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회에서는 2년에 한 번씩, 대륙별로 선교사 가족 콘퍼런스가 있다. 아프리카 팀은 처음으로 2015년 4월에 세네갈 다카르에서 콘퍼런스를 열게 된다. 서부 아프리카의 카메룬과 동부 아프리카의 케냐 가족이 다카르로 모이기로 한 것이다. 세네갈의 선교사님은 서부 아프리카 선교를 오래전부터 한 선배였다. 국제 선교회나 국내 선교회는 대부분의 재정은 본부에서 지원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 자신의 역량껏 모금을 하다 보니 다카르로 이동하는 것이 큰 과제와 기도제목이 되었다. 다섯 가족 비행기 값이 6백만 원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세네갈의 선배님은 익히 이런 고뇌를 알기에 친구처럼 지내는 사장님께 케메룬과 케냐 가정의 비행기 값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한다. 선배의 친구 사장님은 천만 원이나 되는 큰돈을 흔쾌히 후원을 해 주셨다. 김 사장님이라는 분은 세네갈에서 크게 생선 사업을 하고 계셨는데 알고 보니 E마트에 세네갈 갈치를 납품하는 주인장이셨다.
케냐 에어라인은말리에서 1시간쯤 쉬었다가 금방 출발하는 작은 비행기였다. 암튼 동부에서 서부로 이동하는 비행 값이 케냐에서 한국 가는 것보다 비쌌다.
드디어 서부 아프리카 말리로 떠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출발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비행기가 상륙한다는 안내 방송이없었다. 아무래도 오늘 안으로는 비행기가 못 뜰 것 같다는 불안한 생각이 드는 순간, 비행기는 서서히 활주로를 돌더니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한번 쉬어서 손님을 태우는 말리에 비행기가 도착을 했다. 그러나 출발 시간이 한참이 지났는데도 상륙 안내 방송이 없더니 결국 비행기는 뜨지를 못했다. 비행기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아마도 나이로비 조모 케냐타 공항에서부터 같은 문제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탑승했던 사람들은 항공사에서 마련해준 버스에 올라 호텔로 이동을 했다.공항에서 호텔을 가는 동안 잘 닦여진 도시를 지나갔다. 도로에는 자가용 몇 대 밖에 없었지만 사 차로에는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소형 오토바이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인도에는사람들이 별로 안 보였고 도시는 한산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시내를 지나자마자 황량한 사막이 눈앞으로 펼쳐졌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 말리로 선교나 여행을 온다면 정말 '말리고 싶다'라며 남편은 아재 개그를 했다. 황무지를 지나 도착한 호텔은 큰 여인숙 같아 보였다. 호텔 가운데에 수영장이 있어서 그나마 고급이라는 단어가 어울렸다. 날씨는 후덥지근하고 모기는 많은데 에어컨 시설이 안된 곳이 일명 스타가 몇 개 그려진 호텔이었다. 방 천장에는 선풍기 팬만 돌아갔다. 오래된 TV에서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낯선 언어가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몇 시간 만에 아프리카 동부에서 서부로 온 것이다. 욕실에는 치약이 없어서 우린 저녁식사를 하고는 테이블 위에 있는 소금을 냅킨에 덜어와 양치질을 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다시 말리공항에 도착하니 요기가 필요했다. 마침 막 오픈을 한 카페에서 빵이라도 사 먹으려고 카드를 꺼냈지만 직원은 달러를 요구했다. 남편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예상을 못 했다며 1달러도 남겨 놓지 않고 짐 가방에 넣었다고 한다. 물론 치약도 돈도 비행기 짐칸에 있었다. 그렇게 우린 하루 늦게 세네갈 다카르에 도착한다.
서부 아프리카의 허브라고 불리는 세네갈은 말리 하고는비교가 안될 정도로 공항은 세련되었다. 공항을 나오자 아침 공기와 함께 비릿한 바다 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숙소로 가는 동안 오른쪽 방향으로 아름다운 바다가 보였다. 날이 밝아 오자 백인들이 조깅을 하고 있을 만큼 바닷바람은 상쾌했고 거리는 안전해 보였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대문이 없는 아파트에 차가 섰다. 마치 한국의 연립주택처럼 주차장이 1층인 5층짜리 아파트였다. 주차장에 주차된 차를 지키는 경비원은 제복을 입지 않고 동네 아저씨들하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케냐에서는 보기 드문 모습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케냐는 아파트 단지가 크든 작든 시내든 외곽이든 주거지 입구에는 높은 대문이 있다. 그 옆으로는 담이 쳐 있고 위에는 철조망이나 전기 팬스가 올라가 있다. 그러나 세네갈은 종교가 이슬람이라서 그런지 외국인이 사는 동네와 현지인 이 거주하는 곳이 구분이 없을 정도로 안전해 보였다. 골목 은 해안 도시답게 발이 푹 빠질 정도로 모래로 덮여 있었다. 집안 곳곳에서 발밑으로 모래가 서걱서걱 밟혔다. 우리가 다카르에 있는 동안 창문 너머로 한국의 황사처럼 모래바람 이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왔다.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곳이라서 그런지 길거리의 작은 상점에서도 맛 좋은 바게트를 쉽사리 살 수 있었다. 불어 발음은 지금까지 들었던 소리하고는 판이하게 달랐다. 콧소리가 들려야 하는 불어가 아프리카식 억양과 섞여 투박함에 가까웠다. 그러나 내 귀에는 세련된 발음보다는 오히려 아프리카 식 불어가 편하게 들렸다. 사실은 봉쥬르, 봉쉬아, 메르시 밖에 할 줄 모르는데 말이다. 누가 아프리카 선교사 아니랄까 봐 손이 안으로 굽나모르겠다.
우리는 김 사장님 부부에게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바다가 보이는 레스토랑에 초대를 했다. 프랑스 사람이 운영하는 유명한 호텔 뷔페식당이었다. 이색적인 모습은 프랑스인 요리사가 직접 오믈렛을 만들고 있었다. 카지노라는 과일가게가 브렌치로 많이 있었는데 프랑스 사람이 카운터에 앉아 직접 돈을 받고 있었다. 아직도 경제적으로는 프랑스의 식민지에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자 왠지 서글펐다.
우리는 세네갈과 주위 나라 한인 선교사 자녀들을 위해 콘퍼런스 임원으로 봉사를 했다. 수련회 장소는 수영장이 큰 휴양지였다. 날씨는 후덥지근하고 물은 시원해서 아이들에 게 아주 적합한 장소였다. 숙소와 콘퍼런스 장소를 오가는 길에는 어른 몇 명이손으로 족히 안아야 할 만큼 허리가 굵은 바오바 나무가 서 있었다. 바오바 나무는 세네갈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인데 현지인들은 새콤한 바오바 씨를 간식으로 즐겨 먹는다고한다.
세네갈 바오바 나무
선교회 팀은 세네갈에 도착하자마자 3박 4일간의 수련회를 위해 몇 차례 임원회의을세네갈의 젊은 한국인 선교사님 두 가정과 함께 했다. 또한 독립적으로 세네갈, 카메룬, 케냐 세 나라의 상황과 선교, 가족 이야기, 선교의 미래 전망과 출구전략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 진지하게 토론을 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MK(선교사 자녀) 수련회를 마치고 다카르에서 차로 1시간 달려간 곳에서 딸기우유에 소금을 듬뿍 담은 듯한 호수의 이름은 레트바였다. 어떤 이들은 물에 몸을 담그기도 했다. 그곳에서 가까운 김 사장님이 운영하는 생선 공장을 방문을한다.
김 사장님은 1989년 20대에 한국의 원양어선 항해사로 일하다가 세네갈의 이웃에 있는 모리타니에 정착을 한다. 5년 후 세네갈에서 수산회사를 운영하며 많은 실패를 겪다 가 성공을 했다.
두 번째 여행지는 세계 유네스코 유산으로 등재된 고레섬을 갔다. 노역 무역의 중심지였던 섬은 유럽 나라들로부터 수차례씩 점령을 당했다. 섬에는 요새와 도로, 광장, 건물과 학교가 있었다. 노예들의 눈물과 고통과 죽음이 매일 교차하던 고레섬은 세네갈 사람들의 한이 담긴 곳일 것이다. 전 미국 대통령 오바바도 다녀간 곳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고레섬을 방문한 노년의 흑인 부부가 한참이나 바다를 보며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고 한다. 자신들의 조상들이 고레섬의 노예 방에서 짐승처럼 취급받다가 유럽과 아메리카로 팔려 갔던 모습이 떠 올랐을 것이다. 어찌 보면 흑인 가수들의 소울이 담긴 노랫소리에는 한국의 정서와 비슷한 한이라는 게 담겨 있다.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가수 조용필 씨와 김수애 씨 그리고 국악인 김영임 씨가 불렀던 노래 가사가 생각이 났다. 아프리카인은 정과 눈물이 한국인처럼 많다.
세 번째로 방문한 곳은 룸 뿔 사막이다. 그곳에서 모래 썰매를 타고 천막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며 밤하늘에서 쏟아져 내릴 것 만 같은 별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북한에서 지었다는 아프리카 르네상스 동상을 보았다. 구리와 청동으로 52미터를 만든 북한의 저력이 느껴졌다. 이 동상을 만들 때 북한 사람들이 다카르에 거주했는데 가끔씩 재래시장에서 한국인들을 만나기라도 하면 얼른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2015년 4월, 고레섬으로 출발하는 배에서 셋째와 나
다카르의 바다음식은 정말이지 나이로비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싱싱하고 가격은 저렴했다. 바닷가에서 막 들어온 홍합을 사서 삶아먹은 적이 있는데 국물은 뽀얗고 맛은 고소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음식점에서는 회덮밥을 먹었는데 쫀득거리는 식감에 두 눈이 휭둥그래 졌다. 바다와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만이 맛볼 수 있는 특권이었다.
쩨부젠이라는 현지인의 음식도 어찌나 푸짐하고 맛이 좋은지 모른다. 커다란 양은 다라 같은 접시에 각종 야채를볶아 놓고 생선을 튀겨 푸짐하게 밥상을 차려 냈다. 커다란 접시 안으로 사람들의 손이 부딪치며 먹는 음식 또한 정감이 넘치는 문화였다. 커다란 바게트 빵을 손으로 뚝뚝 잘라 야채와 생선을 얹어 먹으니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세네갈에서 뜬 비행기가 말리 공항에 잠시 쉬었다.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비행기에 오르자 다시 나이로비로 날아올랐다. 우리 가족은 아무 탈없이 케냐에 도착했다. 습한 기후로 끈적거리던 몸은 고산의 케냐 기후로 금세 건조해졌다. 집에 도착하니 몸 구석구석에서 모래가 떨어져 내렸다. 케리어와 신발과 모자 그리고 모든 짐에서도 모래가 나왔다.
세네갈을 떠나 오던 날, 김사장님은 케냐와 카메룬의 가정 에게 급속으로 얼린 민어를 한 박스씩이나 챙겨 주셨다. 그의 섬김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느껴졌다. 오늘은 무척이나 민어 구이가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