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억지춘양시장 최명인 상인회장을 만났다
"주먹 하나는 다른 사람한테 안 지죠."
중후한 톤의 음성으로 사투리 하나 없이 세련된 화법을 구사하는 최명인은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 올해로 억지춘양시장 상인회장 3년 차이다. 해박하면서도 유연한 태도는 사뭇 고수 같았다.
국가대표가 되지 못한 아픔에 모든 사진을 다 태워버렸다. 시간이 이렇게나 지나고 나니 이제 상처도 아물어지는 것을. 사진 태운다고 기억도 과거도 없어지는 것이 아닌데. 생각해보니 아쉽고 안타깝다. 마지막 남은 한 장의 사진이라도 있으니 그래도 다행이다.
"저에게는 가슴 아프기도 한 이야기이죠. 사실 저는 유도선수였어요."
그는 사실 장래 유망한 유도선수였다. 국가대표 후보군에 발탁되어 한국유도대학(지금의 용인체육대학)에 입학했다. 1971년 국가대표 선발전을 앞두고 갑작스레 찾아온 복막염으로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고, 그 충격으로 열패감에 시달려 2년 동안 폐인처럼 살았단다.
"더 이상 좌절하고만 있을 순 없었어요. 바닥까지 내려가니 살고 싶더라고요."
1974년 1월 갓 스물을 넘은 그는 주머니에 500원짜리 동전 두 개를 넣고 춘양역에서 청량리행 밤 열차에 무작정 올라탔단다. 무임승차다. 자정이 넘은 어둠 속 청량리역 광장 앞에 유독 한 집만이 불을 밝힌다. 해장국집이다. 그는 그 집 삐끼로 취직했다. 숙식도 옵션으로 따라왔다.
"역에서 내리는 손님을 모셔 와야 하는 데 가게 앞 광장에서 집단싸움이 자주 있는 거예요. 그런 날은 가게문을 닫고 공치는 거예요. 아이고, 제 목구멍이 달린 일인데 어떡해요."
전농동 588 상권에 개입된 소위 어둠의 세력과 역전에서 구두닦이를 하던 청소년 단체인 소위 BBS 간의 빈번하게 싸움이 일어났다. 최명인은 BBS 편에서 싸웠다. 그 세계는 밀물과 썰물처럼 정기적으로 영역 싸움은 있었지만, 그런대로 해장국집 일도 조금씩 안정세를 찾아갔다. 그러다가 국회의원 운전기사까지 하게 된다.
"청량리역에서 아버지 친구가 저를 봤나 봐요. 6개월 만에 아버지한테 잡혀갔죠. 당시 민주당 원내총무였던 국회의원의 운전기사로 취직을 시키셨어요. 의원님은 북악스카이웨이로 날마다 출근을 하셨죠. 그런데 사모님에게 제가 의원님 관련 일정을 보고하지 않으니 결국 석 달 만에 잘렸죠."
춘양에서 산판업(나무를 벌목하는 현장을 산판이라 하고 그러한 업을 운영하는 것을 산판업이라고 한다. 당시 산판업은 지역유지들이 하는 매우 큰 사업이었다)을 한 부친 덕분에 그는 매우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인생이 뜻대로만은 되지 않잖아요. 춘양 옆 영월군에 있는 영암운수에 취직을 했어요. 그때가 서른세 살 때였어요."
"영월터미널에는 기사들이 동서울로 가는 손님을 모시기 위해 터미널 홈에 서로 버스를 대려고 경쟁을 했어요. 시합을 치르는 것처럼 항시 긴장감이 감돌았죠. 그날은 일찍 터미널에 도착해서 홈에 버스를 대려 하는데 경기운수가 여유 자리가 있는 데도 차로 홈을 막아놓은 거예요. 열이 확 받는 거예요. 당장 사무실로 따지러 들어갔죠."
말보다 실천이라는데 주먹이 먼저 나갔다. 버스 창문은 깨졌고 경기운수 직원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먹고 살자고 시작한 운전이었는데 영창 신세를 졌다. 영월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룻밤이 가고 또 하룻밤이 갔다. 아이고! 직원이 살아났다.
결국 경기운수와 영암운수 회장이 만나 합의를 했다. 영암운수 박회장님이 모든 민형사상의 책임을 다하는 조건으로 청년은 일주일 만에 풀려나고 노선은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큰 대가는 치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반드시 정리되어야 할 문제였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1981년, 청년은 아진여객(현 코리아와이드) 춘양영업소장이 되었다.
"버스안내양이 없어지고 자율배차가 되면서 매표소 관리에 차 사고처리까지 하려니 힘이 여간 부친 것이 아니었어요. 영업소도 운영하고 사고처리를 하려니 뭘 알아야죠. 결국, 손해사정사 자격을 딴 거죠. 웬걸요? 자격을 따고 나니 연봉이 두 배로 오르는데 정말 생활이 윤택해졌어요. 하하하."
지금의 코리아와이드인 아진여객 춘양영업소를 맡았을 때이다. 당시에 춘양에는 대구·경북과 태백을 잇는 노선이 있었다. 안내양이 없어지면서 영업소에서 자율배차를 했다. *자율배차란? 승차권 확인과 승객운임징수업무가 기사 자율에 맡겨진 것을 말한다.
영업소에서 버스를 타고 내리는 고객의 상당수는 예식장 하객들이었다. 지금은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지만 춘양에는 두 개의 큰 예식장이 있었다. 삼광과 서울예식장에는 매 주말 4~5건의 예식이 있었고 시장통과 면내 거리는 북적거렸다. 하객들을 위한 대형식당은 두 곳뿐이었고 메뉴는 한우 불고기 백반이었다.
"한우가 당시 한 근에 만 오천 원에서 이만 원할 때 수입 소고기가 4~5천 원 선이었어요. 한우는 또 수입 소고기보다 질기기도 하니 '이거다!' 싶었어요."
청년은 즉시 소불고기 식당을 차렸다. 대박이었다. 돼지고기 뒷다리에 덕지덕지 붙은 못생긴 비계처럼 온갖 뒤숭숭한 이야기들이 들려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수입축산물 전문점도 오픈했지요. 가격경쟁력이 엄청났어요. 매달 4~500킬로의 소고기를 팔았죠. 연 매출이 5억이 넘어갈 정도였으니까요."
수입축산물점을 시작하며 그는 억지 춘양시장 상인회에 입성했다. 어린 시절에는 오로지 국가대표 유도선수만이 인생의 목적이자 종착지였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열차는 정해진 궤도를 따라 반드시 예정했던 종착역에 도착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인생(人生)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1950년대 자전거조차도 귀할 때 혼다 오토바이를 몰고 다닐 만큼 유복했던 어린 시절, 그러나 예상치 못한 파도의 고는 높았다.
"나이가 들어가니 아픔도 치유되고 고향이 더없이 좋아졌어요. 그래서 고향이구나 싶었죠. 파란만장한 젊은 날을 보내고 나니 이젠 내 고향에 뭔가를 남기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상인회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2021년 상인회장 취임 당시 시장에는 157개 상회가 있었고 상인회원은 57개였다. 지금은 157개 상회가 모두 회원이다.
"처음에는 상인회가 의무만을 가진 조직처럼 여기면서 상인들이 권리주장만 했었어요. 그런데 '해주세요!'가 아니라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로 바뀌더라고요. 정말 보람이고 기쁨이죠. 마음이 하나로 모여가는 것 같아요."
상인들은 설비자격증이 있는 그가 시장을 지나갈 때마다 고칠 것을 모조리 이야기한다. 얼어 터진 보일러도 전기도 모두 그가 직접 고쳐준다.
그의 바람처럼 억지춘양시장이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이 주관하는 2023년 문화관광형 시장사업에 공모하여 선정되었다.
"2년짜리 사업으로 기간은 짧지만 우리 시장을 사람이 북적거리는 가고 싶은 시장으로 만들고 싶어요. 단양군이나 타지역과도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독창적인 콘텐츠를 만들어볼 계획이에요"
국가대표 유도선수 유망주에서 해장국집으로 건설 현장으로 운수회사로 인생의 파도는 참으로 질곡이 많았나 보다. 스포츠 경기는 승부로 판가름하지만 인생은 그렇지가 않은 것이 살아봐야만 끝까지 가봐야만 아는 일이니 그러하다. 국가대표 운동선수도 때가 되면 은퇴를 해야하는데 인생은 마지막 날까지 선수로 뛸 수 있다. 그의 인생 경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의 인생 최고의 순간은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그렇다. 그는 국가대표다.