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바람 나는 도전 No. 1

다시 날아오를 거야

by Baraka

내 생애 첫 영어 강의를 끝마쳤다.

한 달 전부터 강의 요청을 받고 난 후 미간을 찌푸리는 나에게 남편이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주제는 선교회의 '한국 사역의 이해'였다. 머릿속에서는 진작부터 한국어로 1년의 일정이 그려졌지만 문제는 영어였다. 남편은 편하게 강의하라고 했지만 먹기 싫은 음식을 먹다가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15년 전 만 해도 한국의 빠릿빠릿함이 몸에 배어있어서 케냐 사람들이 도통 이해가 안 되었다. 일하는 도중에 일손을 놓고 이야기하는 모습이라든지,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고도 전혀 미안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는 면이라든지 몇 번 얼굴을 안 봤는데 불쑥 도움을 요청하는 태도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의 기대감과 가치관을 내려놓지 않으면 케냐에서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일가친척 없는 나라에서 나 아니면 어린아이들을 돌볼 사람은 없었다. 30개월이 된 첫아이가 동네에 있는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는 막 100일이 지난 둘째 아이와 하루 종일 집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먹거리를 만들기 위해서 하루 종일 부엌에서 요리를 했지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그런 시간 속에서 나 자신에게 물었다.

‘나, 하루 종일 집안에서 뭐 하는 거지?’


케냐에 온 첫해, 2007년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부족 간 피비린내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케냐 살이 5개월밖에 안된 우리 가족은 감금당한 듯 외출을 못했다. 치안 문제가 좋지 않은 케냐의 집에는 창문마다 창살이 설치되어 있어서 실내에서 밖의 하늘을 올려다보기라도 하면 우울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무엇보다도 미션을 수행하러 온 사람으로서 키베라와 단도라와 기뚜라이라는 케냐의 슬럼가는 다 가보고 싶었고 대학이라는 대학은 다 방문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곳은 이래서 위험하고 저곳은 저래서 조심해야 한다는 말에 덥석 겁을 집어 먹곤 했다. 그나마 나를 다독이며 위로했던 것은 남편을 내조하는 일과 아이들을 돌보는 것, 가족이 밥 세끼 잘 먹고 타국에서 건강하게 지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의 모습은 갑자기 소나기를 쫄딱 맞고 처마 밑에 서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 같았다. 그러다가 셋째를 임신하게 되면서 외부활동에 대한 열망을 접었다. 나이로비의 도로는 움푹움푹 파여 있었고 심한 입덧은 아니었지만 시장을 보러 가기라도 하면 고기와 생선이 뒤섞인 꼬릿 한 냄새가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임신 핑계로 쉼을 갖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쉬어보기로 했다.


첫 번째 쉼은 잠이었다. 한국에서 15년 동안 기독교 단체에서 간사로 일하는 동안 잠은 부족했고 몸은 피곤했다. 매일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게으른 사람이라며 죄책감이 들었기에 잠을 충분히 잔다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자보기로 했다. 그 순간부터 이상한 것은 점심을 먹고 나면 으레 한 시간씩 낮잠을 잤음에도 저녁 9시가 되면 또다시 잠이 쏟아졌다. 몸의 어느 한 부분이 고장 난 것처럼 잠은 또다시 잠을 불렀다.

두 번째 쉼은 목쉬기였다. 한국에서 수시로 설교와 강의, 성경공부, 기도회, 회의, 상담 그리고 크고 작은 세미나와 콘퍼런스로 무리한 목사용으로 성대가 결절되어서 말이 안 나올 상태까지 갔다. 그 와중에 대학생들과 함께 해외 봉사 활동을 연해주에 간 적이 있다. 속초에서 동춘 페리를 타고 15시간 만에 자루비노 항구에 도착을 한다. 한국에서부터 이메일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았던 분이 항구에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를 빌려서 그에게 연락을 했지만 전화연결이 안 되었다. 팀의 책임자였던 나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한국으로 출발하는 배를 타고 가는 한 사람을 붙들고 도움을 요청한다. 그는 우리가 타고 온 배를 타고 한국으로 가려는 목사였다. 그는 내 사정을 듣고 자신의 명함을 한 장을 건네주며 급하게 동춘 페리에 올랐다. 항구 사무실에서 일하는 분은 고려인이었다. 나는 그의 도움을 받아 25인 버스를 빌려서 18명의 학생들과 함께 교회로 향했다. 교회의 문을 열어 준 분은 생각지도 못했던 북한에서 탈북한 30대 후반의 남자분이셨다. 그날 밤, 한국에서 젊은 손님들이 왔다는 소문이 동네에 순식간에 퍼진다. 나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코를 드렁드렁 골며 깊은 잠에 빠졌지만 잠귀가 밝은 몇몇 사람들은 멀리에서 울린 총소리를 듣기도 하고 교회 창문이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가슴 졸이며 시작한 봉사활동은 다행히도 이틀 뒤에 현지 책임자와 연락이 닿아서 남은 일정은 순조롭게 일을 마쳤다.

문제는 한국으로 돌아오고부터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숨을 몰아 쉬었다. 그 증상은 한동안 없어졌다가 다시 케냐에서 시작되었다.


이젠 익숙해 진 창살이 있는 창문(지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