾸유 부족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다. 다른 반찬이 필요 없을 정도로 고급 진 그 맛은 나에게 추억의 맛으로 기억된다.
아줌마와 선배 네의 얽힌 재미난 이야기가 하나가 있다.
선배 아내는 집에서 남편을 부를 때 `여보`라고 자주 불렀다. 그녀는 남편에게 식사하라고 부르든 일을 부탁하든 늘 그를 여보라고 불렀다. 여보는 남편의 이름이자, 애칭이자, 아이들의 아빠 이름이기도 하다. 그것은 비단 그녀뿐 아니라 나 역시도 그렇다.
끼꾸유 아줌마 이름이 가물가물하다. 케냐 여자들의 흔한 이름 중 하나였던 것은 분명하다.
아줌마는 어떤 일로 선배에게 정확한 발음으로 '여보'라고 불렀는지는 모르겠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닌 여러 번을 말이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웃음을 터트렸고, 선배 아내는 기가 막혔다고 한다.
아줌마는 선배 집에서 월~금요일까지 일해 오던 성실한 분이셨다. 5년 동안 그 집에서 일하던 그녀는 선배 이름이 한국말로 '여보'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평상시에는 미스터 박이라고 불렀지만 선배 이름이 `박 여보`인 줄 알았던 것이다.
여보라는 말, 그러고 보니 내 여보에게 나만 부를 수 있는 특별한 명칭이다. 내 여보가 옆에 있으니 참 좋다.
끼꾸유 아가씨
메리는 우리 집에서 3년 동안 도우미로 일하던 아가씨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자리가 없어서 두 해를 집에서 살림만 하다가 끼꾸유 아줌마를 통해 우리가 케냐에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케냐 오기 전에 나름 정보를 접했지만 현지인 여자들이 집안 도우미를 선호한다는 것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끼꾸유 아줌마는 우리가 메리를 원하지 않으면 그녀는 백수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반강제적으로 나는 얼떨결에 메리을 고용하게 된다.
메리는 `강게미` 동네 안에 끼꾸유 아줌마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의 딸이라고 했다. 메리의 눈은 순박하고 표정은 수줍었다. 키가 167cm쯤 돼 보였고 좋은 에너지가 풍겨 나왔다.
메리는 내가 가장 외롭고 힘들었을 때 나의 여동생이자 유일한 친구였다.
어느 점심 나는 끼꾸유 아줌마의 기데리 음식이 먹고 싶었다. 메리는 열심히 기데리를 요리했다. 우리는 함께 기데리를 먹으며 한국과 케냐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나는 그날 밤 한숨을 못 자고 밤새 화장실을 왔다 갔다 했다. 기데리 안에 들어 간 마른 강낭콩이 덜 익었는지 밤새 배 안에는 천둥이 치는 소리가 났다. 식은 땀을 흘리며 창자가 꼬이는 경험을 한다. 그러나 메리가 만들어준 케냐 식 호박 스튜는 짭조름하니 맛이 좋았다. 이유식을 한참 잘 먹던 둘째는 유난히 메리의 호박 스튜를 좋아했다. 그러고 보니 둘째는 지금도 짭짤한 음식을 좋아한다. 아마도 그때 메리의 요리에 매료된 것 같다.
그녀는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일했다. 내가 셋째를 임신하고 점심을 먹은 뒤 식곤증으로 낮잠을 자는 시간에도 냉장고 위와 부엌 선반을 열심히 닦았다.
큰 아이가 유치원을 가고 내가 영어 과외를 하던 시간에는 둘째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산책을 하며 놀아 주었다. 아이들은 메리를 한국식 발음 그대로'이모'라고 불렀다.
케냐에 오면서 모든 살림은 정리하고 이민 가방 8개에 옷가지와 기본 생활 식기들만 넣어 왔다. 그중에 내가 제일 아꼈던 코넬 접시 다섯 개는 옷으로 정성껏 싸서 이민 가방 안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저녁 준비를 하는데 코넬 접시 한 개가 안 보였다. 이곳저곳을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질 않았는데 어쩌다 휴지통 안을 들여다보니 그 안에 낯익지 않은 물건이 신문지에 돌돌 말려 있었다. 결국 그 안에서 나온 건 반으로 깨진 코넬 접시였다.
접시를 보는 순간, 메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슴이 뭉클했다.
다음날 우리 집으로 출근 한 메리의 눈은 겁을 먹은 듯했다. 나는 메리에게 조용히 말을 꺼냈다.
“메리, 깨진 접시 봤어. 나도 설거지를 하다가 그릇을 자주 깬다.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때는 나에게 이야기를 미리 해 주길 바래. 내가 찾지 않게 말이야."
내 나름 그녀를 생각해서 손에 끼워줬던 빨간색 태화 고무장갑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날 이후 메리는 설거지를 할 때면 고무장갑을 끼지 않았다. 둘 사이에 알게 모르게 우정이 깊어져 만 갔다.
우리 가족이 이사를 가면 메리는 우리 집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왔다. 그녀는 내가 셋째를 출산하러 간 밤에도 두 아이를 돌보았다.
성실하고 젊은 그녀에게 우리는 도우미 일이 아닌 더 나은 생활을 제공하고 싶었다. 남편은 그녀에게 무엇을 배우고 싶냐며 물었고, 그녀는 컴퓨터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메리는 6개월 동안 오후 2시까지 일하고 열심히 컴퓨터 학원을 다녔다. 우리가 또다시 이사를 가면서 그녀 또한 `디카 타운` 어느 사무실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끼꾸유 아줌마의 기데리 맛과 메리의 기데리 맛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나에게 고마운 사람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