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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아름 Sep 12. 2023

96세 할머니가 처음으로 써 본
"사랑해요, 감사해요"

생각해보니 이 소절 안에 인생이 모두 담겨있습니다

봉화 춘양에 와서 나는 많은 할매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녀들은 모두 '나의 할머니'이자 '춘양 엄마'이다. 장기간 집을 비울 때면 안부가 궁금해지고 걱정이 되는 걸 보니 어느새 가족처럼 마음 방 아랫목 한쪽을 그녀들이 차지하고 있는가 보다. 우리 마을에 홀로 사시는 96세 할머니는 나의 '할매찐친' 중 한 분이시다. 이번 설엔 집에 갈 상황이 되지 못해 96세 할머니와 새해를 함께 보냈다.

할머니는 귀가 잘 안 들리시지만, 트로트 가수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좋아하신다며 9번과 5번을 틀어달라고 하신다. 뉴스 외에는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으니 사실 잘 모르지만, 채널을 다 돌려도 가수들은 아침 방송에는 나오지 않았다.
 
"내가 요즘 정신이 이상해."
"왜요?"
"앞집 오마이, 뒷집 오마이 다 괜찮다고 하는데 내 귀에 자꾸 위잉 위잉 막 소리가 들려. 어떤 날은 보일러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고 방에서 뭐가 삑삑거려.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잘 때도 많아... 근데 여 오마이들은 아무 소리가 안 난대. 나 혼자만 들리는가 봐.

작년 가을에는 마당에서 팥을 까고 있는데 우리 언니가 왔더래이. 아이고, 언니 오셨소! 하고서 얼른 밥을 차려왔어. 그런데 밥을 차려갖고 오니까 우리 언니가 없어졌어. 한낮인데 너무 생생했어. 아무한테도 말도 못 하고 있다가 옆집 오마이한테 말을 했더니 기운이 없으면 헛거이 보인다고 밥을 차려주더라고. 밥 잘 묵으면 그런거이 안 보인다고... 이상해.
 
우리 언니, 돌아가신 우리 언니였어. 내 눈에 너무 생생했어."

할머니도 고우시지만, 할머니의 언니는 정말 미인이시다. 할머니는 돌아가신 언니의 사진을 벽에 붙여놓고 늘 보신다.
 
"언니가 왔다 간 다음 날 꿈을 꾸었어. 남자 하나 하고 여자 하나가 오는데 처음 본 사람이야. 나한테 뭐라고 말을 하는데 못 알아들었어. 그리고 같은 꿈을 또 그렇게 꾸었지!"
 



할머니가 서랍에서 꺼낸 조그마한 책과 종이

꿈에 돌아가신 분이 나타나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기도 하고, 또 할머니 연세가 있으시니 우리 할머니 곧 가시려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한다. 이제 좀 친해졌는데 벌써 어딜 가시겠다는 것인지...
 
"내가 정신이 이상하나 봐. 자꾸 헛게 보이고 들리고... 늙어서 죽을 때가 됐나 봐..."
 
웃으면서 말씀은 하시지만 웃음 뒤의 공허함이 방안을 메운다. 텔레비전 화면은 계속 움직이고 나의 머릿속은 멍하다.
 
"할머니, 커피 타 주세요."

생각의 시선을 돌려야 했다. 달곰하고 뜨끈한 커피를 마시면서 할머니는 서랍에서 조그마한 책과 종이를 꺼내 보여주신다.
                     

할머니가 그리신 한양오백년가  1913년 사공 수가 지은 영사가사(詠史歌辭)로 이 작품은 ‘왕조한양가(王朝漢陽歌)’라고 하였다 ⓒ 다아름

내용은 한양에 도읍을 정한 조선왕조의 흥망성쇠를 노래한 조선왕조의 역사가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내가 그렸는데 무슨 말인지 말이 안 돼. 다들 무슨 말인지 모르겠데. 하하하. 밤에 그냥 혼자 그려봤어."


"할머니, 이게 뭐예요?"


"한양가. 한양가라고 단종 대왕 숙종 대왕님 그런 조선왕조 대왕님들 이야기가 있는 책인데, 할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늘 이 책보고 노래를 불렀어.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책이야."


"할머니, 그럼 글을 읽을 수 있으세요?"


"아니 몰라. 어릴 때 글을 안 배워서 몰라. 나중에 면에서 조금 가르쳐주긴 했는데 늙어서 배워져야 말이지. 그래도 한 번 따라서 그려봤는데 아무래도 안되나 봐. 다들 말이 안 된다고 웃어. 내가 다 늙었는데... 그렇지."



글의 문체도 어렵고 가로가 아닌 세로 방식으로 써 내려진 것을 필사한 것이니 당연히 마을 어르신들이 보실 때는 어려웠을 법하다. 그러니 '뭔 말이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퉁을 치신 듯하다. 동글동글 반듯반듯하게 잘 그리셨다. 이중모음, 이중 자음은 못 읽으시고 간간이 쉬운 글자들은 몇 개 읽으셨다.



그래도 할머니는 당신이 공들여 써놓은 글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할머니, 무슨 말인지 알겠는걸요? 정말 잘 쓰셨네요. 우리 할머니 글씨 정말 잘 쓰세요!"


"뭐가 잘 써. 면에서 오는 사람도 뭔말인지 말이 안 된다고 하는데.... 하하하."


수줍어 웃으신다.


할머니가 고이 보관하고 계시는 책은 '한양오백년가'와 '부모보은록'이다. 먼저 훌쩍 떠나신 할아버지 생각이 나셔서였는진 알 수 없지만, 할머닌 글을 그리셨다.





할머니의 귀가 잘 들렸으면 좋겠다


할머니가 그리신 한양오백년가  상동
할머니가 제목을 쓰신 한양오백년가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한양오백년가를 달력으로 책가위를 입혔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한양오백년가'라고 쓰셨다.ⓒ 다아름


할머니의 귀가 잘 들렸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간절해졌다. 속 시원히 들리면 뭐라도 알려드릴 수 있는데. 할머니는 입 모양을 보고 말을 알아들으시는 듯했다. 종일 들리지 않는 텔레비전을 켜놓고 화면을 바라보시는 할머니께 뭐라도 하나 알려드리고 싶었다. 할머니의 두 손을 잡고 귀가 들리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해 드린 후 종이에 두 소절을 써 드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 할머니가 완벽하게 읽고 이해하실 수 있는 글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다 ⓒ 다아름


"사랑해요. 감사해요."


"할머니, 짬짬이 읽고 따라 써보세요."


할머니는 이중모음, 이중 자음은 못 읽으셨지만, 이 여덟 글자는 정확하게 소리내어 읽으신다. 여덟 글자의 뜻도 완전하게 이해하셨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이니 말이다.


생각해보니 살면서 수많은 대화를 하고 표현을 하며 다들 숨 가쁘게 인생을 살아내지만, 마지막에 남는 것은 결국 이 여덟 자 아닌가 싶다. 태어나서 제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며 산해진미를 먹고 살아도 결국은 딱 한 줌의 재가 되어 흙으로 돌아가듯 인생 마지막에 남는 것은 감사와 사랑뿐이지 않은가. 할머니는 소리내어 이 글자를 몇 번이고 읽고 또 써 보신다.



"사-랑-해-요. 감-사-해-요."


참 좋은 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다. 

'할머니! 사랑해요.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주셔서 감사해요!' 속으로 되뇌어본다.  




덧붙이는 글 | - 꿀벌이 꽃가루에서 꿀을 채취해오면 우리가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벌꿀이 바로 되는 것이 아니랍니다. 발효와 수분건조 과정을 통해 변하지 않는 꿀이 됩니다. '사랑'과 '감사'라는 것도 결국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네 인생을 윤택하고 아름답게 하는 변함없는 진리인가 봅니다. 매 순간 표현해도 좋은 말. '감사해요. 사랑해요'가 가득한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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