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화단에는 붉은 매화가 꽃봉오리를 터트리려고 준비 중이었고 담이 없던 집 둘레로 향긋한 찔레꽃이며 복숭아꽃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방글아, 방글이 집에 있니?"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할머니였다. 내 별명을 아는 사람은 우리 가족과 할머니뿐이었다. 마을 중간에 사시는 할머니가 웬일로 셋째 아들 네인 우리 집에 오신 것이다.
할머니는 방에 들어오지도 않고 마당 한가운데에 서서 나물을 캐러 가자가 하셨다. 익히 나물 캐는 것을 좋아하는 나였다. 할머니는 셋째 며느리인 울 엄마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으셨을 것이다. 나는 냉큼 방에서 나오자마자 소쿠리와 호미를 챙겼다. 할머니는 깨끗한 물에서 자라는 미나리를 캐고 싶다며 멀리에 있는 냇가로 가자고 하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이셨다. 첫 번째 시집간 곳에서 아기를 낳지 못해서 소박을 맞고는 아들 셋인 홀아비 집으로 시집을 와서는 딸과 아들을 낳으셨다. 할머니는 늘 할아버지의 호랑이 같은 성격에 기가 눌려 있었고 집 밖의 마실이라곤 울 집과 같은 동네에 사는 딸 집뿐이었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귀를 쫑긋 세워야지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그러나 나에게 울 할머니는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착한 분이셨다.
할머니와 나는 오솔길을 지나 들판을 걸으면서 길가에 핀 노란 민들레 꽃을 보며 좋아했다. 60세의 할머니와 9살의 손녀의 봄 소풍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직은 손이 시릴 정도로 아침 기온이 차갑게 느껴졌다. 내 손에는 도시락 대신 소쿠리와 호미가 들려 있었지만 할머니가 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내 고향 현충사 인근의 은행나무 길 (2022년 7월) 먼 길을 걸어가면서 할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은 틀림이 없는데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다. 분명한 것은 낮은 동산에 울긋불긋한 진달래가 피어있었고 들에는 온통 신기루처럼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아지랑이 한가운데를 할머니와 손녀인 내가 함께 걸었다는 기억이 있을 뿐이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냇가는 강처럼 넓었지만 깊은 곳에만 물이 흐르고 있었다. 덤블 사이로 콩나물처럼 노란 싹이 고개를 들어 올린 것이 보였다. 분명 미나리가 맞았다.
나는 호미를 모래 속으로 깊이 집어넣고는 뿌리째 미나리를 캐내며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 할머니, 이게 바로 미나리야, 돌미나리.”
할머니와 나는 모녀처럼 호호거리며 이곳저곳을 누비며 향긋한 미나리를 한 바구니 캐고는 쑥이며 냉이도 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봄날의 햇살처럼 마음이 따뜻했다. 점심을 거른 나를 위해 할머니는 댁으로 데려갔다. 늦은 오후에 부엌에서 할머니가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안방 아랫목에서 몸을 녹이었다. 처음으로 할머니의 안방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할아버지는 종종 혼자서 시내버스를 타고 자주 온양 시내에 나가셨다. 할머니 하고는 한 번을 동행하지 않았다. 여름에는 할머니가 준비한 삼베옷을 멋스럽게 차려입고 하얀 모자를 쓰고 안경을 콧등에 얹으면 할아버지는 멋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같은 동네에 사는 손주들을 안아주거나 살갑게 대하지 않으셨다. 나는 어린 나이에도 그런 할아버지가 야속했다. 할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 할머니는 콧바람을 쐬고 싶어서 일부러 나를 찾아오셨는지 모른다.
할머니가 차려 온 밥상은 참으로 소박했다. 시래기 된장국에서 꽁보리밥과 김장김치 그리고 된장에 박아 삭혀 양념을 한 후 밥 위에서 쪄낸 깻잎이 전부였지만 나는 배가 고팠던 터라 음식은 맛있었다. 배는 불렀고 아랫목은 따스했다. 나는 이블에 배어 있는 할머니 냄새를 맡으며 두 눈이 스르륵 감겼다.
잔디가 깔렸던 곳을 텃밭으로 만들어서 몇 개 안 남은 쑥 뿌리를 옮겨 심었다. 생명력이 강한 쑥뿌리는 자리를 금방 잡더니 옆으로 쭉쭉 뻗어 나간다.
쑥을 자르며 체력이 소진됐다는 한 분이 생각났다. 그녀에게 쑥을 보낼 참이다. 쑥으로 부침개나 튀김을 해서 먹으면 그나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다.
1년 내내 계절이 비슷한 케냐에서 텃밭의 쑥을 볼 때면 할머니와 함께 했던 봄날이 영락없이 기억난다.
케냐 텃밭에 쑥을 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