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나라에서 언어와 문화 그리고 고산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새내기 선교사였다. 선배로부터 이양받은 사역은 책임감으로 어깨가 무겁기만 했다. 한마디로 말아먹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그렇게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반갑게도 한국에서 선교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왔다. 2007년 6월 나이로비에 도착할 때는 가족이 넷이었는데 2년이 지나자 다섯이 되었다.
케냐로 오기 전, 가족사진을 찍어 주셨던 사진관 사장님은 나와 남편의 변한 모습을 보며 눈물을 훔치셨다. 한 여집사님은 나의 부은 얼굴과 물 빠진 옷을 보더니 예배가 끝나자마자 나를 옷가게로 끌고 갔다. 진심으로 나는 아무렇지 않은데 말이다.
가까운 가족 중에서는 살이 너무 많이 쪘어. 살 좀 빼야지라며 말 끝을 흐렸다. 반면 친정아버지는 나의 모습을 보며 엄마에게 이렇게 말하셨다고 한다.
"애가 고생이 많은가 봐. 얼굴이 푸석푸석하네."
한국에서는 나름 괜찮았던 내가 2년 만에 완전 촌년이 되어 나타났으니 말이다. 짧은 쇼트커트에 퍼대기로 아이를 들추어 업고 참석한 콘퍼런스였지만 나는 마냥 신나고 좋기만 했다.
그날 나는 K선배의 입에서 나온 말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
어림잡아 10명쯤 되는 사람들이 한조가 된 기수 모임이었다. 나는 6기였고 그는 5기였다. 선배인 그가 그룹 모임을 이끌었다. 우린 편안하게 이런저런 이야기와 고민을 나누었다. 내 차례가 되자 선교회를 사랑하는 맘으로 단체의 부족한 점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어느 말 어느 단어에서 K선배의 마음을 뒤틀리게 했는지 모르겠으나 그는 이렇게 말을 했다.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너는 대표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았잖아? 우린 얼마나 무시받았는 줄 알아?”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눈에 띄는 사람도 아니고 특별한 달란트를 갖고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냥 열심히 내 길을 걸어온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무슨 특혜를 받은 것처럼 그는 비아냥거리는 듯 말했다.
1996년 9개월 동안 간사 훈련을 받자마자 수습 간사로 임명을 받고는 이듬해 2월 전임간사가 되었다. 나는 사역 전부터 M단체를 사랑했던 사람이다. 선배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후배들을 사랑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 사역이 아닌 선교단체 그것도 대학생들을 양육하는 길을 선택한다. 선교회 사역은 풀타임이었지만 교회 사역은 주말에만 했다. 선교회 재정 시스템은 사역비와 생활비는 전혀 지원이 안되었다. 믿음으로 재정을 각자 알아서 모금하는 시스템이었다, 물론 지금도 변함없다. 나의 재정은 주말에 만 사역하는 교회에서 나오는 금액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아마도 1997년, 교회 사역비는 월 2십만쯤 되었다. 그러나 후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마치 비즈니스처럼 자유롭게 받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젊은 간사들의 생활은 궁핍했다.
1년은 서울과 수원을 오가며 사역을 했다. 1998년 9월 수원이 성장하자 서울에서 독립시키기로 한다. 그리고 나는 수원지구를 책임지는 대표간사로 임명을 받는다. 이사회를 구성하고 직장모임을 만들어 대학생 선교에 동참을 시켰다. 젊은 사람들로 구성된 모임이라 내가 계획하고 추진하는 사역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간사가 되기 전부터 선교활동을 함께 하던 사람들이었기에 손발이 잘 맞았다.
간사들 사이에 어느새 나는 일 잘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갓 지구가 된 모임은 생동감과 활기가 넘쳤다. 한눈에 봐도 급상 하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해 여름, 나는 우즈베키스탄이란 나라를 방문한다. 포상 휴가였다.
리더십 팀에서 나를 뽑아 포상 휴가를 준 것은 일 잘하면 언제든지, 누구에게든지 기회가 주어진다는 좋은 의도였을 찌 모르나 누구에게는 불편함이 되었을 것이다. K선배가 그중 한 사람이 었나 보다. 우린 서울에서 한 해 동안 사역을 같이 했었다. 싱글이었던 나는 정해진 목표를 차고도 넘치게 해 낸 반면 사역과 동시에 결혼을 한 그는 의기소침한 날이 많았다. 그때 서울지구 대표간사는 이성적인 분이라서 때론 피도 눈물도 없이 평가를 했다. 대충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고 꼼꼼하게 일을 계획하는 분이었다. 나는 그를 존경했고 그의 스타일을 배우고 싶었다.
12명이 모이는 대표 간사 중에 여자 대표간사는 나와 원주에서 사역하는 삼십 대 후반의 간사님 뿐이었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서 좋았다. 그러나 그녀는 곧 캐나다로 개척을 떠났다. 지구의 대표간사들의 모임은 한 달에 1번, 1박 2일로 밤을 새우며 회의를 하고 토론을 했다. 나는 꿋꿋하게 잘도 견디었다. 다행히도 오빠만 셋이었던 나는 남자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았다.
대표는 설교나 강의를 할 때 면 일 잘하는 사람들 중에 내 이름을 거론했나 보다. 한 다리 거쳐 칭찬이 귀에 들어왔다. 열정이 많았던 나는 칭찬에 힘입어 더 열심을 냈다. 눈에 보이기 식이 아닌 진심을 담아서 말이다.
젊은이들과의 공동체 생활은 첫 시작은 아주대 부근에서 7명으로 시작을 했고 두 번째는 아주대 정문에서 10명과 함께 했다. 우린 이곳을 비전하우스라고 불렀다. 비전하우스에는 늘 대학생들로 붐볐다. 이곳에서 리더 교육과 밤샘 집회와 직장인, 이사회 모임이 있었다. 화요일에는 학교에서 채플을, 매일 성경공부와 상담을, 주기적으로 세미나와 회의와 강의를 그리고 1주일에 1번은 충북대학교를 향하는 청주행 버스를 탔다. 그뿐 아니라 전국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기라도 하면 달려가야 했다.
일 년에 4번 있는 간사 수련회는 오히려 나에게 휴식이었다. 늘 잠이 부족했기에 저녁 강의가 끝나면 곧장 숙소로 들어가 잠을 잤다. 다른 여자 간사들은 밤을 새워가며 교제를 했지만 나는 그 에너지가 없었다. 등 뒤에서 시기와 질투와 이간질이 있다는 것은 모른 채 말이다. 그렇치만 상관없이 내 길을 걸었다. 그렇게 수원지구를 세우고 나는 결혼과 함께 인천지구로 발령을 받았다. 인천에서는 기혼자들과 직장인 성경공부를 새롭게 구성하고 후배 간사들을 세웠다.
5년 후,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케냐 선교사로 오게 된다.
몇 해 전에 나의 사역을 반추하며 깊은 상심에 빠진 적이 있다. M단체의 동료와 후배들을 돌아보지 못한 후회와 미안함이 밀려왔다. 잠이 안 오고 눈물이 나왔다.
어느 모임(회사, 신앙공동체, 크고 작은 조직 등등)이든 헌신과 충성을 다하는 사람은 눈에 띄게 마련이다. 그래서 내가 선택되었고 불 소시 개 같은 존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이상 그 어떤 원망이나 후회는 하지 않기로 했다. 사랑했기에 행복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제야 비로소 마음이 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