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 키자베 아이들

120년 된 선교사 자녀 학교

by Baraka

케냐에는 120년의 역사를 가진 선교사 자녀 학교가 있다. 대부분 동부 아프리카와 서부 아프리카 선교사 자녀들이다. 개신교 단체에서 파송된 선교사라면 국적을 초월하여 입학할 수 있다. 그러나 선교사라는 증빙서류를 구비해야 만 한다.

어느 해부터 케냐 정부는 선교사 자녀 학교에 대한 룰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로칼 아이들을 10프로 이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후 케냐 중상류층 아이들 뿐만 아니라 외국인 일반 아이들도 입학이 가능하다. 그러나 학교 입소 시에는 학교에서 요구하는 예배와 성경공부, 기도모임 등 기독교 교육과 활동에 대한 동의가 있어야 한다. 비단 이 학교뿐 아니라 나이로비에 있는 두 곳의 선교사 자녀 학교도 마찬가지다. RVA라고 불리는 기숙사 학교에는 400명의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데 그중에 80명의 한국인 아이들이 있다. 학교에는 한국인 스탭 한 가정이 있고 다른 선생님들은 거의 미국에서 온 사람들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외국인 스태프들은 학교에서 보수를 한 푼도 받지 않는다. 현지인 스태프들만 월급을 받는다. 외국인 스탭은 모두 후원을 받아서 살아가는 선교사들이다. 선생님들의 아이들 또한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아이들과 동일한 학비를 낸다. 그 이유는 다른 학생들에게 학비가 더 부가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교사 자녀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거룩한 소명 때문일 것이다.


RVA는 미국식으로 교육을 하지만 일정은 영국식을 따르고 있다. 영국식은 9~11월까지 수업을 하고 12월 한 달은 방학이다. 그 중간에 2박 3일간의 쉼을 갖고 1월~3월에 2학기 수업을 하고 중간에 또 2~3일간 쉼을 갖고 4월 한 달은 방학이다. 마지막 3학기는 5월~7월이고 중간에 3~4일간의 쉼을 갖는다. 방학 한 달은 무조건 학교를 떠나 부모님이 계신 나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짧은 미드 텀에는 케냐 인근 나라에 계신 부모들은 나이로비로 와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자신들이 거주하는 나라로 아이들을 데려간다. 그런 나라는 우간다와 탄자니이다.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가디언의 집이나 케냐에 사는 친구들 집으로 가야만 한다.

나는 4년 전부터 RVA의 한국인 학생들을 위해 가디언을 시작했다. 처음 아이들이 학기를 시작할 때 나이로비에 사는 가디언들의 정보가 필요하다고 부모님들께 정보를 드렸다. 그러다가 부모들로부터 미트 텀 때 아이들을 돌보아 달라는 연락을 받기 시작했다. 첫해는 우간다와 챠드의 선교사님의 자녀 두 명, 두 번째는 가나의 선교사님의 따님 한 명 그리고 세 번째는 탄자니아와 우간와 가나의 선교사님들 다섯 명을 돌보았다. 그리곤 코로나 펜데믹으로 학교 수업이 온라인으로 전환되면서 두 해 반 동안 RVA의 아이들을 만날 수 없었다.


학교 미드텀에는 아이들은 반드시 외부로 나가야 만 한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거주하는 선생님들과 직원들이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6월 3일~ 6일, 3박 4일 동안 14명의 학생들이 우리 집으로 오게 되었다. 나와 남편은 아이들이 오기 1주일 전부터 집안을 정리하고 이블을 빨고 침낭과 매트리스를 햇볕에 말렸다. 침대보를 준비하고 베개 잎을 갈고 마트에서 장을 보며 음식과 고기를 사다 날랐다. 우리 세명의 아이들 또한 익히 RVA의 상황을 잘 알고 있기에 기꺼이 자신들의 방을 내주었다. 아들은 아빠를 도와 고기를 굽기 위해 숯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웠다. 두 딸은 음료를 나르고 반찬을 나르며 잔심부름을 했다.

온 식구가 기숙사에 생활하는 아이들이 최대한 자기 집처럼 편하게 머물 수 있도록 음식과 일정을 준비했다. 허리 디스크가 있는 남편은 매일 파스를 바르며 설거지를 했고 나는 부엌 일로 등짝이 찌릇찌릇하고 손바닥과 발바닥이 후끈거릴 정도로 피곤해서 밤이면 곯아떨어졌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기쁨이 넘쳤다.

케냐와 우간다, 탄자니아, 가나, 말리, 말라위 그리고 챠드라는 여섯 나라에서 온 14명의 아이들을 보고 만 있어도 흐뭇했다.


아이들이 온 첫날에는 삼겹살과 닭다리를 준비하고 김치찌개를 잔뜩 끓였다. 둘째 날은 아침을 먹은 후 나이로비에서 제법 큰 싸리 센타라는 쇼핑 몰에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쇼핑을 하고 영화를 보고 점심을 먹었고 저녁식사에는 닭갈비를 준비했다. 셋째 날은 양고기 숯불구이를 먹은 후 자유 시간을 가졌다. 넷째 날은 한국식품점에서 쇼핑을 하고 중국음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아이들은 학년이 다르고 남. 여가 섞여있어서 첫날은 서로가 어색한 듯 행동했다. 둘째 날에는 어느새 하하 호호 거리며 웃고 떠들었다. 낮에는 어느 아이는 신나게 게임을 하고 어느 아이는 그림을 그리고 어느 아이는 책을 읽고 어느 아이는 운동을 하거나 어느 아이는 소곤소곤 둘만의 이야기를 나누고 어느 아이는 음악을 듣거나 낮잠을 잤다.

둘째 날 저녁부터는 밥을 먹은 후 거실에 모여 마피아 게임을 했다. 부모를 떠나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은 철이 빨리 든다. 밥을 먹고 나면 감사하다는 말을 꼬박하고 냉장고 안에 음료수를 집어넣거나 커피를 마시고 싶거나 드라이기나 다리미를 필요할 때면 허락을 받았다. 다른 사람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지 않으며 고마움에 감사를 표현하는 예의가 몸에 배어있었다.

나와 둘째 아이학생들이 집에 오기 전 날 14개의 지퍼팩에 껌과 사탕과 과자와 젤리와 초콜릿을 담았고 12학년 졸업을 앞둔 2명의 아이들에게는 커다란 초콜릿 세트를 선물로 준비했다.

마지막 날 오후 2시쯤 아이들을 학교버스가 오는 곳에 내려 주고는 깜짝 선물을 안겨 주었다. 헤어지는 찰나 아이들은 나에게 엄마에게 투덜거리듯 학교에 가기 싫다며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쏟아냈다. 가슴 한쪽이 아려오면서 뭉클했다. 나는 울컥하는 마음을 얼른 추스르며 여자 아이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꼭 안아 주었고 남자아이들은 주먹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아이들을 뒤로하며 나는 마음속으로 고백했다.

`얘들아, 너희들을 만나서 참으로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